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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 강경애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26
동정(同情) “아침마다 냉수 한 컵씩을 자시고 산보를 하십시오.”하는 의사의 말을 들은 나는 다음날부터 해란강변에 나가게 되었으며 그곳에 있는 우물에서 냉수 한 컵씩 먹는 것이 일과로 되었습니다. 처음에 나는 타월, 비누갑, 컵 등만 가지고 나갔으나 부인네들이 물 길러 오는 것이 하도 부럽게 생각되어서 어느덧 나도 조그만 물동이를 사서 이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번번이 우물가에는 부인으로 꼭 채여서 미처 자리 얻기 가 대단히 힘듭니다. 아마도 이 우물의 물맛이 용정에서는 제일 가는 탓으 로 부인들이 이렇게 모여드는 모양입니다. 내가 물동이를 이고, 가지가 조롱조롱 맺힌 가지밭을 지날 때마다 혹은 그 앞에 이슬이 뚝뚝 듣는 수수밭 옆을 지날 때마다 꼭 만나는 여인이 있으니, 언제나 우리 사이는 모른 체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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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 여탐정 | 차상찬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21
단발 여탐정(斷髮 女探偵) 광해군(光海君) 십오년 계해 서기 일천육백이십삼년 삼월십오일(十五年 癸 亥, 西紀 一六二三年 三月十五日)밤에 청천벽력 같이 일어난 인조반정(仁祖 反正)의 정변은 그 전날에 (前日[전일])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쫓아내 고 자기가 왕위(王位)에 들어서던 소위 세조반정(世祖反正)과 또 중종(中 宗)이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대신 임금이 되던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아울러서 이씨 조선역사상(李氏朝鮮歷史上) 삼대정변으로 큰 정변들이었다. 그 반정운동(反正運動)에 표면(表面)에 나서서 온갖 음모(陰謀)와 활약을 다 하던 사람들은 물론 당시 서인파(西人派)의 김류(金瑬), 최명길(崔鳴 吉),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신경진(申景鎭), 이서(李曙), 심기원(沈 器遠), 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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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어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16
冷 凍 魚[냉동어] ── 딸의 이름 ── ……바다를 鄕愁[향수]하고, 딸의 이름 澄祥[징상]을 얻다. 1 ××빌딩 맨 위층 한편 구석으로 네 평 남짓한 장방형짜리 한 방을 조붓 이 자리잡고 들어앉은 잡지 춘추사(春秋社)의 마침 신년호 교정에 골몰한 오후다. 사각, 사각……. 사그락, 삭삭……. 단속적으로 갱지(更紙)에 긁히는 펜 소리 사이사이, 장을 넘길 때마다 종 이만 유난히 바스락거릴 뿐, 식구라야 사원 셋에 사동 하나 해서 단출하기 도 하거니와, 잠착하여 아무도 깜박 말을 잊는다. 종로 한복판에 가 섰는 빌딩이라, 저 아래 바깥 거리를 사납게 우짖으며 끊이지 않고 달리는 무쇠의 포효와 확성기의 아우성과 사이렌과 기타 도시 의 온갖 시끄런 소음이, 그러나 이 방안에선 그리하여 잠깐 딴 세상의 음향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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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가을밤 | 이익상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14
지평선 위에 걸린 해와 창공에 오른 달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나의 옛날에 들은 바 해와 달 이야기를 아니 생각할수 없습니다. 새빨갛게 이 글이글하게 달은 해와 얼음덩이처럼 싸늘하고도 맑은 달이 나의 어린 마 음에 깊이깊이 뿌리박았던 것이 오늘까지에도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가 합니다. 이것은 내가 칠팔 세 되었을 때 어느 가을밤 일이었습니다.그러니 이 일처럼 나의 어렸을 때의 모든 기억 가운데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다시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언제와 마찬가지로 등잔불 아래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 니다. 그때는 가을이라 겨울옷 준비에 매우 바쁜 것이 어린 나에게도 알 려줄 만하였습니다. 등잔불이라 하여도 오늘 같은 전기등 같은 것은 물 론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내 집은 시골이었으므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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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 이상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10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 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 놓소. 가공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 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정신이 제멋대로 노는 사람)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 ----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을 영수(받아들이는)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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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따는 콩밭 | 김유정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06
金[금] 따 는 콩 밭 땅속 저 밑은 늘 음침하다. 고달픈 간드렛불. 맥없이 푸리끼하다. 밤과 달라서 낮엔 되우 흐릿하였다. 거츠로 황토 장벽으로 앞뒤좌우가 콕 막힌 좁직안 구뎅이. 흡사히 무덤 속 같이 귀중중하다. 싸늘한 침묵 쿠더브레한 흙내와 징그러운 냉기만이 그 속 에 자욱하다. 고깽이는 뻔찔 흙을 이르집는다. 암팡스러히 나려쪼며 퍽 퍽 퍽 ─ 이렇게 메떠러진 소리뿐 그러나 간간 우수수하고 벽이 헐린다. 영식이는 일손을 놓고 소맷자락을 끌어당기어 얼골의 땀을 훌는다. 이놈의 줄이 언제나 잡힐는지 기가 찼다. 흙 한 줌을 집어 코밑에 바짝 드려대고 손가락으로 삿삿이 뒤저본다. 완연히 버력은 좀 변한 듯싶다. 그러나 불퉁 버력이 아주 다 풀린 것도 아니엇다. 말똥버력이라야 금이 온다는데 왜 이 리 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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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03
이 1편은 「어느 일요일날의 삽화(揷話)」의 속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인바 그 「어느 일요일날의 삽화」는 어떠한 사정으로 발표를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하여 둔다. (작자) 오월달 어느 날. ─ 아침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P는 같이 모여 점심을 먹던 동지들을 작별하고 M과 같이 종로 네거리로 나섰다. 벌써 세 번째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P에게는 처음 때와 달라 별로 이 ‘출옥한 때의 특이한 감상’같은 것은 첨예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이번 이 사 년─칠 년이었으나 삼 년은 감형이 되었다 ─사 년이라는 비교적 긴 동안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변천된 경성의 면모가 현저하게 그의 눈에 띄었다. 타일 입힌 여러 층 벽돌집, 디파트먼트, 빌딩, 일류미네이션, 쇼윈도, 그리고 여객 수송 비행기, 버스, 허리가 늘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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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0:49
1 “천당에 못갈 바에야 공동변소에라도 버릴까.” 겹겹으로 싼 그것을 나중에 보에다 수습하고 나서 건은 보배를 보았다. “아무렇기로 변소에야 버릴 수 있소.” 자리에 누운 보배는 무더운 듯이 덮었던 홑이불을 밀치고 가슴을 헤쳤다. 멀쑥한 얼굴에 땀이 이슬같이 맺혔다. “그럼 쓰레기통에라도.” “왜 하필 쓰레기통예요.” “쓰레기통은 쓰레기만 버리는 덴 줄 아우 ─ 그럼 거지가 쓰레기통을 들 쳐 낼 필요가 없어지게.” 건은 농담을 한 셈이었으나 보배는 그것을 받을 기력조차 없는 듯 하였다. “개천에나 던질 수밖에.” “이왕이면 맑은 물 위에 띄워 주세요.” 보배는 얼마간 항의하는 듯한 어조로 말 뒤를 재쳤다. “─ 땅속에 못 파묻을 바에야 맑은 강 위에나 띄워 주세요.” “고기의 밥 안되면 썩어서 흙 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