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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이 | 백신애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54
유록 저고리 다홍 치마에 연지 찍고 분 바르고 최서방에게 시집오던 그 날부터 이때까지 열네 해 동안이나 불리어오던 복선이라는 그 이름 대신 ‘최서방네 각시’ 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울타리 밑에서 동리 아기들 소꿉놀이에 서투른 어린 솜씨로 만든 ‘풀각시’ 같은 복선이다. 가름한 얼굴이라든지 호리호리한 몸맵시며 동글동글한 눈동자 소복한 코끝이며 다문다문이 꼭꼭 박힌 이빨 모두가 어느편으로 보아도 소꿉놀이에 나오는 각시 그대로였다. 지금은 최서방네 각시인 복선의 맏되는 복련이도 열네 살 되는 가을에 남의 집에 머슴살이하는 ‘김도령’에게 시집을 갔다가 불행히도 사들사들 마르기 시작하더니 단 일 넌도 못 되어 애처롭게 죽고 말았었다.그러므로 그들의 부모는 복선이도 일찍 시집을 보냈다가 복련이처럼 죽게 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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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 나도향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53
거안 위에 피곤한 손을 한가히 쉬이시는 만하 누님에게 한 구절 애닯은 울음의 노래를 드려 볼까 하나이다. 1 저는 이글을 쓰기 전에 우선 누님 누님 누님 하고 눈물이 날 만치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누님을 불러 보고 싶습니다. 그것도 한낱 꿈일까요? 꿈이나 같으면 오히려 허무로 돌리어 보내일 얼마간의 위로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러나 그것도 꿈이 아닌가 하나이다. 시간을 타고 뒷걸음질친 또렷하고 분명한 현실이었나이다. 저의 일생의 짧은 경로의 한마디를 꾸미고 스러진 또다시 있기 어려운 과거이었나이다. 그러나 꿈도 슬픈 꿈을 꾸고 나면 못 견딜 울음이 복받쳐 올라오는데, 더구나 그 저의 작은 가슴에 쓰리고 아픈 전상(前傷)을 주고 푸른 비애로 물들여 주고 빼지 못할 애달픈 인상을 박아 준 그 몽롱한 과거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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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삼룡이 | 나도향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50
1 내가 열 살이 될락말락 한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靑葉町)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연화봉(蓮花峰)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려다보면은 오정포(午正砲)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그 산등성이 이쪽이 연화봉이요, 그 새에 있는 동네가 역시 연화봉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네 딴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십여 호밖에 있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과목밭을 하고, 또는 채소를 심거나, 아니면 콩나물을 길러서 생활을 하여 갔었다. 여기에 그중 큰 과목밭을 갖고 그중 여유 있는 생활을 하여 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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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따라기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48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 할 위엄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고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런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나는, 잠시도 멎지 않고 푸른 물을 황해로 부어 내리는 대동강을 향한, 모란봉 기슭 새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뒹굴고 있었다. * 이날은 삼월 삼질,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물 위에는, 결결이 반짝이는 물결을 푸른 놀잇배들이 타고 넘으며, 거기서는 봄향기에 취한 형형색색의 선율이, 우단보다도 부드러운 봄공기를 흔들면서 날아온다. 그러고 거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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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방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41
주인과 나그네가 한가지로 술이 거나하니 취하였다. 주인은 미스터 방(方), 나그네는 주인의 고 향 사람 백(白)주사. 주인 미스터 방은 술이 거나하여 감을 따라, 그러지 않아도 이즈음 의기 자못 양양한 참인데 거 기다 술까지 들어간 판이고 보니, 가뜩이나 기운이 불끈불끈 솟고 하늘이 바로 돈짝만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내 참, 뭐, 흰말이 아니라 참, 거칠 것 없어, 거칠 것. 흥, 어느 눔이 아, 어느 눔이 날 뭐라구 허 며, 날 괄시헐 눔이 어딨어, 지끔 이 천지에. 흥 참, 어림없지, 어림없어.” 누가 옆에서 저를 무어라고를 하며 괄시를 한단 말인지, 공연히 연방 그 툭 나온 눈방울을 부리 부리, 왼편으로 삼십도는 넉넉 삐뚤어진 코를 벌씸벌씸 해가면서 그래 쌓는 것이었었다. “내 참, 이래봬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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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셔츠 | 방정환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39
1 박물 시간이었다. “이 없는 동물이 무엇인지 아는가?” 선생님이 두 번씩 연거푸 물어도 손 드는 학생이 없더니, 별안간 ‘옛’ 소리를 지르면서, 기운 좋게 손을 든 사람이 있었다. “음, 창남인가. 어디 말해 보아.” “이 없는 동물은 늙은 영감입니다!” “예에끼!” 하고, 선생은 소리를 질렀다. 온 방안 학생이 깔깔거리고 웃어도, 창남이는 태평으로 자리에 앉았다. 수신(도덕) 시간이었다. “성냥 한 개비의 불을 잘못하여, 한 동네 삼십여 집에 불에 타 버렸으니, 성냥 단 한 개비라도 무섭게 알고 주의해야 하느니라.” 하고 열심히 설명해 준 선생님이 채 교실 문 밖도 나가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진 빗물이 모이고 모여, 큰 홍수가 나는 것이니, 누구든 지 콧물 한 방울이라도 무섭게 알고 주의해 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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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31
1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지." K사장은 안락의자에 폭신 파묻힌 몸을 뒤로 벌떡 젖히며 하품을 하듯이 시원찮게 대답을 한다. 두팔을 쭉 내뻗고 기지개라도 한번 쓰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눈치다. 이 K사장과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공손히 마주앉아 얼굴에는 '나는 선배인 선생님을 극히 존 경하고 앙모합니다' 하는 비굴한 미소를 띠고 있는 구변 없는 구변을 다하여 직업 동냥의 구걸( 求 乞) 문구를 기다랗게 늘어놓던 P……P는 그러나 취직운동에 백전백패(百戰百敗)의 노졸(老 卒)인지 라 K씨의 힘 아니 드는 한마디의 거절에도 새삼스럽게 실망도 아니한다. 대답이 그렇게 나왔으니 인제 더 졸라도 별수가 없는 것이지만 헛일삼아 한마디 더 해보는 것이다. "글쎄올시다.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어떻게 해주십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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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 이무영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28
1 장앳말 권 서방네가 아들을 따라 서울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리 사람 들은 너나 할것없이 기차 놓친 사람들이 호기있게 달리는 차를 바라다보듯 등성이 너머 산부리의 두 집 뜸을 올려다보고 치어다보고 하는 것이었다. 아낙네들이 특히 더했다. “아니, 삼성이네가 서울로 아주 간다면서유?” 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이야기까지도 단정을 해서 말하는 법이 없는 이 지 방 사람들은 자기 눈, 귀로 보고 듣고 한 일이건만 이렇게들 떼놓고 한마디 건네본다. 혹시 상대가 아니라고 하기만 하면 자신이 없으면서도 기를 쓰고 그러니라고 우겨댈 판이지만 대개는 이렇게 수작을 붙이는 것이다. “그렇다네나. 누군 팔자가 좋아서 그런 자식이 태어났누. 그저 사람은 늦 팔자가 제일이니 풋고추 못 먹었다구 앵해할 것 없다니까 ─ 어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