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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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46
“최성구 씨에게는 약혼한 처녀가 있으며…….” “최성구 씨는 혼인 문제 때문에 약혼자의 고향인 T군으로 내려갔으니 …….” 이러한 편지를 처음으로 받았을 때는 정희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성구와 근 일 년을 교제(라 할까?)를 하는 동안에 정희는 성구에게서 그댓 이야기 는 듣지는 못한 - 뿐만 아니라 정희에게는 어떠한 여자와 혼약을 한 사내가 근 일 년이나 다른 여자(정희 자기)와 교제를 하면서 한번도 혼약한 여자를 찾아가 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믿지 못할 일이었다. 만약 그 편지에 있는 말 이 사실이라 하면, 성구는 그 근 일 년 동안에(설혹 찾아는 못 갔다 할지라 도)한마디의 한숨이라도 지었을 것이었다. 근심과 비련의 눈물이라도 지었 을 것이었다. 극도로 이기적으로 - 자기와 성구의 사이의 사랑이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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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끼의 간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45
토끼의 간(肝) 월전(月前)에는 왕(百濟王―義慈)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 하여 이 나라(新羅)의 사십여 성을 빼앗았다. 그 놀란 가슴이 내려앉기도 전에, 팔월에 들면서 백제는 또 장군 윤충(允忠)을 시켜서 신라의 대야성 (大耶城)을 쳐들어 온다는 놀라운 소식이 계림(鷄林)의 천지를 또다시 들썩 하게 하였다. 이 소식이 들어오자 꼬리를 이어서 따라 들어오는 소식은 가로되, “대야성은 함락되었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金品釋) 이하는 모두 죽었 다.”하는 놀랍고도 참담한 소식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그 상보(詳報)가 이르렀다. 그 상보에 의지하건대, 대야성이 백제 장군 윤충의 군사에게 포위되자, 대야성 성내에서는 반역자 의 분란이 일어났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막하에 점일(點日)이라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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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 근처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43
停車場近處 1 밤 열한점 막차가 달려들려면 아직도 멀었나보다. 정거장은 안팎으로 불만 환히 켜졌지 쓸쓸하다. 정거장이라야 하기는 이름뿐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밤이니까 아니보이지만 낮에 보면 논 있는 들판에서 기차길이 두 가랑이로 찢어졌다가 다시 오므려 진 그 샅을 도독이 돋우어 그 위에 생철을 인 허술한 판장집을 달랑 한 채 갸름하게 앉혀놓은 것 그것뿐이다. 그밖에 전등을 켜는 기둥이 몇 개 섰고, 절 뒷간처럼 쫓겨간 뒷간이 있고 쇠줄로 도롱태를 달아놓은 우물이 있고, 그리고 넌지시 떨어져 술집, 사탕 집, 매갈잇간, 주재소 그런 것들이 초가집, 생철집 섞어 저자를 이룬 장터 가 있고. 그러나 그러는 해도 이 정거장이 올 가을로 접어들면서 굉장하게 번화해졌 다. 금점판(砂金鑛[사금광])이 터져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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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찾기 전 | 나도향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40
어떤 장질부사 많이 돌아다니던 겨울이었다. 방앗간에 가서 쌀을 고르고 일급(日給)을 받아서 겨우 그날 그날을 지내 가는 수님(守任)이는 오늘도 전과 같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자기 집에 돌아왔다. 자기 집이란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안방은 주인인 철도 직공의 식구가 들어 있고, 건넌방에는 재깜장사(野荣行商) 식구가 들어 있고, 수님의 어머니와 수님이가 난 지 몇 일 안 되는 사내 갓난아이와 세 식구는 그 아랫방에 쟁 개비를 걸고서 밥을 해 먹으면서 살아간다. 수님이는 몇 달 전까지는 삼대 같은 머리를 층층 땋고서 후리후리한 키에 환하게 생긴 얼굴로 아침저녁 돈벌이를 하러 방앗간에를 다니는, 바닷가에 나와서 뛰어다니는 해녀(海女) 같은 처녀였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그는 소문도 없이 머리를 쪽지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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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 이익상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32
경부선 아침 열차가 부평평야의 안개를 가슴으로 헤치고 영등포역에 닿을 때다. 경숙(敬淑)이는 아직도 슬슬 구르는 차바퀴 소리를 들으면서 차창을 열고 윗몸이 차 밑으로 쏠릴 것같이 내놓고 플랫폼 위를 일일이 점검하려는 것같이 살폈다. 그러나 영등포 역까지쯤이야 맞아줌 직한 기호(基浩)의 얼 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집을 떠날 때에 전보로 통지를 하였었다. 만일 그 전보를 받아보고도 맞아주지 않았다면, 경숙이 금번 경성 오는 것이 근본적으로 틀린 생각에서 나온 일이었다. 응당 맞으러 올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것만큼 실망도 컸다. 그의 안색은 비가 쏟아질 듯한 가을 하늘 빛같이 변하고 말았다. ‘본래부터 여자에게 달게 굴 줄이란 바늘끝만치도 모르는 그 사람이지만, 오늘 내가 경성을 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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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전 | 신채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29
서론 슬프다! 우리 한국의 수백 년 이래에 외국을 대한 역사를 볼진대 동방에서 한 작은 무리의 도적만 들어와도 전국이 창황(蒼黃)히 망조(罔措)하며, 서 편에서 한마디 꾸지람만 와도 온 조정이 당황 질색하다가 그럭저럭 구차로 이 지내어 부끄러움과 욕이 날로 더하여도 조금도 괴이히 여길 줄을 알지 못하니, 우리 민족은 천생이 용렬하고 약하여 능히 변화치 못할까? 무애생이 가로되,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 일찍이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의 사적을 읽다가, 기운이 스스로 나고 담(膽)이 스스로 커짐을 깨닫지 못하 여, 이에 하늘을 우러러 한 번 불러 가로되, 그러한가 참 그러한가? 우리 민족의 성질에 이 같은 자가 있었는가? 이 같은 웅위한 인물의 위대한 공업 (功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할 데가 없으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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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과 능금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24
1 ‘나오미’가 입회한지는 두 주일밖에 안되었고, 따라서 그가 연구회에 출 석하기는 단 두 번임에 불구하고 어느덧 그의 태도가 전연 예측치 아니하였 던 방향으로 흐름을 알았을 때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감정 의 움직임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짧은 시간에 그가 나에게 대하여 그러한 정서를 품게 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뜻밖의 일이었음을 나는 놀라는 한편 현혹한 느낌을 마지않았던 것이다. 하기는 ‘나오미’가 S의 소개로 입회하게 된 첫날부터 벌써 나는 그에게 서 ‘동지’라는 느낌보다도 ‘여자’라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그것은 ‘나오미’가 현재 어떤 백화점의 여점원이요, 따라서 몸치장이 다소 사치 한 까닭이라는 것보다도 대체로 그의 육체와 용모의 인상이 너무도 연하고 사치한 까닭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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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날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15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 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 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 시는 앞집 마마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학교(東光 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십전 , 둘째 번에 오십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치 않은 일이 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십 전짜리 백동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 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