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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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흙과 흰 얼굴 | 정인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7. 17:33
1 보슬비인 줄만 알았더니 역 밖에 내려서서 보니 제법 굵은 빗방울이 장마 때 모양으로 주룩주룩 쏟아졌다. “많이 오는군요?” 안내역으로 만척(滿拓) 출장소에서 보내준 김군이 앞서 대합실 처마 밑으 로 뛰어들며 당황해 하는 목소리다. 철수도 부산하게 뒤를 따라 껑충 뛰면서, “글쎄요……….” 우장을 꺼낼 생각은 채 못 하고 손수건으로 수선스럽게 어깨를 털고 얼굴 을 닦고나서, “탈 게 있을까요?” 겨우 숨을 돌리고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김군을 쳐다보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걱정인 양이다. 그러나 채 김군이 무엇이라 대답하기 전에 웬 시커먼 만주 사람이 그들 앞 으로 달음질 쳐 오며 고함을 지른다. 손짓하는 꼴이 그들을 부르는 모양이 었다. 말은 못 알아들었으나 철수는 직감으로 그것이 마차꾼인 줄 깨달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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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망신했군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1. 00:04
때아닌 비가 와서 길바닥이 몹시 진 바로 며칠 전 석양이다. 나는 평소에 하는 대로 인쇄 잉크와 기름이 새까맣게 묻은 작업복을 입은 채 벤또 꾸러미를 옆에 끼고 교동 어귀로 들어섰다. 길바닥은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이 보면 한바탕 데굴데굴 굴러보고 싶게 동지 팥죽 이상으로 흐뭇하게 이겨놓았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비켜서 마치 걸음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처럼 뜸적뜸적 거북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동편쪽 상점 앞으로 다가서서 마른 곳을 밟아 가느라니까 바로 앞에서 17%쯤 되는 모던 걸 하나가 역시 댄서 흉내를 내는 것처럼 걸음마를 하고 온다. 단발은 않고 레이티스트 스타일의 낙타색 오버를 쿨럭쿨럭하게 입고 역시 오버빛과 같은 실크 양말과 굽 높은 구두를 신고(덧구두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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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1. 00:02
찔레순이 퍼지고 화초포기가 살아났다고 해도 원체가 고양이 상판만큼 밖에 안 되는 뜰 안이라 자복이 깔아놓은 조약돌을 가리면 푸른 것 돋아나는 흙이라고는 대체 몇 줌이나 될 것인가. 늦여름에 해바라기가 솟아나고 국화나 우거지면 돌밭까지 가리워 버려 좁은 뜰 안은 오종종하게 더욱 협착해 보인다. 우러러보이는 하늘은 지붕과 판장에 가리워 쪽보만큼 작고 언덕아래 대동강을 굽어보려면 복도에서 제기를 디디고 서야만 된다. 이 소꿉질 장난감 같은 베이비 하우스에서 집을 다스리고 아이를 돌보고 몸을 건사해야 하는 아내의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별수없이 새장 안의 신세밖에는 안되어 보이면서 반날을 그래도 밖에서 지울 수 있는 남편의 자리에서 보면 측은히도 여겨진다. 제 스스로 즐겨서 장안에 갇히워진 ‘죄수’라면 이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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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1. 00:00
언제인가 싸우고 그날 밤 조용한 좌석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을 때, 즉시 싸움을 뉘우치고 녀석을 도리어 측은히 여긴 적이 있었다. 나날의 생활의 불행은 센티멘탈리즘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사회의 공기라는 것이 깔깔하고 사박스러워서 교만한 마음에 계책만을 감추고들 있다. 직원실의 풍습으로만 하더라도 그런 상스러울 데는 없는 것이 모두가 꼬불꼬불한 옹생원이어서 두터운 껍질 속에 움츠러들어서는 부질없이 방패만은 추켜든다. 각각 한줌의 센티멘탈리즘을 잃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거칠고 야만스런 기풍은 얼마간 조화되지 않을까. ─아닌 곳에서 나는 센티멘탈리즘의 필요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처럼의 일요일도 답답한 것이 되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음 한 귀퉁이로는 지난날의 녀석과의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싸움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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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56
궐(厥)은 가정의 단란(團欒)에 흠씬 심신(心身)을 잠그게 되었다. 보기만 하여도 지긋지긋한 형식상의 안해가, 궐이 일본 xxx대학을 졸업하 자마자 불의에 죽고 말았다. 궐은 중등교육을 마친 어여쁜 처녀와 신식 결혼을 하였다. 새 안해는 비스듬히 가른 머리와 가벼이 옮기는 구두 신은 발만으로도 궐에게 만족을 주고 남았다. 게다가 그 날씬날씬한 허리와 언제든지 생글생글 웃는 듯한 눈매를 바라볼 때에 궐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었다. 살아서 산 보람이 있었다. 부모의 덕택으로 궐은 날 때부터 수만 원 재산의 소유자였다. 수 년 전 부 친이 별세하시매, 무서운 친권(親權)의 압박과 구속을 벗어난 궐은 인제 맏형으로부터 제 모가치를 타기도 되었다. 새 안해의 따뜻한 사랑을 알뜰살 뜰히 향락하기 위함에 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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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탑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54
물위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봐, 철교야.” 강폭이 넓어져 오는 수면에 간지러운 모터의 음향이 새겨지고, 뱃머리가 뾰족하 고 하얀 배가 물의 요정처럼 재빠르다.수맥을 뒤로 길게 끌면서 달리는 뱃전에 상쾌한 감각이 전해져 온다.물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강변의 백양나무 가로수 를 바라보며 모두들 상쾌한 기분이었다.보트의 세 남자, 여기에 홍일점을 가하여 4인의 즐거운 하루의 행락은 수마일 의 상류를 우회하고 돌아오는 해질 무렵이였 다. “이렇게 우리 원족은 끝났다.이건가.” “여름도 끝났다.그렇다.” 들떠 떠드는 하나이(花井[화정])와는 반대로 안영민(安英民)은 좀 말수가 적었 다. 그 성격적인 차이를 얽어서 이상한 분위기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 마키(牧[목])와 그의 여동생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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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 나도향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50
청춘(靑春) 1 안동(安東)이다. 태백(太白)의 영산(靈山)이 고개를 흔들고 꼬리를 쳐 굼 실 굼실 기어 내리다가 머리를 쳐들은 영남산(嶺南山)이 푸른 하늘 바깥에 떨어진 듯하고, 동으로는 일월산(日月山)이 이리 기고 저리 뒤쳐 무협산(巫 峽山)에 공중을 바라보는 곳에 허공중천이 끊긴 듯한데, 남에는 동대(東臺) 의 줄기 갈라산(葛蘿山)이 펴다 남은 병풍을 드리운 듯하다. 유유히 흐르는 물이 동에서 남으로 남에서 동으로 구부렸다 펼쳤다 영남과 무협을 반 가름하여 흐르니 낙동강(洛東江) 웃물이요, 주왕산(周王山) 검은 바위를 귀찮다는 듯이 뒤흔들며 갈라 앞을 스쳐 낙동강과 합수(合水)치니 남강(南江)이다. 옛말을 할 듯한 입 없는 영호루(暎湖樓)는 기름을 흘리는 듯한 정적 고요 한 공기를 꿰뚫어 구름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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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암실 | 이상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48
지도의 암실 (地圖의 暗室) 기인동안잠자고 짧은동안누웠던것이 짧은동안 잠자고 기인동안누웠던그이다 네시에누우면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그리고아홉시에서열시까지리상ㅡ나는리상한우스운사람을아안다 물론나는그에대하여한쪽보려하는 것이거니와ㅡ은그에서 그의하는일을떼어던지는것이다. 태 양이양지짝처럼 내려쪼이는밤에비를퍼붓게하여 그는레인코우트가없으면 그것은어쩌나하여 방을나선다. 이삼모각로도북정거장 좌황포차거 (離三茅閣路到北停車場 坐黃布車去) 어떤방에서그는손가락끝을걸린다 손가락끝은질풍과같이지도위를거읏는데 그는마않은은광을 보았건만의지는걷는것을엄격케한다 왜그는평화를발견하였는지 그에게묻지않고의례한K의바 이블얼굴에그의눈에서나온한조각만의보자기를조각만덮고가버렸다. 옷도그는아니고 그의하는일이라고그는옷에대한귀찮은감정의버릇을늘하루의한번씩벗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