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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1. 00:00
언제인가 싸우고 그날 밤 조용한 좌석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을 때, 즉시 싸움을 뉘우치고 녀석을 도리어 측은히 여긴 적이 있었다. 나날의 생활의 불행은 센티멘탈리즘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사회의 공기라는 것이 깔깔하고 사박스러워서 교만한 마음에 계책만을 감추고들 있다. 직원실의 풍습으로만 하더라도 그런 상스러울 데는 없는 것이 모두가 꼬불꼬불한 옹생원이어서 두터운 껍질 속에 움츠러들어서는 부질없이 방패만은 추켜든다. 각각 한줌의 센티멘탈리즘을 잃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거칠고 야만스런 기풍은 얼마간 조화되지 않을까.
─아닌 곳에서 나는 센티멘탈리즘의 필요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처럼의 일요일도 답답한 것이 되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음 한 귀퉁이로는 지난날의 녀석과의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싸움같이 결말이 늦은 것은 없다. 오래도록 흉측한 인상이 마음속에 남아서 불쾌한 생각을 가져오곤 한다.
즉 싸움의 결말은 그 당장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얼마든지 계속되는 것이다. 창밖에 만발한 화초포기를 철망 너머로 내다 보면서 음악을 들을 때와도 마찬가지로 나는 녀석을 한편 측은히 여겨도 보았다. 별안간 운해가 찾아온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제 궁리에 잠겨 있던 판에 다따가 먼 곳에서 찾아온 동무의 자태는 퍽도 신선한 인상을 주었다. 몇 해 만이건만 주름살 하나 없는 팽팽한 얼굴에 여전히 시원스런 낙천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싸움의 기억에 잠겨 있는 판에 하필 자네가 찾아올 법이 있나.” “싸움두 무던히는 좋아하는 모양이지.” “욕을 받구까지야 가만있겠나.”
“싸웠으면 싸웠지 기억은 뭔가. 자넨 아직두 그 생각하구 망설이는 타입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야. 몇 세기 전의 툇불님을 개운치두 못하게 원.”
“핀잔만 주지 말구─센티멘탈리즘의 필요라는 건 어떤가.” “센티멘탈리즘으로 타협하잔 말인가. 싸우면 싸웠지 타협은 왜. 싸움이란 결코 눈앞에서 화다닥 끝나는 게 아니구 길구 세월 없는 것인데 오랜 후의 결말을 기다리는 법이지 타협은 왜─” “자네 낙관주의의 설명인가.”
“낙관주의 아니면 지금 이 당장에 무엇이 있겠나. 방구석에 엎드려 울구불구만 있겠나.”
운해는 더운 판에 저고리를 벗고 부채를 야단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내 낙관주의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함세─봄부터 어떤 산업회사에 들어가 월급 육십 원으로 잡지 편집을 해주고 있네. 틈을 타서 영화회사 촬영대를 따라 내려온 것은 촬영 각본을 써주었던 까닭─” 간밤에 일행들과 여관에 들었다가 아침에 일찍이 찾아온 것은 묵은 회포를 이야기할 겸 내게 야외촬영의 참관을 권하자는 뜻이었다. 물론 이런 표면의 사정이 반드시 그의 낙관주의의 설명은 아닌 것이요, 그것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가 낙관적일 뿐이다. 그의 처지를 설명하는 어조에는 오히려 일종의 그 스스로를 비웃는 표정조차 있었던 것이요, 그런 그의 태도 속에 나는 달관의 노력의 자취를 역력히 보는 듯했다.
과거에 있어서도 문학의 세상과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열정의 나머지를 기울여 평론도 쓰고 문학론도 해오던 그였다. 영화에 손을 댄 것도 결국은 막힌 심정의 한 개 구멍을 거기서 찾자는 셈이라고 짐작하면 그만이다.
그가 쓴 각본「부서진 인형」속에 남녀 주인공이 강에서 배를 타다가 물속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의 촬영을 보러 가자고 운해는 식모가 날라 온 차를 마시고 나더니 나를 재촉한다. 물에 빠진 가엾은 남녀의 꼴을 보기보다도 내게는 나로서 강에 나갈 이유가 있기는 있었다.
“올부터 모래찜을 시작했네. 어떤 때엔 매생이를 세내서 고기두 더러 낚아보구. 일요일마다 강에 안 나가는 줄 아나. 오늘은 망설이던 판에 뜻 밖에 이렇게 자네에게 끌리게 됐을 뿐이지.” “됐어. 모래찜과 낚시질과.”
운해는 무릎을 칠 듯이 소리를 높였다.
“강태공의 곧은 낚시를 물에 드리우는 그 일밖엔 우리에게 오늘 무엇이 남았나. 금방 세상이 두 동강으로나 나는 듯 법석을 하구 비판을 할 것은 없어. 사람 있는 눈치만 나면 언제까지든지 웅크리고 엎드리는 두꺼비를 본 적이 있나. 필요한 건 다른 게 아니라 그 두꺼비의 재주라네.” 듣고 보니 늠성하고 일어서는 그의 자태가 그대로 두꺼비의 형용이었다.
오공이 같은 체격이며 몽종한 표정이 바로 두꺼비의 인상임을 나는 신기한 발견이나 한 것처럼 바라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같이 집을 나섰을 때 나는 더욱 그를 주의해 바라보며 짜장 두꺼비를 느끼기 시작했다.
운해가 동무들과 함께 전주를 다녀온 것이 오 년 전이었다. 그가 막 전주서 올라왔을 때의 인상─그것이 내가 이 몇 해 동안 그에게서 받은 인상 중에서 가장 선명한 한 폭이기는 하나 그러나 그때의 인상이 반드시 전주로 가기 전의 파들파들한 열정시대의 그것보다 초라한 것은 아니 었으며 오늘의 그의 인상이 또한 과히 그때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생각컨대 이 두꺼비의 인상을 그는 열정시대부터 벌써 육체와 마음속에 준비해 가지고 오늘에 미친 것인 듯도 하다. 물론 다만 소질의 문제만이 아니오, 노력의 결과 없는 오늘 그가 그의 유의 철학을 마음속에 새우게 되었으므로 인해서 짜장 두꺼비의 형용을 가지게 된 것으로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석재 소식 자주 듣나.”
거리에 나섰을 때 운해는 역시 같은 한 사람의 서울 동무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주시대부터 운해와 걸음을 같이한 나와 보다도 물론 그와 더 절친한 사이에 있는 석재였다.
“녀석두 체질로나 기질로나 나와는 달라서 꼬물거리는 성질이거든. 요새 죽을 지경이지.”
“두꺼비 되긴 어려운 모양인가.”
“직업두 웬만한 건 다 싫다구 집에서 번둥번둥 놀구만 있으려니깐 하루는 부에서 나와서 방어단원으로 편입해 버리지 않았겠나. 공교로운 일도 있지.
등화관제 연습날밤 불꺼진 거리를 더듬고 걸으려면 방어단원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치면서 포도를 걸으라고 경계가 심하지 않은가. 나두 거리 복판을 걷다가 한 사람에게 호되게 꾸중을 받고 포도 위로 올라섰을 때 가로수 곁에 웅크리고 선 것이 누구였겠나. 어렴풋한 속에서도 그렇듯이 짐작되는 국방색 단원복과 모자를 쓴 것이 석재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겠나. 자네에게 보이고 싶은 광경이었었네. 이튿날 벼락같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단원복을 맨드는데 십오 원이 먹었는데 그 십 오 원을 맨들기 위해서 다따가 하는 수 없어 츨츨한 책을 뽑아 가지구 고물서점을 찾았다나 ─”
운해는 껄껄 웃었으나 석재의 자태가 너무도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바람에 목을 눌리우는 것 같아서 나는 웃을래야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정직한 대신 사람이 외통골이래서 마음의 괴롬이 한층 더하거든.” “나두 집에 두꺼비나 길러 볼까.”
농이 아니라 사실 내게는 운해의 탄력 있고 활달한 심지와 태도가 부러운 것이었다.
배로 강을 건너 반월도에 이르렀다.
강 위에는 수없이 배가 떴고 언덕과 섬에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강 건너편에 운해의 일행인 촬영대의 일동이 오물오물 몰켜 있는 것이 보였으나 운해는 굳이 참견하러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섬의 풍속은 해방적이어서 사람들이 뒤를 이어 꼬여들건만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드물었다. 몸에 수건 하나 걸치는 법 없이 발가숭이 채로 강에 뛰어들었다가는 기슭에 나와 모래 속에 몸을 묻고들 했다. 거개가 장골들이었다.
“저것두 내 부러운 것의 한 가지.” 운해는 내 시선의 방향을 더듬으면서 이쪽저쪽에 지천으로 진열된 육체의 군상을 바라보았다.
“결국 저 사람들이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일는지두 모르네. 곰상거리는 법 없이 날마다 고깃근이나 구워먹구 모래찜을 하는 동안에 신경이 장작 같이 무지러지거든.”
그러나 굳이 모르는 그 사람들을 탄복할 것 없이 나는 운해 자신이 옷을 벗고 수영복을 갈아입었을 때 그의 장한 육체에 솔직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덜미가 떡메같이 굵고 배꼽은 한 치 가량이나 깊은 듯하다. 그 어느 한구석 비인 데가 없이 옷을 입었을 때의 인상보다도 몇 곱절 충실하다.
“훌륭한걸!”
내 눈 안에 꽉 차는 그의 육체를 나는 그 무슨 탐탁한 물건 같이도 아름답게 보았다.
“몇 관이나 되나.”
“십팔 관이 넘으리. 저울에 오를 때마다 느니까.” “훌륭해. 그 육체 외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나. 자네 낙관주의라는 것두 결국은 그 육체에서 시작된 것인가 부네.” “육체가 먼전지 정신이 먼전진 모르나 요새 부쩍 몸이 늘기 시작한단 말야. 그렇다구 저 사람들같이 고기를 흔히 먹는 것두 아니네만 월급 육 십 원으로야 고긴들 마음대로 먹겠나. 결혼두 아직 못하구 있는 처지에─” 결혼이란 말이 다따가 내게는 또 한 가지 신선한 인생을 가지고 들려 왔다.
운해는 내 표정을 살피는 눈치더니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는 듯 자리를 내려서며 걷기 시작한다.
“실상은 오늘 자네에게 들리려고 한 중요한 이야기가 그 결혼의 일건이구 오늘 이 당장에서 자네에게 그 약혼자까지 선뵈려는 것이네.” 하면서 운해는 섬 위를 이쪽저쪽 살피는 눈치나 아직 그 약혼자가 나타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금시초문의 그의 사정 이야기에 나는 정색하면서 그의 곁을 따라 걸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낼 수두 없겠구 결혼하는 편이 역시 합리적이라구 생각한 까닭인데 아무래두 집 한 채는 장만해야 할 테니 삼천 원은 들 터─ 자네두 알다시피 내게 든 돈 삼천 원이 있을 리 있나. 규수는 바로 이곳 사람으로 현재 여학교에 봉직하고 있는 중이지만 결혼하면 서울로 데려가야 할 터, 이것이 한 가지의 곤란이구 당초에 동무의 소개로 알게 된 것이나 워낙 거리가 떨어져 있는 까닭에 연애니 무어니 하는 감정적 과정이 아직 생기지두 못한 채 타성으로 질질 끌어 오늘에 이른 것인데 자네두 알다시피 내게 미묘하고 세밀한 연애의 감정이니 하는 것이 있을리가 없구 무엇보다두 그런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를 극도로 경멸하는 내가 아닌가.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약혼의 사이라는 형식으로 오기는 했으나 실상인즉 그를 아직두 완전히 모르고 또 이해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네. 연애니 뭐니 하구 경멸은 했으나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겠나. 지금와서 결혼이 촉박하게 되니 비로소 불찰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황당해 간단 말이네. 결말이 짜장 어떻게 될는지 해서 마음이 설레고 불안해 간단 말야. 오늘두 사실은 자네와 한데 어울려 스스럽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그의 마음을 가늠도 보구 불안한 공기를 부드럽혀두 볼까 한 것이네. 자네에겐 폐가 될는지두 모르나 친한 사이에 허물한 것두 없을 법 해서.” 듣고 보니 그가 나를 찾았던 이유의 속의 속뜻도 비로소 알려지고 그의 연애라는 것도 과연 그다운 성질의 유유한 것임을 느끼면서 나는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가 많았다.
“낙관주의자두 연애에 들어선 초년병이네 그려.” “너무 낙관했기 때문에 이제와 이렇게 설레게 된 것인지두 모르지.
그러구 한 가지의 불안은─”
말을 끊더니 먼 하늘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그가 너무도 미인이라는 것이네.” “흠, 행복자야!”
“오거든 보게만 평양서두 이름이 높다네. 약혼자가 미인인 까닭에 느끼는 불안─자네 읽은 소설 속에 그런 경우 더러 없었나.” “연애에 성공하기를 비네.”
모래 위를 두어 고패나 곱돌아 물가를 오르내리는 동안에 짜장 그의 약혼자가 나타났다. 멀리 보트를 저어오는 것을 운해가 눈 빠르게 발견하고 내게 뙤어 주었다. 배는 사람이 드문 물가를 찾아서 한 귀퉁이에 대었다.
운해가 좇아가 그를 부축해서 내려주고는 한참 동안이나 서서 이야기가 잦더니 이리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나는 별안간 눈이 번쩍 뜨이는 ‘이름 높은 미인’을 보고 인사하는 말조차 어색해졌다. 짙은 옥색 적삼 위에서 그의 눈과 코는 아로새긴 것같이 또렷하고 선명하다. 성스러운 섬의 풍속 속에서 그를 보기가 외람한 듯한 그런 뛰어난 용모였다.
“운해군에게서 말씀 들었습니다만 쉬이 경사를 보신다구요.” 나로서는 용기를 다해서 한 말이었으나 그에게는 그닷한 영향도 안준 듯, “글쎄요.”
하고 고개를 약간 숙였을 뿐이었다.
글쎄요─이 말의 뜻을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모양을 바라볼 때 나는 그 속에 끼인 내 존재의 무의미한 역할을 깨닫기 시작했다. 운해의 부탁으로는 나도 한몫 끼어 스스럽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고 불안한 공기를 부드럽혀 달라는 것이었으나 두 사람의 모양을 바라볼 때 그것이 도저히 내 역할이 아님과 남의 연애 속에 들어가 잔 말질을 함이 얼마나 쑥스러운 짓인가를 즉시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약혼자가 결코 범상한 여자가 아님을 안 것이요 그가 뿌리는 찬란한 색채와 자극이 너무도 큰 까닭에 그의 옆에 주책없이 머물러 있기가 말할 수 없이 겸연쩍었던 것이다.
“잠깐 물에 잠겼다 올 테니 얘기들 하구 계시죠.” 운해가 빌듯이 붙드는 것이었으나 굳이 그 자리를 사양하고 물가로 나갔다.
걸으면서도 머리 속에 새겨진 두 사람의 인상의 대조가 너무도 선명하게 마음을 괴롭혔다. 두꺼비와 공작─별수없이 이것이다. 운해가 잘 아는 어색한 공기라는 것이 결국은 이 너무도 큰 대조에서 오는 것이요, 두 사람 사이의 비극─만약 그런 것이 온다고 하면─은 참으로 약혼자의 너무도 뛰어난 용모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내가 그렇듯 탄복한 십팔 관을 넘으리라는 탐탁하고 훌륭하던 운해의 육체언만 약혼자의 맑은 자태와 비길 때 그렇게도 떨어지고 손색 있어 보임이 웬일인지를 알 수 없었다. 기울어진 대조에서 오는 불길한 암시를 떨어버리려는 듯 나는 물속에 텀벙 잠겨 깊은 곳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모래언덕에 앉은 두 사람의 자태가 차차 멀어지는 것을 곁눈질하면서 자꾸만 헤엄쳐 들어갔다.
밤거리에서 단둘이 술상을 마주대했을 때 운해는 낮에 섬에서의 내 행동을 책하며 결국 단둘이 앉았어도 별 깊은 이야기를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고는 눈치가 어떻더냐고 도리어 내게 자기들의 판단을 맡기는 것이었다.
“글쎄.”
나는 얼삥삥해서 이렇게 적당하게 대답해 두는 수밖에는 없었으나 대답하고 나서 문득 그 한마디가 바로 그의 약혼자가 섬에서 내게 대답한 같은 한마디였음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에 민첩한 낙관주의자도 연애에는 둔하고 불행한 것인가 하고 마음속으로 동무를 가엾게도 여겨보았다.
“막차로 일행들보다 먼저 떠나겠으나 자네 알다시피 이런 형편이니까 틈 있는 족족 내려는 오겠네. 즉 자네와 만날 기회두 많다는 것이네.” “부디 연애에 성공하구 속히 결혼하도록 하게.” 축배인양 나는 술잔을 높이 들어 그에게 권했다.
두어 주일 후이었다. 일요일 오후는 되어서 운해는 두 번째 나를 찾았다.
내가 그때까지 집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그의 방문을 예측하고 있었던 까닭이요, 그의 찾아온 목적까지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각본의 책임자로 촬영대 일행과 온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약혼자와의 결혼 때문에 온 것도 아니었다. 결혼─은커녕 가엾게도 그와 반대의 목적으로 온 것이다. 끝난 연애─놓쳐 버린 연애의 뒷소식을 알려온 것임을 나는 안다.
“자넨 무서운 사람이네. 자네 신경 앞에는 모든 것이 발각되구 마는 것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네. 그러면은 그렇다구 그때에 왜 그런 눈치 못 뙤어 주었나. 솔직하게 일러만 주었던들 다른 방책이 있었을 것을─” 두꺼비같이 덜석 주저앉더니 운해는 원망하듯 늘어놓는다.
“나두 민망해서 못 견디겠네만 그러나 일이 그렇게 대담하게 될 줄야 뉘 알았겠나.”
“내가 비록 호인이기로 그렇게까지 눈치를 몰랐을까. 아침에 그 집에를 갔더니 되려 반가워하면서 내게 곡절을 물으려고 드는 것을 보니 집안 사람들두 까딱 모르고 지냈나 부데.” “대담한 계획이야.”
“영원의 여성 나를 인도해 가─지는 못할지언정 나를 버리고 가다니 무서운 세상이다.”
주의해 보니 운해는 벌써 술잔이나 기울이고 온 모양이었다. 슬픈 표정이라기보다는 울적한 낯에 거나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그의 그런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게서 듣지 않아도 그의 사정을 거리의 소문으로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약혼자가 며칠 전에 달아난 것이다. 교직을 버리고 성악을 공부한다는 사람의 뒤를 따라서 동경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거리에는 크게 소문이 나고 구석구석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공작같이 찬란하던 그의 용모의 값을 한 셈이다. 소식을 들은 순간 나는 섬에서 느낀 예감이 적중한 것을 느끼고 한참 동안 가슴이 설렘을 어쩌는 수 없었다. 운해를 위해서는 그지없이 섭섭한 일이기는 하나 엄숙한 사실 앞에는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운해와의 약혼을 표면으로 내세우고 그 그늘에서 참으로 즐기는 사내와 만나고 있었던 것이 짐작되며 섬에서의 그의 표정과 말투 속에 벌써 그것이 암시되어 있지 않았던가. 운해는 그것을 모르고 일률로 결혼의 길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내 사랑 끝났도다."
소릿조로 부르는 운해의 목소리는 그러나 반드시 비장한 것은 아니었다.
오장육부를 찌르고 뼈를 긁어내고─응당 그런 심경이어야 할 것이지만 운해의 경우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어디인지 넉넉하고 심드렁한 태도조차 보였다.
“그러나 내 마음 편하도다."
사랑이 끝났음으로 참으로 그의 마음은 편한 듯도 보였다. 결국 연애도 그에게 있어서는 생활의 전부가 아닌 것일까. 그의 모든 생활의 다른 경우와 같이 간단하고 유유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일까─나는 그의 모양을 새삼스럽게 찬찬히 바라보았다.
밖에서 만찬을 같이하려고 함께 집을 나오자마자 운해는 다시 걸음을 돌리면서 나를 집으로 끌어들였다. 불란서어나 독일어책을 빌려 달라는 것이다.
“어학이나 시작하면 생활에 풀이 좀 날까 해서.” “기특하구 장한 생각이야.”
나는 초보적인 독일어책 몇 권을 뽑아 가지고 나와서 그에게 전했다.
“이히 바이스 니히트 바스 솔 에스 베도이텐 다아스 이히 소오 틀라우리히 빈!”
큰 거리에 나왔을 때 운해는 문득 언제 기억해 두었던 것인지 하이네의 시인 듯한 한 구절을 외이는 것이었으나 노래의 뜻같이 반드시 슬픈 것이 아니요 그의 어조는 차라리 한시라도 읊는 듯 낭랑한 것이었다. 흥에 겨워 몇 번이고 거듭 외었다.
“이히 바이스 니히트 바스 솔 에스 베도이텐 다아스 이히 소오 틀라우리히 빈!”
술이 고주가 된 위에 밤이 깊은 까닭에 이튿날 아침에 떠내 보낼 생각으로 나는 운해를 집으로 끌고 왔다.
나란히 자리를 펴고 누웠으나 담배를 여러 개째 갈아 물어도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고요하기에 그는 이미 잠이 들었으려니 하고 운해 편을 바라보았을 때 감긴 눈 속으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 귓방울을 적시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얼굴을 반듯이 돌리고 말았다.
“자네 감상주의를 비웃었으나 오늘밤은 내 차례네.” 눈을 감은 채 목소리가 부드럽다.
“보배를─약혼자 말이네─내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무두 모르리. 끔찍이두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결국 그를 놓치구야 말았네. 다른 그 누구와 결혼하게 되든지 간에 평생 그를 잊을 수는 없을 듯해.” “아직두 여자 생각하구 있었나. 술 취하면 눈물나는 법이니.” 농으로는 받았으나 그의 심중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지금의 이 심중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까. 꼭 한마디로 자네 좀 생각해 보게.”
나는 궁싯거리면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의 슬픈 심경의 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을 찾으려고 무한히 애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나 종시 그것이 떠오르지는 않는 것이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러나 나는 그런 헛수고를 할 필요는 도무지 없었던 것이다. 애쓰는 나를 버려 두고 운해는 혼자 어느결엔지 잠이 들어 있었으니까. 눈물은 꿈에도 흘린 법 없듯 코고는 소리가 점점 높게 방 안에 울렸다.
다음 일요일 나는 운해의 세 번째의 자태에 접하게 되었다.
일주일 전과는 퍽도 다른,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달러서 씻은 듯이 신선한 인상으로 나타났다. 쉴새없이 발전해 가는 유기체라고 할까. 나는 사실 그의 번번의 자태에 눈을 굴리는 것이나 그날의 인상이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선하고 당돌해서─참으로 나는 놀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의 대담하고 거뿐한 차림차림부터가 내 눈을 끌기에 족했다. 그런 차림으로 기차를 타고 거리를 지내온 것일까. 마치 소년 선수같이 신선한 자태가 아닌가. 넥타이 없는 샤쓰 바람에 무릎 위로 달룽 오르는 잠방이를 입고 긴 양말에 등산 구두 둥근 모자에 걸방을 진─별것 아니라 한 사람의 등산객의 차림인 것이나 그것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운해군의 차림이기 때문에 물론 나는 신기하게 본 것이다. 손에 든 것도 자세히 보니 늘 짚는 단장이 아니고 피켈인 모양이었다.
“자넨 번번이 나를 놀랠려구만 나타나나. 이담엔 대체 또 어떤 꼴로 찾아올 작정인가.”
“필요에 따라서야 무슨 옷인들 못 입겠나. 자네가 무례하다구 생각해주지 않는 것만 다행이네.”
“필요라니, 등산이 자네 목적 같은데 등산하러 평양까지 왔단 말인가.” “등산은 등산이래두 뜻이 달러. 자네 들으면 또 놀라리.” “그 륙색인지 한 것 속에는 무엇이 들었나.” 걸방을 내리더니 부스럭부스럭 봉투에 든 것을 집어냈다.
“놀라지 말게─광산으로 가는 길이네.” “광산!”
“중석 광산을 발견했어.”
“미친 소리.”
“자넨 눈앞에 보물을 두고두 방구석에서만 꼼질꼼질 대체 하는 것이 무엔가. 성천 있는 동무가 하루는 산에 나갔다가 이상한 돌을 줍어서 곧 내게로 보내지 않겠나. 나두 그런 덴 눈이 좀 밝거든. 식산국 선광연구소와 그 외 사사로운 광무소 몇 군데를 찾아서 감정을 해보니 아니나다를까, 중석이라는 거네. 함유량두 상당해서 육십 퍼센트는 된다지. 부랴부랴 광산과 조사실에서 대장을 열람했더니 아직두 출원하지 않은 장소란 말이네. 그것을 안 것이 어제 낮, 실제로 한번 돌아보고 곧 올라가 출원 할 작정으로 급작스레 밤차로 떠난 것이네. 형편에 따라서는 회사두 하루 이틀 쉬일 생각이네.”
봉투 속에서 나온 것은 몇 개의 까마잡잡한 돌멩이였다. 내 눈으로는 알 바도 없으나 납덩어리같이 윤택도 아무것도 없이 다만 은은하고 굳은 무게만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딴은 그 무슨 귀중한 뜻을 가지고 있으려니는 막연히나마 짐작되었다. 그의 흉내를 내서 나도 한 개를 집어들고는 멋도 모르면서도 이모저모 살피기 시작했다.
“흰 것은 석영이네. 중석이란 원래 석영맥에 붙어 있는 것이거든. 그 붙는 모양과 형식에도 여러 가지 구별이 있는 것이지만 어떻든 그 석영을 깨트리고래야 중석을 얻는 것이네.” 운해의 설명도 내 귀에는 경 읽는 소리였다. 중석이란 명칭부터가 먼 세상의 암호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중석이란 대체 무엇 하는 것인가.” “자네 무지에는 놀라는 수밖엔 없어. 중석두 모르구 오늘 이 세상에 살아간단 말인가─텅스텐 말이네. 철물 중에서 가장 강하고 견고한 것이기 때문에 요새 군수품으로 쓰이게 된 것인데 시세가 어느 정돈지 아나. 한 톤에 평균 칠천 원이라네. 육십 퍼센트의 함유량이래두 사천 원이 되는 것이구 단 십 퍼센트래두 칠백 원은 생기거든. 중석광이라구 이름만 붙으면 시작해두 채산이 맞는다는 것이네. 그러게 조선에만도 출원하는 수가 전에는 일년에 단 삼십 건이 못되던 것이 요새 와서는 하루에 평균 삼십 건을 넘는다네. 지금 특수광지대로 충청북도와 금강산을 세이나 평안남북도의 지경일대두 상당하고 성천 같은 곳도 장차 유망하지 않은가 생각하네.”
“자네의 풍부한 지식과 세밀한 조사에는 놀라는 수밖엔 없으나 성천이 유망하다면 자네 얼마 안 가 백만장자 되게.” 그의 설명으로 나는 적지 아니 계몽이 되어 중석에 대한 일반지식을 얻기는 했으나 어쩐 일인지 모든 것이 꿈속 일 같이만 생각되었다.
“문제는─지금 가보려는 산 일대가 정말 중석광 지댄가 아닌가, 동무가 줍은 이 돌이 왼처에서 굴러온 것이나 아닌가, 중석지대라면 얼마나 큰 범위의 것인가 하는 것인데 전문가 아닌 내 눈으로 확실히야 알겠나만 가보면 짐작은 되리라고 생각하네. 참으로 유명한 것이라면 자네 말마따나 백만장자 될 날두 멀지 않네.”
“제발 백만장자나 돼주게. 동무 가운데 한 사람쯤 백만장자가 있다구 세상이 뒤집힐 리는 없으니.”
“오늘은 바빠서 이렇게 한가하게 할 순 없어. 자네에게 한 가지 청은─ ”
운해는 주섬주섬 돌멩이를 봉투에 넣어서 륙색 속에 수습하고는 나를 재촉했다.
“오후 차까지 아직두 몇 시간이 있으니 자네 아는 광무소에 가서 자네 눈앞에서 한 번 더 감정시켜 보겠네. 앞장을 서서 광무소까지 안내를 하게.”
여가가 있었던 까닭에 쾌히 승낙하고 같이 집을 나섰다.
오전의 산들바람을 맞으면서 피켈을 단장삼아 내저으면서 걸어가는 운해의 자태는 일종의 독특한 매력을 가진 것이었다. 옷맵시가 오돌진 육체에 꼭 들어맞아서 평복을 입었을 때의 두꺼비의 인상과는 또 달라 한결 거뿐하고 출출한 것이었다. 걷어올린 소매 아래에 알맞게 탄 두 팔이 뻗치고 다리 아래가 훤히 터져서 보기에도 시원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 등산의 차림이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잘 맞고 어울리는 차림인 듯도 했다. 그 차림으로 휘파람이나 한 곡조 길게 뽑으면서 걷는다면 도회의 가로수 아래서의 오전의 풍경으로는 그에 미칠 것이 없을 듯했다.
나는 친히 아는 사람의 광무소를 찾았다. 거기서 내가 다시 놀란 것은 젊은 주인의 즉석에서의 판단에 의해서 그것이 상당히 우수한 중석광이요 함유량도 육십 퍼센트를 내리지는 않으리라는 확언을 얻은 것이다. 정확한 분석을 하려면 방아로 돌멩이를 찧고 가르고 해서 하루가 걸린다기에 그것을 후일로 부탁하고는 우선 그곳을 나왔으나 그 대략의 판단만으로도 그 자리에서는 족했고 나는 짜장 신기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차시간을 앞두고 식당에 들어갔을 때, 또 한번 그를 따져 보았다.
“자네 정말 출원할 작정인가.”
“오만분지일 지도 다섯 장과 출원료 백 원을 벼락같이 구해 놓고 내려 왔네.”
더 묻지 말라는 듯이 큰소리였다.
“……멀 그리 또 꼼질꼼질 생각하나. 군수공업으로 쓰인다니까 번민하는 모양인가. 아무걸루 쓰이든 광석은 광석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네. 그렇게 인색하고 협착한 것은 아니니 걱정할 건 없어.” “……이왕이면 석재두 한몫 넣어 주지.” “암, 출원하게 되면 녀석 한몫 안 끼이게 될 줄 아나. 그렇지 않아두 일이 없어 번둥번둥하는 판인데 일만 되면 같이 산에 들어가 어련히 일보게 안될까. 녀석뿐이겠나. 짜장 성공하게 되면 자네게두 응당 한몫 논아 주겠네. 자네 일상의 원인 극장두 지을 테구 촬영소두 꾸밀 테구 무인촌두 세울 테구 문학상 제도두 맨들 테구……” “잡기 전부터 먹을 생각만.”
“기적이라는 것이 있을려면 있게 되는 것이네. 있게 되는 법이네.” “어서 남의 계획만 장하게 하지 말구 자네 월급 육십 원 모면할 도리나 생각하게─육십 원이 화돼서 결혼두 못하게 되지 않았나.” 말하고 나서 나는 번개같이 뉘우쳤다. 무심히 던진 말이지만 결혼이라는 구절이 그의 마음의 상처를 다시 스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쓸데없는 소리에 밥맛 없어진다.” 그러나 운해로서는 사실 그것이 농이었음을 알고 나는 안심했다.
“결혼이구 보배구 벌써 그 다음날부터 잊어버리기루 했었네. 연애가 생활의 전부가 아닌 게구 결혼문제 같은 것두 일생일대의 중대사라고는 생각지 않네. 하려면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테구 되려 한번 실패가 새옹마의 득실루 더 큰 행복을 가져올는지 뉘 아나.” 반드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보배 개인에게 대한 그의 특별한 심정을 묻지만 않는다면 대체로 그는 벌써 그 자신을 회복하고 바른 키를 잡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까짓 연애가 다 무엔가. 속을 골골 앓구 눈물을 쭐쭐 흘리구.” 사실 임박한 차시간에 역에 나가 표를 사가지고 폼에 들어갔을 때까지─ 그의 자태 속에서 지난날의 괴롬의 흔적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연애란 어느 나라 잠꼬대냐는 듯이 생쾌한 그의 모양에는 다만 앞을 보는 열정과 쉴새없이 그 무엇을 꾸며 나가려는 진취적 기력만이 보일 뿐이었다. 잠시도 쉬는 법 없이 기차 시간표를 세밀히 조사하면서 쓸데없는 잡스러운 밖 세상의 물건은 하나도 그의 주의를 끌지 않는 눈치였다.
차에 올라 창 옆에 자리를 잡은 그를 향해 나는 다시 한번 축원의 말을 던졌다.
“부디 성공하게. 갈 때 또 들리게.” 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는 모자를 벗어서 창밖으로 흔들어 보였다.
두루뭉수리 같은 그의 오돌진 머리가 그 무슨 굳센 혼의 덩어리같이도 보여 올 때 짜장 그는 광산으로 성공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찬란한 환상이 문득 가슴속을 스쳤다.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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