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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탑 | 이효석
    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54

    물위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봐, 철교야.”


    강폭이 넓어져 오는 수면에 간지러운 모터의 음향이 새겨지고, 뱃머리가 뾰족하 고 하얀 배가 물의 요정처럼 재빠르다.수맥을 뒤로 길게 끌면서 달리는 뱃전에 상쾌한 감각이 전해져 온다.물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강변의 백양나무 가로수 를 바라보며 모두들 상쾌한 기분이었다.보트의 세 남자, 여기에 홍일점을 가하여


    4인의 즐거운 하루의 행락은 수마일 의 상류를 우회하고 돌아오는 해질 무렵이였


    다.


    “이렇게 우리 원족은 끝났다.이건가.” “여름도 끝났다.그렇다.”


    들떠 떠드는 하나이(花井[화정])와는 반대로 안영민(安英民)은 좀 말수가 적었 다.


    그 성격적인 차이를 얽어서 이상한 분위기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 마키(牧[목])와 그의 여동생 요코(洋子[양자])였다.요코를 보면서 마키는 한층 소리를 높여 말한다.


    “올해의 강 놀이는 이것으로 끝이다.” “유쾌한 하루였어요.하지만 사치스러웠어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구나.” “내일부터는 공부해야 해, 열심히.특히 안군에게는 중대한 일이 있으니까 말이 야.”


    요코를 사이에 두고 영민과 하나이가 양쪽 뱃전에 기대어 있었다.마키의 말로 영민이가 수면에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요코는, “그랬었군요.중요한 논문이 잘 진척되기를 빌어요.” “고마워요.이제 한 발짝만 남았으니까 어려운 일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 드리고 싶은데요.” “그럴 건 없어요.”


    “타이프라이터로 치는 것이라면, 조금은 칠 수 있어요.” “아니요, 고마워요.”


    영민의 말꼬리를 거머잡듯이 하나이는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럼, 요코씨.내일부터 안군의 타이피스트가 되지요.”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타이피스트이네요.” “뭐, 문제없지요.딱 따닥 딱 따닥 딱 딱……” “그럼 하나이씨가 되면 어때요.”


    “남자 타이피스트란 게 있나.안군.너도 요코씨가 타이피스트가 돼 주면 좋겠 지.”


    “날 놀리는 거예요.”


    요코의 팔꿈치로 찔린 하나이는 과장된 소리를 내고 새삼스럽게 깰깰거리며 포 복절도 했다.


    “전공과를 나왔으니 영어에는 자신이 있을 것이고, 게다가 종일 집에서 놀고만 있는 것은 지루할거야.요코씨의 아름다운 조력은 안군의 성공에 꽃을 더해 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떨까요.” “아아, 적당히 하라구.”


    영민이가 무뚝뚝하게 막았으므로 하나이는 좀 계면쩍은 듯이, “성낼 것 없지 않은가.”


    “성낸다, 안낸다가 아니다.”


    “기쁘면 감사하다고 해.”


    “하나이씬 농담만 하세요.”


    또 한번 요코의 팔꿈치로 찔린 하나이는…… “오호호호호.”


    라고 떠들면서 몸을 경망스레 흔들었으므로 가늘고 긴 배가 충격을 받아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위험해.”


    누군가가 소리치는 순간


    “결국 사람을 떠밀어 버렸구나.”


    라고 하나이가 소리치자마자 첨벙하고 배에서 떨어져 물속에 빠져 버렸다.누가 떠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뛰어든 것이었다.


    “어머.”


    하며 요코와 친구들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있는 동안에 하나이는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머리를 내밀고 유유히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추락당한 것은 도리어 영민 쪽이고, 하나이가 뛰어드는 반동으로 보트는 거의 전복할 정도로 심히 요동하여 영민은 얕은 뱃전에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있어야 했는데, 어느 샌가 온 몸이 가볍게 물속으로 떨어진 것이다.요코가 놀란 것은 이 미 보트의 속력으로 거리가 훨씬 멀어진 후였으므로 손을 빌려줄 여유도 없었다 는 것이었다.


    “어머.”


    하나이에게 향해 있던 놀라움이 이제는 영민이 쪽으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수영 복 위에 셔츠를 입고 있어서인지 헤엄치는 모양이 힘들어 보이며 물을 입에 머금 고 고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요코는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생겼다.


    “잠깐, 배를 멈추세요.”


    운전대로 소리를 지르니 타수는 히죽이 웃으며 모터를 끄고 핸들을 돌렸다.뚝 멎는 기관소리와 함께 뱃전을 때리는 강물을 가로질러 보트는 여유있게 큰 호를 그리며 미끄러졌다.스스럼없이 미끄러지고 정지하는 보트는 백조처럼 희고 여자 의 구두처럼 화사했다.배에서 떨어진 두 남자가 그 백조를 향하여 열심히 헤엄쳐 가는 모양은 우스꽝스럽다고나 할까.타수는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일그러 진 얼굴로 소리쳤다.


    “두 분 다 용감하군요.하 하 하……” “짜장 걸작이다.결국 오늘 하루의 유머라고나 할까.” 마키가 맞장구를 치자, 타수는 이를 더 드러내며 웃어댔다.


    “걸작이다, 걸작.”


    “확실히 부탁한다.”


    상당한 거리에 있으므로 얼굴만 수면 위에 띄워 놓고 첨벙거리는 모습이 퍽 작 은 것으로 보였다.거리가 있는 작은 두 점에서 오직 한 점인 배로 향하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의 선이 각각 한 개씩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그 선을 따라 두 사람은 힘을 다하고 있었다.


    “요코.”


    라고 졸지에 불러 놓았지만 마키의 말소리는 부드러웠다.


    “오늘의 이 걸작은 다 네가 만든 것이야.” 요코는 놀라 오빠를 응시했다.


    “그럴까요.”


    “그럴까요가 아니야.저렇게 기운이 뻗쳐 있는 두 남자의 기분을 너는 알아차리 지 못하니.”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타이프라이터에 관해 말을 꺼낸 것이 나빴다고 생각해.하나이군이 곧 공격해 오지 않았니.”


    “그 정도의 일인데.”


    “여자를 사이에 두면 그 정도의 일이 중대문제로 변하거든 .” “그렇다면 저는 단연코 타이피스트가 되겠어요.” “이번에는 네가 달려들 것이냐.어찌 되건 네 맘 대로다.” “시시해요.”


    “오늘 원족은 실패한 것으로 본다.저 둘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었어.감정을 불 안하게 한 것뿐이 아닌가.하나이군은 눈에 띄게 경솔한 척했고, 안군은 더욱 입 이 무거워졌어.너는 너대로 잘난 척하고.참으로 너희들은 내가 다루기엔 벅차.하 루 동안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 알 수도 없어.” “미안해요.”


    “미안해요 만으론 안되지.”


    “그럼 어쩌면 좋겠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야.빨리 정해야 해.네 마음이나 태도를 말이야.두 사람 사 이에서 언제까지나 서성대는 것은 죄가 돼.네게도 독이 되고 무엇보다도 저 두 녀석이 가엾지 않니.”


    “그렇지만 그런 일을 어떻게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어요.” “그런 일이란 즉석에서 정할 수가 있는 것이야.이것만큼은 분명히 처음부터 마 음속에서 결정할 일이야.네 마음속에서는 다 결정이 나 있는 것인데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야.잘 뒤돌아보고 자기 마 음을 응시하는 것이 좋겠어.”


    “흡사 명령 같군요.”


    “응, 이렇게 된 판이니까 명령할 수밖에.사랑의 제비는 손으로 뽑는 것이 아니 고 마음으로 뽑는 것이야.최초의 순간부터 마음속에 매인 줄이 있으니까 말이 다.”


    “오빠는 첫눈주의군요.대단한 연애 설법자이시네요.” “나를 야만이라고 하는 거지.사랑은 언제나 야만인거야.사랑에는 문명도 없다.


    한눈에 반하여 약탈하지. ─ 아무리 사회가 문명개화해도, 그 형식에 차이는 있 다 해도, 그 법칙은 변하지 않는 것이야.다만 현대인은 마음을 숨기는 것, 즉 위 장이 대단히 발달했지.그것뿐이라는 이야기다.마치 너희들처럼 말이야.” “그만 하세요.”


    “그래서 명령을 내리는 거야.”


    “제발.”


    “어느 쪽인지 빨리 말해라.이미 반년이 지난 교제가 아니야.내게만 이라도 좋 으니 B인지 A인지를 분명히 말해 주렴.” “그런 일은 오빠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 요코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좋아, 네가 말 안 해도 안다.사실은 네 기분을 나는 처음부터 손바닥을 보듯 이 알고 있었단다.내 마음을 흐리게 못해.어쩌면 내가 밝혀도 좋다.” “………….”


    오빠와 누이동생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물속의 두 사람 모습은 아직 느릿느릿 멀리 있었다.타수는 드디어 인내의 끈이 끊어진 듯, “어때요, 배를 접근시킬까요.”


    라고 했지만 마키는 그것을 막았다.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편이 좋아요.” “오빠, 잔인해요.”


    요코는 불만했으나 마키는 명백히 통쾌해 하고 있었다.


    “물속의 두 사람은 수재다.어느쪽이 이기는지 두고 볼 테야.안군은 곧 학부의 강사가 될 몸, 하나이도 미래의 큰 학자로 약속되어 있고, 그들 두 학자들 두 강 자들의 진검승부다.오늘 원족의 명물들이야.” “딴사람 이야기는 그만 해요.오빠는 대체 어때요.만년조수로 있을래요.정신 차 리세요.”


    “거야 안군 등과 겨룬다면 이길 수 없지.그는 학문을 위해 태어난 것같은 놈이 야.자주 볼 수 있는 수재가 아니야.머리가 수그러진다 라기 보다 무서운 녀석이 야.우리 둘 셋이서 조수생활을 함께 시작했지만 저 녀석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 단 말이야.아마도 문과 출신의 으뜸 출세자가 될 거야.” “그러니까 귀한 몸이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물속에서 한참 기운을 빼는 것이 좋을 거야.심신의 단련이 될 테니 말이다.”


    “너무해요.”


    “육지의 용자도 물속에서는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아요.저렇게 약해졌어요.” 타수의 말을 듣자 요코는 더욱 걱정이 되었다.


    “불쌍하게.”


    “그것 봐, 그 말속에 네 마음이 깨끗이 나타나 있지 않니.나를 속일 수 없다니 까.”


    “몰라요.”


    타수가 마음을 써서 브레이크를 풀고 핸들을 잡았기 때문에 모터가 돌기 시작했 고, 오빠와 동생의 말도 표정도 그 속에 흡수되고 말았다.뱃머리가 천천히 반원 을 그리며 보트는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이봐, 정신 차려, 겁쟁이들.”


    “응원하러 간다.”


    두 사람의 사이를 향해 보트가 달렸지만 괴이하게도 이것을 눈치 챈 하나이는 별나게 배를 피해서 반대 방향으로 헤엄쳐 나가는 것이었다.프레스토였던 것이 크� 로 변하고 쑥쑥 깊은 쪽으로 빠져 나갔다.


    “하나이군, 이쪽이야.”


    “기진한 주제에 도망치면 안돼요.” 이 소리에 돌아보지도 않고 멀어져 갔다.수영에 자신이 있어서일까, 유유히 여 유가 있는 태도였다.


    “삐뚤어졌구나.”


    마키는 중얼거리면서 동생을 보았다.


    “봐라, 남자들의 고집이 어떠한가를.네가 동석하지 않았을 때는 저 둘은 결코 저렇지 않았어.평화스럽고 순진했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해서는 안돼요.” “너를 중심으로 해서 두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가려고 하고 있어.알겠니, 네가 그 원심력의 중심이란걸.”


    “무어라 말씀하셔도 좋아요.”


    “여자 때문에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뭐라 해도 슬픈 일임에 틀림이 없어.” “심리학의 조수를 하고 있으면 그런 쓸데없는 일까지 걱정하게 되는지 몰라.” “멍청이, 학문 얘기는 더하지 말아.” 보트는 영민에게 접근하고 있었다.구조선이 닫자 상당히 기운을 잃은 영민은 조 급하게 뱃전을 붙잡았다.요코가 반대쪽 뱃전을 지키고 있는 사이, 마키는 손을 내밀어 쉽게 배 위로 끌어올렸다.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있어 더욱 불쌍한 모습이었다.걸레질을 한 것처럼 배 안이 젖었다.


    “어때, 힘이 빠졌지.구경거리였어.” “오늘 같은 원영(遠泳)은 처음이야.” “육지의 용자도 수중에서는 약하다고 한참 이야기하고 있었지.” “녀석, 수영을 잘한다고 딴사람을 물에 집어넣구.” “이봐, 벌써 저런 곳을 떠돌고 있어.” “야, 하나이군.”


    “점점 더 먼데로 가고 있어.”


    “잘난 척하는 놈은 추격이다.자, 뛰자.” 보트가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거리가 줄어 들어갔다.그래도 하나이는 멈추지 않고 거의 필사적으로 먼 방향으로 팔을 뻗고 있었다.


    겨우 하나이를 구해 올리고 강가로 향했을 때에는 해도 저물었다.창망하게 땅거 미가 깔리기 시작한 강 위에서 물에 젖은 두 남자는 한기를 느끼기 시작한 듯 파 랗게 위축되어 있었다.냉기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멋쩍다고 생각한 마키가 일부 러 부산하게 이야기꽃을 폈으므로 보트 속은 도리어 전보다 화기가 돌았다.


    “유쾌 유쾌, 기억에 남길만한 한 대목이다.단연코 일기에 써두어야겠다.” “심술궂은 오빠.”


    “어때, 국문학의 하나이군.시 한 수 읊는 것이.” “시 한 수라.”


    하나이는 이를 부딪치며,


    “이렇게 추워서는 시가 안 나올 것 같아, 그렇지만 한 수 읊을까.이런 건 어 때.”


    한참 하늘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 ‘우리 오늘 젖어서 돌아가는 물 위’.” 라고 읊은 다음 눈으로 물 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우리 오늘 젖어서 돌아가는 물 위’라.응, 꽤 좋아.실감이 나서 좋아.‘우 리 오늘 젖어서 돌아가는 물 위’.함께 젖어 버린 안군은 어때.영어 시는 없는 가.네 줄 정도의.”


    “추워서 파랗게 질린 터에 시 같은 것이 나올라구.나는 그따위 풍류는 모른다 구.”


    “워즈 워드의 시에 원족이라는 긴 시가 있는 것 같은데.” “원족이란 시 중에 물에 젖은 장면이 있었던 건지 어떤 건지를 말하는 것인 가.”


    “그래.억측이었다면 가만있어.그 대신 따뜻해진 다음에 한번 부탁한다.” 보트는 강변에 접어들고 있었다.너무도 조용해진 물속에서 그 배의흰색은 더욱 눈에 띈다.계류되어 있는 많은 작은 보트들 사이를 헤치며 선착장에 옆으로 정박 하였다.광활한 강 위에는 다른 보트의 그림자도 없고 바로 마키들의 보트가 여름 의 최후를 장식한 것처럼 엔진소리도 꺼진 후에는 의외로 조용하고 주위는 적막 강산이다.선착장 위에 뛰어 오르니 막 칠한 페인트가 벗은 발바닥에 싸늘하게 와 닿으며 여기서도 계절의 종언이라는 감회가 알뜰하게 깊이 느껴졌다.각자가 맡겨 두었던 것을 찾았는데 요코는 한쪽 구석의 의자 부근에서 양말을 신고 머리를 손 질했다.마키가 카메라를 조사하고 있고, 하나이도 셔츠를 바꾸어 입었지만 준비 성 없이 갈아입을 것을 안 가져온 영민은 젖은 셔츠를 쥐어 짤 수밖에 없었다.


    “내 것을 빌려 줄까”


    마키가 권하였지만, 거절하고 정성껏 젖은 옷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거리로 가자.”


    “옷이 젖어서 거리로는 못 가요”


    동생의 반박에 마키는 곧,


    “그럼 모두 우리 집에 갈까.그래 안군도 하나이군도, 좋지.” “나는 아파트로 가겠어.”


    “옷을 말리고 가요.그런 모양으로 아파트에 가는 것은 좋지 않아요.” “딴 사람 집에 가는 것은 더 이상하지요.” “제일 가깝지 않아요.그러니 들리세요.다 함께.좋지요.” “안군, 들렸다 가.나는 옷을 갈아입었더니 이렇게 보송보송해.” “자, 함께 가자.가자.”


    마키는 거의 강제로 안내 석에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택시는 곧 왔다.일하는 할 머니가 낸 차를 적당히 마시고 하나이 등을 차에 밀어 넣었다.


    “목욕물을 데우겠네.하루의 기억을 훨훨 털어 버리게.” 차 중에서 요코는 하루가 지독히 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교외의 넓은 길을 달려서 용산을 지나 구시가까지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 모든 것이 길다는 인상을 받았다.지금 바로 끝난 긴 여름의 기억이라고나 할까.


    결국 하나이는 도중에서 도망쳐서 재빨리 전차를 바꾸어 타고, 영민이 혼자 마 키와 요코에게 붙들린 것이다.비교적 한적한 언덕 중복에 있는 마키의 독립가옥 에 다다랐을 때, 영민은 일종의 멋쩍은 감을 금할 수 없었다.


    “잘 오셨어요.”


    현관에서 마키의 어머니 히사코가 방바닥에 손을 대고 영접하였다.


    영민은 서로 아는 사이지만 자기의 꼴을 돌아보면서 말없이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수년 전 아버지를 잃었지만 마키 일가는 오빠와 누이동생을 합한 3인의 물샐틈 없는 가족이 되었다. 생전에 근무하던 만철(萬鐵)에서는, 다행히 수당을 풍부하 게 지출했고 은급도 나왔으므로 일가는 새집을 가지고 크게 부자유스러움 없이 건실하게 해 나갈 수 있었지만, 아버지가 죽자 생각지도 않은 큰 타격을 받은 것 은 누구보다 요코였다. 여학교를 졸업 하고 동경의 상급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 던 것이 돌연 아버지를 잃고 보니 혼자 남게 될 어머니를 놓아 두고서 까지 초지 를 관철할 용기는 그만 사라져 버린 것이다.


    멋없는 오빠에게 맡겨 버릴 수도 없는데다, 고독을 몹시 싫어하는 어머니에 대 한 뜨거운 애정 때문에 일신상의 야심과 욕망을 희생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 기도 했다. 도쿄에 가는 대신에 2년간의 전공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앉아 어머니 를 도우면서 좋아하는 학문에 정을 붙이는 것이 어느 사이엔가 즐거운 일이 되어 버렸다. 영어에 흥미가 있어서 문학서를 읽기 시작한 것이 결국 열중하게 되고, 한가하면 음악을 공부하기도 한다. 오빠가 다행히 심리학 교실에 남게 되었으므 로 대학 도서관에서 원하는 만큼의 책을 빌릴 수 있게 되었는데 영민들과 알게 된 것은 그런 사정에서였다. 마키는 처음 영문학 연구실에 있는 그에게 영문학서 의 추천과 대차 등을 부탁했었는데, 여러 번 하게 되니 번거롭게 느끼며 결국 학 자가 될 수는 없어 보이는 여동생의 지도를 잘 부탁한다며 동생을 맡긴 것이었 다. 영민의 조예가 깊은데 경탄하면서 요코는 한 발짝 한 발짝 계발되는 것이 기 뻐 한 주가 지나면 빌린 책을 가지고 오빠의 연구실에 들린다. 거기서 영민 등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어느 사이엔가 하나이 등과 함께 요코네 집에까지 드나들게 되었다. 어머니 히사코는 언제나 기쁜 낯으로 영접해 주고 영민은 일가 의 온화한 분위기에 함빡 익숙해져 있었다. ─ “오늘은 어찌 이런 모습으로.”


    영민의 빙그레 웃음에 답하여 히사코도 품위있게 미소를 지어준다.


    “가는 계절에 대한 전별이었어요.이 여름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시원한 강의 풍경을 마음껏 음미했어요.”


    “어머니, 요코의 술책이었어요.”


    아들이 일러바치자 어머니는,


    “아이구, 요코가 어찌된 거야.”


    약간의 놀라움을 표시한다.


    “거짓말, 내 술책이라구요. 오빠 거짓말쟁이.” “얘가 또 무엇을 했을까요.”


    “하나이군도 동행했었는데 둘이서 열심히 헤엄치는 꼬락서니란 처절한 것이었 다우.”


    “얘, 요코.”


    어머니는 가볍게 꾸중을 하고서는 부엌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요코도 옷의 허리 띠에 손을 대며 뒤쫓아 나갔다.


    영민은 마키와 함께 더운 목욕을 하고 나오니 젖은 셔츠는 다리미질이 끝나 있 었다. 그럴 심산은 아니었지만 결국 저녁식사에까지 초대받게 된 것이다.


    식후에 마키의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열려있던 창가에 의자를 가져가니 언덕 아 래에 불 켜진 거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어지면서 등불의 수는 점차 줄어 들고 그 끝에는 은은한 한강줄기가 대상으로 보였고 낮은 산들이 거무스름한 윤 곽을 그 위에 드리웠다. 모든 것이 착 가라 앉고 조용해지자 한낮의 소연했던 기 억도 먼 옛날의 일 같았으며 지금은 강의 경치도 영민에게는 유구하게 먼 것 같 았다. 아침에 예상하는 하루와 저녁에 회상하는 하루와는 그 낙차와 거리가 멀 다. 지금 영민이 회상하는 하루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을 일이 많았던 이상한 하루 같은 기분이 들고, 그만큼 마음의 기복(起伏)도 컸으며, 가슴에 무언가 새 겨진 것도 사실이다.


    요코가 레코드를 걸었는지 바이올린 소리가 옆방인 요코의 방에서 들려 왔다.


    베토벤의 로맨스 50번이었다.


    애조를 띤 아다지오가 축축하게 온 집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요코가 들어와서 자기의 찻잔을 가지고 창가에 다가오니 모두는 같은 분위기와 감정 속에서 각각 묵상을 계속하고 있는 듯하였다.


    “저 곡을 들으면 슬퍼진단 말이야.” 라고 오빠가 말하니


    “그래요, 로맨스는 슬픈 곡이예요.” “어째서 로맨스는 슬퍼야만 하는 걸까.” “아, 그건 베토벤에게 물어 보면 좋겠어요” 요코는 일어서 나가 판을 뒤집으면서 같은 곡을 두 번이나 걸었다. 둘째 번의 뒤판이 끝났을 때, 현관에서 소리가 나며 하나이가 왔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찾아왔어. 이제부터 다 함께 거리를 거닐어 보지 않겠나.”


    “아니, 오늘밤은 이대로가 좋아. 천천히 음악이라도 듣는 것이 어때.” 방의 공기는 일변하고 레코드도 어느 사이엔지 생기 있는 곡으로 바뀌어 있었 다.


    방문객


    구내의 플라타너스 잎의 녹소(綠素)에도 어느 사이에 변화가 와서 여기서도 여 름은 마지막으로 고하고 있었다. 색이 달라지기 시작한 나뭇잎을 보며 연구실 창 가에서 영민은 일에 마음을 경주하고 있었다. 강에서 보낸 하루를 최후로 껍질 속의 벌레처럼 다시 방 속에 날아 돌아온 것이다. 일을 시작한다고 하면 집요하 게 책상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그의 본질이었다.


    가을까지 주임교수에게 소논문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고, 그 전형이 끝나는 대로 문학부 강사로 취임이 약속되어 있었다. 그 약속을 결정하는 것이 논문이었으나 약속은 이미 기정된 일이고 논문은 그것에 대한 한 노력을 표시하는데 불과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일에 열중하는 성격을 가진 영민은 그런 성질의 논문 이라 할지라도 쉽게 가볍게 해버릴 수는 없었다. 정성을 다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것이 즐거움이기도 했다. 「데아드라의 전설에 관하여」 라는 연구였지 만 이 아일랜드의 슬픈 전설의 전거(典據)를 파헤쳐 들어가면서 그는 얼핏 탐구 논문보다도 감동과 영탄(詠歎)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치밀한 연대적 고증 을 조사하고 있던 중, 어느 사이에 예이츠나 싱그의 작품 기타의 것에 취해버린 다. 울스타의 왕 콘티니바와 우스나의 아들 나이시 형제와의 싸움, 나이시를 사 모하여 비운에 빠지는 데아드라의 한탄에 강하게 감동하면서 슬프면서도 아름다 운 문학의 장구(章句)에 거의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가을을 묘사한 부분은 그 중의 절창(絶唱)인데, 이는 오늘 현실의 가을을 맞이하 기 시작한 실감의 탓도 있을 것이다. 마음의 오열(嗚咽)없이는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이미 학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문학의 감동 속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전 설의 전색(詮索)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데아드라의 비련에 울고 있는 것이었 다.


    지금도 마치 플라타너스의 잎을 때때로 바라보면서 나이시와 데아드라가 이야기 하는 가을의 말을 곰곰이 씹고 있노라니 마음의 현(絃)에 손이 닿으면 소리가 날 만큼 팽팽해져 있는 것이다. 문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도 못 듣고 열중하여 행을 옮겨 가며 음미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할 수 없어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온 것은 아래층의 급사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야.”


    갑자기 흥을 깨게 한 분노도 섞여서,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런 소리를 냈다.


    “누구신지 마당에 자동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자동차라, 사치하군. 누구야.”


    “성함을 묻지 못했습니다.”


    “한 번 더 물어가지고 와”


    라고 했지만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있을 수가 없고 무언가 초조한 기분도 들어 영 민은 책상에서 일어섰다.


    “남자 한 분에 여자 한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설마 요코가 그렇게 거들먹거릴 것 같지는 않다고 의아해하면서 급사의 뒤를 따 라 층계를 내려가니 현관에 한 학생이 서 있었다. 친한 사이도 아닌, 그냥 그의 이름만을 알고 있는 중국 철학을 하는 최철(崔哲)이가, “난 아니구먼요.”


    하며 마당 쪽으로 눈을 주었다.


    “만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저 사람들입니다” 라며 미소까지 짓고 있다.


    “누구야.”


    영민이가 수상쩍게 바라본 곳에는 물론 요코가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잔디 보 호책 근처에 있는 자동차 앞에 귀부인인 듯한 옷차림의 중년부인과 단번에 시중 꾼으로 판단되나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먼발치에서도 아는 사람은 아니 었다. 그 미지의 방문객들을 영민은 잠깐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쪽에서도 영민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무엇인가 소곤거리며 조용히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러실 것입니다. 저 분도 당신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니까요.” 최철은 히죽이 미소 지으며 현관의 돌층계를 내려섰다.


    “들으셨겠습니다만 유명한 민자작 댁의 사람들입니다. 자작부인과 집사인 김성 준(金成準)씨입니다. 오늘 당신을 만나고자 하기에 제가 안내를 했습니다.


    “자작부인이 내게 무슨 일이 있을까.” “자, 만나 보세요.”


    이끌듯이 걸음을 재촉하므로 영민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었고, 결국 발이 움직였다.


    “자작부인이라고 하지만 본저(本邸) 쪽이 아니고 원동저(苑洞邸)쪽 분입니 다.”


    원동에 첩댁(妾宅)을 두고 있다는 것을 영민도 알고는 있다.


    “그래 그 원동저의 부인이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나는 지난 수년간 그 댁에서 가정교사 비슷한 것을 하며 학비를 벌고 있는데 당신에 관하여는 나를 통하여 훤히 알고 있습니다.당신의 뛰어난 재능과 다망(多 望)한 장래는 부인이 가장 좋게 생각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요.”


    “오늘은 꼭 뵙고 싶다고 하며 손수 일부러 집사를 데리고 오신 진귀한 왕림(枉 臨)이십니다.”


    “무엇 때문에 만나고자 하나”


    중요한 요점을 들을 시간도 없이 이미 자작부인들이 앞으로 다가 왔으므로 영민 은 그 이상 내놓고 다시 질문할 수도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예상대로 자작부인에 걸 맞는 풍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다듬 어진 얼굴에 잘 빗은 구레나룻의 단려(端麗)함, 투명한 피부에 끌릴 정도로 긴 순백의 치맛자락하며 청초하고 기품이 높은 자태에 영민은 좀 밀리는 자태였다.


    집사는 모가 나며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없는 인상이 대조가 되어 한 단계 두드 러진 부인의 자태는 영민은 시선을 빼앗은 듯이 보였다.


    “이쪽이 안영민씨.”


    라는 최철의 주도로 한 차례 소개가 끝내자, 부인은 부드럽게 얼굴 표정을 풀었 다.


    “오늘은 무례하게 찾아뵈어 귀찮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달리 만나 뵐 수 있 는 길도 없고 해서 ─ 실례합니다.” “아니요. 도리어 이런 곳에서.”


    “보기에 좋지 않으니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려.” 최철의 안내로 아래층의 응접실로 이들 진객을 모셨다. 영민은 두 사람이 온 목 적을 모른 채 뒤를 쫓아 들어갔는데, 어두컴컴한 방에서 네 사람이 탁자를 둘러 싸기는 하였지만 곧 그 자리에서 방문의 목적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었다.


    “소문은 최 씨로부터 미리 듣고 있어요. 학문에 정진하고 계신다니 뒤에서 늘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인은 재치 있게 말이 끊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었으나 결국은 쓸데없는 말 을 반복할 뿐 중요한 방문의 의미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학공부는 꽤 어려울 것이라든가, 고향이 평양이면 어딘가 불편할 것이라든가, 여러 가지 걱정을 해주었지만 그런 친절이 이런 경우에 영민에게 말하려는 요점 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무의미한 좌담이 10분이나 계속되었을까. 급사가 아직 차도 가져오지 않았 는데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우에게 홀린 듯이 영민은 아연하여 있는데, “일부러 뵙자고 해서 미안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우리들과도 교제해 주시면 얼 마나 영광이겠습니까.오늘은 잠시 인사를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웃음을 머금은 아주 침착한 말이었다. 방에서 나가자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숙소는 어디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영민도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정동의 아파트에 있습니다.”


    “그럼 얼마 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미소를 남기며 복도를 지나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그 분주한 태도는 대체 그것 으로 정당성을 가진 것일까, 예의에 어긋난 것은 아닐까, 이렇게 영민은 어안이 벙벙하여 꼼짝 못하고 망연히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 방문객이다.”


    말도 없이 굳어져서 서 있는 동안에 부인은 살짝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집사와 함께 차 속의 사람이 되었다. 검게 빛나는 자가용차가 구내를 천천히 미끄러져 시내로 사라지는 것을 전송하고 있는 최철은 이것도 꼭 지금의 부인의 미소를 그 대로 이어받은 듯이 웃으며 영민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오늘의 당신은 부인의 눈에 든 것 같습니다 그려. 저렇게 만족하여 기 뻐하는 표정은 본 일이 없어요. 부인은 단연 당신이 마음에 든 것 같아요.” “대체 무엇인가. 이 별로 즐겁지도 않은 방문의 의미는.” 무언지 조롱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영민은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행운아예요. 최후에 선발된 한 사람이지요.” “무엇에 선발되었다는 건가. 사위로나 선발되었단 말인가.” “그래요. 사위지요.”


    최철은 핵심을 찔렀다는 듯이 얼굴을 빛냈다.


    “부인에게는 적령기의 따님이 있습니다.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워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약혼 이야기만 나오면 자작이든 누구든 다 치우고 그 자신이 열심인 것입니다. 인품이나 교양이나 모친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사람 인데요.”


    “그 따님이 나에게 무슨…….”


    “기 기다리세요…… 모친의 입장이 되고 보면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부인은 지난 일년 동안 거의 시중을 물샐틈없이 다니며 사위 찾기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요. 귀여운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식 사랑 입니다. 따님의 인품이 참으로 뛰어날 정도로 절색 미인이데요. 편력 끝에 최후 로 당신에게 승리의 살이 꽃힐 것이라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그런……”


    “분개할 일은 아닙니다. 아직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있으므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오늘 부인의 동태는 보통의 것은 아니었지요. 저렇게 기뻐하는 모 습은 아직 본 일이 없어요.”


    “마치 물건을 고르고 가져가고 하는 것 같군. 중대한 일이 그리 간단하게 일방 적 의지만으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인가. 첫째로 그렇게 제멋대로 하는 것은 무례 라는 거야. 딸이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명문 출신이라고 해도, 그런 것만으로 아무나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영민의 흥분이 의외로 심한 데 최철은 아연하였다.


    “무례인지 모르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부러 허리를 굽혀 찾아온 만큼 고맙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만한 가정이니까 딸 하나에 사위 8명이 아니라 얼마 나 많은 후보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 후보자들을 용감히 제치고 학문 의 밭으로 눈을 돌린 부인의 높은 식견은 존경할만한 것이고 우리 학자들에게는 경하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참으로 당신은 생각이 부족하구만. 그렇다면 당신이 그 사위가 되면 어떻 소.”


    “아니요. 너무 노하지 마세요.”


    “무어라고 해도 유쾌하지 않아.”


    “곧 후회하게 될걸요. 그 집 딸은 아무래도 천하일품의 신부 감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마음가짐 하나로 천하제일의 신랑이 되는 것인데.” “시끄러워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을 털어 버리듯이 영민은 훌쩍 현관으로 들어갔다. 최철도 그 이상 질기게 뒤를 쫓을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도서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영민은 성을 내며 연구실로 돌아갔다.


    “멍청한 녀석이다.”


    책상 앞에 앉아 보았지만 좀체로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왠지 흥분하여 마음이 흐트러졌다. 데아드라의 원화(原畵)도 공책장도 잡연히 펴져 있는 책이고, 전의 마음의 위치로는 쉽게 돌아가지지 않았다. 반나절을 무위로 보낸 것을 분해하면 서 좀 일찍이 학교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으나 아파트에 돌아가서 저녁식사를 마 치고 거리에라도 나가 볼까 하며 방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문지기 소녀가 뛰어 올라오는가 했더니 열려 있던 문을 막아섰다.


    “손님이예요.”


    영민은 놀랐다. 소녀의 말투가 낮에 학교에서 급사가 쓰던 말투와 똑같았기 때 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중에,


    “누구야.”


    라고 힐문하자 소녀는 겁이 나서,


    “누구신지 자동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놀랍게도 그까지가 급사와 꼭 같은 어투였다. 영민은 반동적으로 상의를 걸치고 소녀를 따라잡고 뛰어 내려갔다.


    아니나다를까, 민자작 부인이었다. 문지기 창구 앞의 소파에 앉아 있더니 영민 을 보자 조용히 일어섰다.


    “어찌된 일일까.”


    중얼거리며 접근하는 영민에게 부인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보였다.


    “낮에는 갑자기 방문하여 실례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재차 왔는데 지 장은 없으신지요.”


    “별로 지장은 없는데요.”


    영민이 대면하고 보니 부인에게 무뚝뚝하게 굴 수 없어서 응접실로 인도하려고 하자,


    “아니요, 여기서 좋습니다.”


    부인은 가볍게 막으면서 문밖으로 눈을 돌렸다.


    “차를 기다리게 했는데요”


    “그러나 이런 곳에서는 실례라고 생각하는데요.” “저 동행이 있어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것으로 작별하려는 듯이 문을 여는 것이었다.


    영민은 끌려가듯이 부인의 뒤를 따라 나갔다. 현관의 돌층계 위에 서자 낯익은 자동차가 바로 층계 아래에 서 있었다.


    “늘 어리벙벙한 방문이구나.”


    라고 생각한 것은 피상적인 관찰일지 모른다. 층계를 조용히 밟으며 부인은 유인 하듯 한 말투였다.


    “좋으시다면 잠깐 이쯤에서 이야기나 하지 않으시겠어요. 여름에는 응접실보다 차 속이 좋다고 생각해요.”


    “이런 차림으로는.”


    “괜찮아요.”


    부인의 말보다도 더 뜻밖의 것을 발견하고 영민은 층계 아래에서 우뚝서 버렸 다. 차 속에는 뒷자리에 한 여자가 깊숙이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액자 안의 그림같이 차의 검은 창틀 안에서 백장미처럼 향기로워 보였다. 눈길을 앗아 갈 정도로 환한데 영민은 질릴 뿐이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사귀어 보시지요.” “저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백장미의 향기에 끌린 것도 아니지만 운전수가 열어준 문 안으로 부인이 등을 떠밀 정도로 권유하는 데는 세운 막대처럼 버티고 있을 수 없어 결국 끌리듯이 차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부인이 따라 들어가고 문이 제깍 하며 닫기고 영 민을 납치하듯이 차는 미끄러져 나갔다.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좀 후회를 했지만 반성의 여유도 주지 않고 부인은 말을 걸어왔다.


    “딸 소희입니다. 잘 부탁해요.”


    어이딸 사이에 끼어 불편한 몸을 비트니 백장미는 생긋이 미소 지었다.


    “잘 부탁합니다.”


    “안영민입니다. 저야말로.”


    가만히 있던 때와는 판이하게 입을 여니 꽃처럼 화려하였다. 모친의 청초한 기 품을 그대로 이어받은 위에 한층 더한 화려함과 발랄함을 구비하고 있었다. 영민 은 빛을 받았을 때처럼 그 여자의 눈길과 부딪치면 몸이 눈부시게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마침 살 물건도 있고 해서 함께 아파트로 방문했던 것입니다.” 부인이 말을 걸면 영민은 그쪽을 향할 수밖에 없었고 두 사람의 향기로운 지체 사이에서 영문도 모르게 몸이 뜨거워졌다.


    “낮에 최군으로부터 대강 들었습니다만.” “그 사람이 무엇인가 말을 하였습니까.” “오늘 저를 찾아 주신 의미가 만약 최군이 말한 것과 같은 것이라면…… ” “좀더 찬찬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 말씀하시더라도 만일 그런 의미의 일이라면.”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안 되지요.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합시다.” 거의 입을 막아 버리면서 영민에게 말을 많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부인의 태 도였다. 차가 동요하므로 말끝이 잘리는 까닭도 있었지만 두사람의 말은 서로 명 백히 이해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는 불만감을 영민은 느끼며 안타까웠다.


    “내 성분으로서는 도대체 이런 방식은 ─ ” “조용한 곳에서 말씀을 듣겠습니다.” 영민의 입을 막으려는 듯이 부인은 크게 몸을 튕기면서 웃는 얼굴을 흔들었다.


    차는 정처없이 제멋대로 달렸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리라. 번화가 인 큰 길을 대충 달리고 다시 원지점에 되돌아오는 식이었다. 태평로에서 남대문 로로, 다시 종로에서 태평로로 보트처럼 거리를 떠돌면서 자가용차의 경쾌함을 뽐내는 듯도 하였다. 대화도 이렇다 할 중심에 이르지도 않고 차와 마찬가지로 안타까울 정도로 같은 곳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물건 사러 가는 길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 두서너 백화점을 돌기 시작 한 것이 영민에게는 자꾸 무의미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인측에서 보면 딸과 영민 두 사람에게 서로를 관찰할 기회를 주기 위한 마음에서임이 틀림없었다.


    소희는 알맞게 뽐내면서 느긋하게 자유로운 거동이었다. 그 여자의 부드러운 자 태가 영민에게는 일종의 압박감으로 밀려와 무언가 거북스럽고 몸이 불편한 느낌 을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무엇을 위하여 따라왔을까.”


    경솔했음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뿌리치고 돌아갈 수도 없 다.


    “어이딸 사이에 끼어 있는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딴사람들이 어떻게 볼 것 인가.”


    그날의 기이한 자신의 위치라든가 운명이라든가를 생각하면서 영민에게는 부인 들의 그러한 당돌한 전법이 아주 무서운 것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지루하지 않으세요. 우리 자신들의 일만 생각하고 있어서.” 부인은 산 물건꾸러미를 받고도 별로 미안하지도 않은 듯이 명랑한 얼굴로 영민 을 돌아보았다.


    “차라도 마시러 가실까요.”


    다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실려 거리를 우회하여 도착한 곳은 호텔이었다. 대문 으로 들어가 현관 앞에 조용히 닿으니 부인들은 아주 익숙한 태도로 차에서 내리 고 회전문을 지나 들어갔다. 어차피 기괴한 착오로 시작된 하루를 그런 곳에서 되돌릴 수도 없다고 각오하고 영민은 복도를 지나 안쪽의 일광실까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간 것이었다. 보이에게 홍차를 주문하고 부인은 겨우 편하게 되었다는 듯이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대었다.


    “종일 실례만 했습니다만 우아한 품격에 접할 수 있어서 더없이 기쁩니다. 우 리들까지도 모르는 사이에 기품이 높아져 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천정의 유리는 흐린 유백색을 띠고 화분의 파초잎은 연한 녹색으로 은은히 빛났다. 식당과 로비에선지 가볍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뿐 일광실에는 다른 손님이 없다. 때는 저물어 가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물론 이런 일은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도 잘 알 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과 같이 앞으로도 교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방의 분위기에 알맞게 부인의 구변도 썩 안정되고 가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딸에게는 하나 더 큰 염원이 있답니다.” 부인의 시선에 끌려 영민도 소희를 바라보았다.


    “유럽에 가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은 염원을 과거 수년간 가지고 있습니 다.”


    “젊은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가져보는 염원 같습니다.” 영민의 말로 소희와는 잠깐 시선이 교차하였다.


    “도쿄에서 학교를 마치고 벌써 2년이나 집에서 놀고 있습니다만, 이렇다 할 공 부도 하지 않으면 필경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가을에 는 꼭 가겠다고 혼자서 힘을 주고 있어요.” “뭐 공부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연히 외국을 보고 오기만해도 그것 으로 하나의 인생공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때 사치하고 제멋대로의 희망이라는 것이야.” “아이 어머니, 이제 와서 그런 걸 애기하시면 어떡해요. 누가 무어래도 가겠어 요.”


    귀엽게 반항하는 딸을 못 본체하고 부인은 영민에게 원조를 구하는 듯이, “미안합니다. 저런 식입니다. 놓아먹인 망아지처럼 제멋대로여서 야단입니다.


    언젠가 유럽에 간다고 해도 당분간 저 애를 잡아두는 데는 큰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령 영민씨가 그런 힘이 되어 주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니요, 제게는 도저히 그런 힘이……” “먼 곳에 저 애 혼자만을 풀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때에는 함께 갈 친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부인의 말이 끊기자 영민은 내가 도대체 두 사람과 어떤 관계인가를 생각하니 갑자기 반성이 솟구쳐 자신도 그 부드러운 가족의 일원인 것 같은, 아닌 것 같은 묘한 착각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다가오는 계절


    영민은 옆방의 영문학 주임 시마(島[도])교수가 불러 가보니 중노의 교수는 보 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면서 온후하게 입을 열었다.


    “어때, 논문은 잘되어 나가는가.”


    “조금씩 꾸려 가고 있습니다.”


    “조금씩이어서는 안돼. 한번 대지급으로 해줘.” 성급한 교수의 말투에 영민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월말까지는 제출하기 바란다. 조급하지만, 여기서 한번 분발하는 거야. 부탁 해.”


    “네……”


    급히 무슨 일인가 생각하며 서 있는 자세를 풀지 않고 있자 교수는 처음으로 자 리를 권하고 천천히 말투를 바꾸었다.


    “실은 그 일이 비교적 어려움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내달부터 속히 해주 었으면 하는 생각이야. 조만간 학부장이 정식으로 이야기하겠지만 대체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그쪽 준비도 시작해 주기 바란다.” 강사의 일건이라고 알자 영민은 갑자기 가슴속이 무엇인가로 가득 차는 것 같고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신중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일 ─ 그것을 오늘 교수의 입으로 명백히 들은 것이었다. 충격 때문에 가벼운 현기증마저 일어났다.


    “야베(矢部[시부])군은 드디어 11월쯤에는 유럽에 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준 비할 일도 있어서 이달 말로 교단을 떠나게 했다. 그 뒤를 이어받는 것이므로 11


    월부터는 강의를 시작해야 한다. 텍스트의 선정이다 무어다로 일이 많겠지만 분 주한 만큼 할 값어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고맙습니다.”


    겨우 한마디 감사의 말이 목을 통해 나왔을 따름이고 기분과는 반대로 입은 더 욱 굳어질 뿐이었다.


    “어학만의 일반 강의이므로 크게 흥은 나지 않겠지만 잠깐 동안의 참고 견딤이 중요하다. 그러다가 야베군 수준까지 반드시 이르도록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새 해에 들어가면 문학부의 강의도 한 과목쯤은 담당하게 될 것이다.” “무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 좋을지……” 코가 찡하고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겨우 눌렀다.


    “학부내의 여러 가지 미묘한 공기를 알고 있는 만큼 이번의 선생님의 노력은 뼈에 사무쳐 감사의 말도 못 찾겠습니다.” 평신저두 하여 은사의 노고에 감사해도 아직 족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음, 그 일은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붙어 있는 이상 네 재능을 잘못 평가하 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확실하게 말하는 교수의 온화한 눈에는 한 줄기 감개의 빛이 분명하게 보였다.


    “딴 의견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나도 고군분투하며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좋 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신성한 상아탑에서 실력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있어서는 안돼. 특수사정이라든가 뭐라든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모두 제2의 적인 것 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다. 그런 것에 걸려 가지고서는 참다운 학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 편견은 금물. 나는 절대로 실력제 일주의이니까.”


    회의 당시의 일이 회상되어선지 교수의 얼굴에는 흥분의 빛이 희미하게 나타나 는 것이었다.


    “개교한지 얼마 안 되어 그렇겠지만 학내에는 아직 일반적으로 학문의 기풍이 되어 있지 않아. 대부분 값싼 태만 속에서 허송세월하는 사람들 중에 너와 같이 우수한 학도를 얻은 것은 학부에서 자랑할 만한 값이 있다구. 특히 우리 영문학 부로서는 이 명예를 그르쳐서는 안 돼. 네 빛나는 미래를 오래 지켜보고 키워 나 가려고 생각한다. 애써 공부하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신임해주신데 배반하지 않고 분골쇄신 열을 다할 각오입니다.” 영민은 몸뚱이가 몽땅 뜨거운 도가니 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감사와 기쁨의 큰 감격이 무성(無性)의 피를 뜨겁게 했다. 어떤 말을 가지고 교수에게 보답할지 알 지 못하고 다만 달아오르는 눈시울을 누르며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 다.


    연구실에 돌아와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안정되지 않는다. 책의 활자는 아지랑이 처럼 눈에 아른거리고 노트의 정리를 할 수도 없었다. 담배를 피워봤지만 떨리는 가슴속에서는 숨 막힐 뿐이다.


    ─ 이런 기쁨을 가슴속에 처넣어 두어도 좋은 것일까 라고 생각하고 그럼 누구 와 나누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망설임 없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역시 마 키였다.


    “그렇다. 마키군에게 이야기하자.” 별관의 심리학 연구실을 찾으니 마침 옆의 암실에서 실험을 하는 중인 것 같았 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둠 속에 한 줄 파란 등이 켜 있고 그 맞은쪽 스크린에 흰 그림이 비쳐 있다. 환등을 만지면서 사진을 조사하고 있는 듯했다. 이쪽으로 돌리는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안군인가.”


    “흡사 지옥이구나. 지옥에 파우스트라고나 할까.” “잘 봐준다고 해서 기쁘지도 않다.” “뭔가, 또 물고기인가.”


    스크린에는 움직여야 할 물고기의 사진이 비쳐 있었다. 차례차례 움직이는 여러 가지 포즈의 그림으로 바뀌어졌다. 늘 하던 연구의 계속일 것이다.


    “물고기의 심리를 연구하고 있다.” “물고기에도 심리가 있는가.”


    “물론 있지. 심리가 없이 어떻게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움직이는 것들 은 모두 심리의 부작용이란다. 데아드라에 심리가 있듯이 물고기에도 심리가 있 다고. 그리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물고기에게도 비극이 있다구.” “심리의 부작용이라.”


    “그 작용 때문에 물고기처럼 당신도 지금 여기 온 것이야.” “나 참.”


    “무언가 기쁜 일을 말하려고 온 거지.” “어 어떻게 아는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알게 된다구. 물고기도 사람과 마찬가지이니까.” “어이, 그만해.”


    “그래, 무엇을 이야기하러 왔어.”


    어이가 없어서 서 있는데 뒤에서 살금살금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더니 따뜻한 손 으로 영민의 눈을 가리는 사람이 있었다. 부드러운 감촉과 냄새가 훅 하고 기분 좋게 다가왔다.


    “정말 위험한 지옥이구나. 무엇이 나타날지 알 길이 없어.” 영민이 중얼거리니 마키는 옆에서 응원이라도 하듯이, “맞춰봐 그것도 심리야.”


    “여하간 지옥이다. 귀신이 아니고 다른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요. 귀신은 저예요.”


    손을 풀고 쑥 앞에 나타난 것은 사랑스런 귀신 요코였다. 물론 화가 나있는 것 은 아니고 어둠 속에서 희미한 흰색으로 미소 짓고 있다.


    “아이구 실례 요코씨였습니까.”


    “뜻밖이었어요. 그러나.”


    “잘 오셨어요. 만날 수 있었군요. 빌린 도서관의 책을 반납하러 왔습니다.” “이건. 일부러.”


    “요전에 강에서는 실례.”


    “도리어 내가 신세를 졌지요.”


    “지옥에서 나가십시다. 네. 벌써 반시간이나 물고기 사진이예요. 이렇게 숨 막 힐 듯한 곳도 없을 거예요.”


    요코가 영민을 독촉하니 이번에는 마키가 덤비기 시작했다.


    “조, 좀 기다려줘, 나도 끼워 주게나.” “이봐요, 오빠가 잘난 듯이 이야기했지만 곧 비명을 올리지 않아요.” “자, 이번엔 안군의 물고기의 심리를 듣고 싶어, 함께.” “그래.”


    영민이도 겨우 말하려고 온 생각이 나서 발을 돌리고는 요코와 함께 손짐작으로 의자를 찾아 앉았다.


    “조금 전에 시마 교수의 부름을 받고 갔더니 그 일에 관해 말씀해 주신거야.” “그런가, 그래 확실히 결정된 것인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마키는 답답하여 서둘렀다.


    “응, 내달부터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셨어.” “정말 잘됐네. 축하하네.”


    “참, 축하해요.”


    마키는 환등에서 떨어졌고 요코도 벌떡 일어서 오빠와 여동생은 미친 듯이 영민 을 둘러쌌다. 자기들 일처럼 기뻐하는 것이었다.


    “너희들 덕분이다.”


    “노 농담이 아니야. 네 힘으로 획득한 거야.” “반대도 있었고 알력도 있었던 듯해. 시마 교수가 최후까지 버텨주신 것 같 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지. 교수들 가운데 버려야 할 편견이 있다는 것을 나도 짐작해. 그러나 모든 것은 옳게 되도록 이루어져야 해.” “기뻐요.”


    눈물을 머금은 요코를 보고 영민도 한번 콧등이 찡하였고, 마치 시마교수 앞에 서 느낀 것과 같은 감사의 정이 오빠와 동생의 진심어린 우정에 대해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그날 밤 영민이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요코가 혼자 나타났다.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갑자기 손님이 와서 오지 못해요. 모처럼 약속했는데 미안하다고 해요.” “재미가 없군요.”


    “그 대신 제가 2인분의 대접을 해드리겠어요.” 말을 듣고 문득 마키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므로 어쩌면 손님을 핑계로 일부러 동생을 혼자 보낸 것이 아닐까 라고도 느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요코와 단둘이 만나면 차분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분도 들었다.


    “낮에 있었던 일을 오빠가 집에 가서 큰소리로 떠들어 어머니도 함빡 기뻐하시 고 갑자기 집안이 야단이었어요.”


    “그렇게 하면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게 돼요.” “머지않아 서둘지 않고 축하하러 오신다고요.” “고마워요.”


    “기쁘다는 것은 좋은데 일을 어떡하지요. 월말까지는 2주밖에 없어요.” “노트를 적당히 마무리짓고 타자하기 시작했어요.” “자, 어디.”


    요코는 책상 앞으로 가서 잡동사니 속의 타이프라이터를 들여다보았다.


    “잘 되어가요.”


    “학교의 것과 양쪽에서 하고 있지만 손끝이 꼿꼿해서 잘 안돼요. 펜으로 써도 되는데 필요 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죠.” “만져봐도 괜찮아요.”


    벌써 요코는 능숙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노트를 들여다보고 또 보면서 다음 줄 로 넘어가곤 했다.


    책장, 옷장, 침대와 의자 등이 있을 뿐으로 소박한 방 안에서 타이프라이터는 영민에게는 유일한 사치한 소유물이었다. 그런 만큼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사랑 하고 있는 그 작은 기계가 요코의 손으로 애무당하고 있는 것은 마치 자기의 살 이 직접 매만짐을 당하고 있는 기분도 들어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친밀한 감 이었다. 그 여자의 친절에 붙들려 잠시 가만히 그 자태에 눈을 떼지 못했다.


    “손님으로 와서 일을 돕다니 이상하다.” 이렇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재미있어요.”


    “거리로 나가지요, 지금부터.”


    “오늘은 이것이 좋아요. 축하는 다음으로 하고 그냥 아파트에 있어요, 네 그런 생각으로 나도 맨손으로 왔어요.”


    “마키군도 없고 거북하니 나갑시다, 네.” “정말 좋다니까요.”


    완강히 사양하는 것을 강제로 꼬여낼 수도 없어 영민은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 고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로서도 요코와 둘이서 자기방에 있는 것이 좋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어딘지 불편한 생각이 들고 화제도 궁핍하였다.


    타이프라이터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고 커피가 끓는 소리도 향기롭게 화답했다.


    떨어져 있는 작은 창에 조용히 앉아 그 조화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영민은 문 득,


    “자작의 딸이 아파트에 나타났었겠다.” 돌연 떠오른 공상 ─ 은 아니었지만 공상처럼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다.


    “무어라, 옛날이야기.”


    “실물이 나타났었어요. 민자작 부인이 딸을 데리고 현관까지 나를 찾아 왔었지 요.”


    요코에게는 말할 요량으로 있던 찰나이었으므로 생각난 것을 좋은 기회삼아 그 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철학의 최를 앞세워 모녀 두 사람이 자동차로 학교에 왔고, 같은 날 아 파트로 찾아와서 마음에도 없는 나를 불러내어 드라이브에, 백화점 편력, 밤에는 호텔에서 결국 차를 대접받았어요. 초대면인 나를 크게 환대했었지요.” “책을 읽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거 정말이예요.” 요코는 타이프라이터 치던 손을 멈추고 부시다는 듯이 머리를 돌렸다.


    “자작의 딸 ─ 멋진데요. 거의 책밖에 씌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여기에 왔었군요.” “대단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치근치근한 후의였으므로 반나절 상종해준 것 뿐이라는 말씀.”


    “그 딸, 틀림없이 예쁘지요.”


    “백장미처럼 아주 명랑하고 ─ 그러나 그것도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씀. 나에게 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어요……. 겸하여 말해 두지만 오해를 부르려고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해해 주겠지요.” “어찌 오해 같은 걸 하겠어요.”


    “그것으로 안심.”


    영민은 격에도 맞지 않게 떠들면서 커피 주전자를 가지고 책상 옆으로 다가갔 다.


    2,3일이 지난 후 마키들의 주선으로 영민의 승진을 축하하는 조촐한 축하회가 열렸다. 아직 겨우 가까운 사람들만의 축연이었지만 야치요(八千代[팔천대]) 그 릴의 대기실에 모인 사람이 수십 명, 영민에게는 진정으로 마음이 온화해지는 집 회였다.


    마키 남매와 하나이 등을 위시하여 학교에서는 시마 교수 외에 영문학의 교수와 학생 4,5명, 여기에 조수들과 도서관의 아는 이들 2,3명이 참가한 그 작은 회합 이 어떤 성대한 집회보다 더 기뻤다.


    식당의 간막이로 막은 특별한 좌석에 순백의 식탁을 사이에 두고 양측에 줄지어 앉은 엄숙한 기분.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시마 교수의 격려의 말이 있었고, 이어 서 마키와 동창들의 지나가는 말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축사가 한바퀴 돌 때까지 영민은 긴장이 풀리지 않고 무릎이 조금 떨렸다. 답사의 차례가 오자 배 에 꽉 힘을 주고 일어서서 한마디 한 마디를 꼭꼭 씹어 뱉을 때는 온몸에 나무를 가득 채운 듯이 굳었고 감격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접시가 운반되고 격의 없는 좌담이 시작되자 겨우 응어리진 근육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때 생각지도 않은 손 님의 모습에 영민뿐 아니라 모두는 눈을 크게 떴다.


    간막이 뒤에서 조심조심 나타난 사람은 요코의 어머니 히사코였다. 늦게 온 것 을 사과하며 말석에 혼자 앉는다. 그 생각지도 않은 진객의 모습은 다시 한번 영 민을 감동시켰다.


    연회가 끝나고 일동이 대기실로 물러났을 때, 영민은 누구보다도 먼저 히사코 앞으로 다가가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니요, 선생님들과 여러분 앞에는 나와 같은 것은 도리어 실례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요코의 권유도 있었고 해서 무례하게 말석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광입니다. 오늘 제일 감사하고 싶은 당신입니다. 도리어 우리 집 에서는 아무도 안 왔는데 당신이 이렇게 와 주시니 마치 우리 가족을 대표하여 대신 와 주신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댁은 거리가 머니까 오시는 것은 무리입니다.”


    “요코씨, 마키군, 고마워요 오늘의 기쁨은 모두 당신들의 덕택입니다.” 마키가 교수들을 전송하고 나니거의 마키가(家)의 사람들과 영민만이 남았다.


    그릴을 나와서 전찻길까지 걸어갔을 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라고 히사코가 걸음을 멈추었다.


    “가장 늦으셨으니까 좀 더 함께……” 영민이 권했지만 듣지 않고,


    “늙은이는 걸리적거릴 뿐이니까 젊은 분들만 천천히들.” 벌써 영민에게 깊이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마키도 히사코의 뒤를 따라가 버리니 영민과 요코만이 남겨진 꼴이 되었다.


    “우리를 내버려 두고 갔구나, 두고 보자.” 두 사람은 레일을 가로질러 조용한 길을 골라 천천히 소공동 쪽으로 발을 옮겼 다. 색이 달라진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아름답고 노랗게 떨어져 있는 예쁜 잎은 밟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말을 맞춘 것처럼 덕수궁 안으로 발을 옮겼는데 원내의 수목의 풍경은 일단 더 신선하며 잠시 보지 않고 지난 사이에 여름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나타내고 있 었다. 잔디와 풀숲은 무언가 새로운 실내의 일상 용품처럼 눈에 새롭고 수목의 곳곳에 진홍으로 물든 잎사귀들의 경치는 무지개처럼 마음을 들뜨게 한다. 어떤 한 개의 잎에서도 가까이 다가오는 계절의 숨소리를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요코씨. 정말 여러모로 고마워요.” “아무 도움도 안 되지만 앞날의 행운을 기도할 뿐 이예요.” 연못 옆을 지나 원 뒤에 들어가 벤치에 앉았을 때였다. 따로 아무도 없을 터여 서 고요하던 곳에 맞은쪽 등나무 가지에서 뜻밖에 인적을 발견하고 요코들은 섬 뜩했다. 두 사람을 앞질러 언젠가 들어와 있던 것은 하나이었다.


    “어때, 놀랐는가.”


    어딘지 모르게 자포자기한 듯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일부러 놀라게 한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나도 산보하러 온 것뿐이야.” 열정


    타이프라이터에 달라붙은 영민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분주한 매일이었지만 때때 로 머리를 식힐 겸 어슬렁어슬렁 도서관에 가서는 영어 신간서나 잡지류를 펴보 는 것이 낙이었다. 관원의 호의로 특히 서고의 출입이 허용되어 있어서 수십만 권의 책이 빽빽이 꽂힌 어스름 속에서 종이, 활자, 곰팡이의 냄새를 맡고 있으려 면 이상하게 머리의 피곤이 사라진다. 사다리를 서고의 이곳저곳으로 옮기며 올 라갔다 내려왔다 하며 파묻혀 있는 귀한 책을 발견하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아이 들과 같은 감격을 불러일으켰다.


    서가의 맨 마지막 줄에서 런던의 서적상이 최근에 달포 늦게 보내온 문예잡지를 보고 있을 때였다. 뒤로 같은 책장을 돌아온 것은 프랑스어의 아오키(靑木[청 목])강사였다. 수업을 끝내고 가는 길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옆에 교과서를 끼 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당신의 소문은 듣고 있어요.” 처음부터 무슨 소문인가 하고 영민은 엄숙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이, “신간 서적 탐색이십니까.”


    “네, 새로운 책장에 보드레일이 도착했다는 말이데.” “프랑스어라면 이 책장의 반대쪽이지요.” “그랬던가.”


    아오키 강사는 책장 반대쪽으로 돌아가서 영민과 마주보고 섰다. 책들 사이의 빈 공간을 통하여 서로의 상반신의 일부가 보였다 안 보였다했다.


    “요코씨도 보기와는 달리 착실한 사람이야. 사람 선택을 잘못하지 않았구나 ─ 라고 나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무슨 뜻인가요.”


    “아, 다 알고 있어요………”


    책 사이로 약간 미소를 보여 주는 강사의 태도가 어쩐지 불유쾌한 것이었다. 어 딘지 모르게 생글거리는 그 인품이 영민에게는 원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 그렇지만 하나이군이 불쌍해.” 이 말을 듣고 영민은 화가 났다. 다행히도 두 사람사이를 책장이 가로 막고 있 었다.


    “요코씨의 일이라면 아직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아요.” “정해진 바나 다름없어요.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왜 내가 당신으로부터 까지 쓸데없는 말을 듣지 않으면 안될까요.” “실은 ─ 말해선 안 되지만 ─ 하나이군이 모두 나에게 말했어요. 울며불며 털 어놓은 거죠.”


    “울며불며 ─ 입니까. 울며 호소하며 동정을 구하였군요.” ‘울며불며’라는 말이 왜 그렇게 간지러울까. 불유쾌하기는커녕 영민은 차라리 웃음이 터질 정도였다. 동시에 가슴에 무엇인가 쑥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 있었 다. 하나이가 비겁하다느니 무어니─그런 비판보다도 더 절실한 무엇인가였다.


    “여하간 아무것도 아직 정해져 있지 않으니 하나이군에게 딴사람 붙들고 울며 불며 호소하지 않아도 좋다고 전해 주세요.” 이상 더 그런 곳에서 아오키 등과마주서 있을 수 없어 영민은 책을 대충 치우고 서고를 뛰어나와 버렸다.


    머리를 식히려던 것이 도리어 신경을 할퀴고 연구실에 돌아오니 자기 의자에 하 나이가 앉아 있지 않은가.


    “어떻게 된 거야.”


    “나가 있는 사이에 마음대로 들어와 실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 빨리 말해.” “그렇게 서둘지 마. 화가 나 있나. 화를 내고 싶은 것은 내 쪽이야.” “그럼 화를 내보게나. 무엇에 화가 났냐.” “요전에 덕수궁에서는 그게 무슨 태도야. 나는 당신들을 뒤따라 간 것이 아니 었어. 그렇게 싫어하는 태도는 무엇이냐.”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무차별로 싫은 소리를 했을 뿐 아니라, 거기다 덤벼들 기까지 하지 않았느냐.”


    “음, 아무래도 좋다. 빨리 진상을 듣고 싶은데 ─ 도대체 너는 요코씨를 얼마 나 사랑하고 있어.”


    “뭐라고 실례의 말을 하는가. 싸우려는 심산인가.” 영민은 얼굴을 붉혔지만 곧 자신을 억누르고 도리어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그것이 자네가 아오키에게 가서 울며 호소한 동기였던가. 그러나 요코씨 와라면 자네도 교제하고 있는 상대이고, 뭐 내 개인의 기분을 자네에게까지 고백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의무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네가 정말 요코 씨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어떤지 라는 것이다. 그것을 듣고 싶은 것이다.”


    “힘이란 무엇인가.”


    “자네와 요코씨라면 거리가 멀어. 양식도 환경도 모든 것이 달라. 다른 가운데 서 최후까지 잘 되어갈지 어떨지 그것이 마음에 걸려.” “어째서 마음에 걸릴까. 딴 사람의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때. 자네가 말하 고 싶은 상대는 오히려 요코씨인 것 같애. 곧 오게 되어 있으니까 천천히 이야기 하게.”


    “아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자네는 요즈음 간이 부어 있어. 눈앞에서 흔들 리는 지위를 이용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을 해. 덜된 놈의 유혹에서 요코씨를 절대 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어.”


    “더 덜된 놈이란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유혹이란 무엇이냐. 입이 가벼운데 도 정도가 있어.”


    몸이 뜨거워지고 팔이 쑤셔서 영민은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정신없이 의자를 밀며 붙들자 책상 모서리에서 비틀거렸다.


    “기다려 주세요.”


    순간 간막이 뒤에서 뜻밖에도 요코가 나타나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지 않았다 면 원시적인 추태를 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나이씨, 당신은 비겁해요. 간막이 뒤에서 모두 들었어요. 그런 분인줄 몰랐 어요. 어떤 이유가 있어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에까지 간섭하는 걸까요. 당신 같 은 사람에게 누가 지켜 달라고 하겠어요. 조금쯤 말씀을 삼가는 게 어떨까요.” 얼굴을 맞대고 눈썹을 곤두세우자 하나이도 과연 겁이 나서 한마디도 못하였다.


    “영민씨,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되어 버려서.” “아니 ─ 거리가 멀어요. 양식도 환경도 모든 것이 다르죠. ─ 당연한 걱정이 라고 생각해요.”


    “그런 하찮은 간섭은 한귀로 흘려 보내세요. 아, 슬퍼지네요.” 그렇다 해도 하나이가 얄밉다는 듯이 요코는 눈을 번쩍 빛내며 발을 구르는 것 이었다.


    “조금은 부끄러움을 아세요. 아오키가 뭡니까. 그런 사람과 한통속이 되어서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되든 쓸데없 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야만인이예요.” 요코는 그날 하루 동안 영민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 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대로는 큰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질 기분이 생기지 않았다.


    거리에 나가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실 때까지 쭉 함께였으나 그냥 그렇게 함께 있 기만 했지 이상하게도 말이 연속되지 않았고, 영민은 영민대로 낮에 하나이와의 일이 있은 후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무뚝뚝하고 말이 없어졌다.


    “참말로 슬퍼져요.”


    찻잔에서 오르는 김을 응시하면서 요코는 긴 속눈썹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런 일보다 앞으로 더 슬프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럴까요.”


    “주위가 그것을 강요해요. 그런 악의는 겹겹이 준비되어 있어요.” “그런건 용감히 제거합시다. 모른 척하는 얼굴로 나아갑시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떨어진 섬이 아닌 한, 그리고 우리 둘만이 아닌 이상,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어요.”


    둘은 아직 한번도 사랑이나 그 비슷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 그러나 오 늘의 두 사람은 그런 과정은 먼 옛날에 지나 버렸다는 듯이 이미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 ─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나이나 주위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슬픔 을 안겨준 동시에 사랑마저도 강요했다. 슬픔이 사랑을 빠르게 한다. ─ 이 예상 밖의 결과는 실로 하나이가 가져다 준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두 사람에게 가속 된 연인 동지로서의 차분한 회화가 있을 뿐이다.


    “진실로 요코씨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떨까를 진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했 습니다. 하나이군이 그렇게 말하자 즉석에서는 화가 났을 뿐이었으나 하루 동안 회상해 보니 이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한 개인이, 가기다가 흥분한 나머지 한 말에 왜 그렇게 마음을 쓰세요.” “말은 하나이군의 입에서 나온 것이지만 양식이나 환경이라는 문제는, 이것은 일반적인 문제로서 숙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반적인 문제라면 그것에 패배 당하기보다는 나가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 닐까요.”


    “이기는 것은 좋지만 당신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된다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안돼요. 행복 행복이오, 그런 하찮은 마술에 걸려서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하는 게 아닌가요. 둘러싼 언어의 덫에 쉽게 걸려들어서는 안돼요.” “중요한 것이란.”


    “강한 것이라 해도 좋아요.”


    “열정을 말인가요.”


    라고 영민은 반문하고 조용히 찻잔을 입에 댔다. 식어가는 커피는 썼다.


    요코는 초조하다는 표정으로 각설탕을 여러 개 찻잔에 던지고는 될대로 되라는 듯이 스푼으로 찌르면서 진열창을 보았다.


    창밖은 좁은 길이고 번거로워진 사람의 왕래가 가깝게 다가와 보였다. 남녀, 남 녀의 무수한 사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길바닥을 분주하게 지나간다. 그 조용한 얼 굴 아래 모두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 라고 별 뜻도 없는 일을 생각하면서 본 적도 없는 무수한 얼굴을 만연히 보고 있는데 요코는 마음속에서부터 슬퍼졌 다.


    “열정이라.”


    영민은 한마디만 하고 그만 말문을 닫았다.


    “그런 것이 스며 나올 시간도 없었다. 너무도 모든 것이 갑자기 내습했다. 사 랑에 관해 생각할 시간도 없이 하나이가 본성을 드러냈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열정이예요.”


    요코가 눈을 빛내며 영민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말했다. 말 중에는, “일천(日淺)하다고는 하나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요, 이 가슴속에 명백히 가지고 있어요.”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일까. 너무 단 커피를 한 모금 꼴깍 삼키고는,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생각이 깊어요. 왜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거예 요.”


    분명히 불만을 토로하는 말로 이해한 영민은 괴로웠다.


    “갑자기 큰 문제에 부딪친 때문일까요. 아이들의 놀이같이 무리를 할 수 없으 니까요 ……아, 모든 것에 화를 내보고 싶어지는군요. 세상과 인간에 대해 엉망 진창으로 화를 내보고 싶군요. 하나이군에게도, 아니 당신에게까지도……” 그러나 요코가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 영민도 역시 같은 만큼의 것을 가지고 있 었으며 그런 만큼 번뇌도 컸었다.


    그날 밤은 한잠도 못 자고 고민으로 지샜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2,3일이나 계속되자 마음을 정하고 요코의 집을 찾 아갔다. 둘만이 만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를 겨냥하였으므로 히사코가 안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뿐인 조용한 방안이었 다.


    차를 달여 부은 후에 요코는 뜨개질을 계속하였다. 마루 위를 굴러다니는 둥근 털실 공이 진한 갈색인 것을 보고 영민은 깊은 계절을 감득하면서 요코의 조용한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의식중에 방문한 뜻도 흐려지기 십상이었다.


    “복대(服帶) 인데 이 색깔 마음에 드는지요.” “고마워요, 걱정을 끼쳐 미안해요.”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손의 소일거리로 뜨기 시작해 보았 어요. 이런 것으로 아직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어요.” 생각 없이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조금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등에는 정맥까지 파 랗게 비쳐 보인다. 우연히 전설 속의 여자 베내로피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오 늘의 요코의 쓸쓸한 모습이 전에 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났다. 그만큼 그날의 역할이 고통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엉망진창으로 화를 내보고 싶다고 했지요. 요즈음 더욱 더 그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화를 내고 무엇이든 다 부숴 버리는 거예요.” “부숴 버리고 다시 한번 새로 시작한다.” “부순 만큼 무익하지 않을까요.”


    요코가 받아들이는 방식과 영민의 의미와는 맞아들지 않는 듯, 그는 어떻게 하 면 더 이해할 수 있게 의미를 전할 수 있을까 조바심이 생겼다.


    “……이것을 최후의 방문으로 하고 잠시 기분을 가라앉혀 보려고 생각해요.” “최후란 어떤 의미예요.”


    요코는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한 것이 기분과는 반대로 말소리가 높아졌다.


    “하나이들이 이제부터 어떤 수를 쓰는지 지켜보면서 조용히 방침을 세워 보고 자 해요.”


    “그 때문에 최후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이예요.” “잠시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현명이라고요. 그래요. 그쪽이 현명해요.” “화를 내고만 있어도 결정이 나지 않으니 더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현명이라, 반성이라 ─ 그것이 당신에게는 가장 중요한 말이지요. 신사의 혹 은 침착한 지식인의 언어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맹목적으로 해 나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구 말구요. 현명이 제일이예요.” “아직도 흥분하고 있어요. 좀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봅시다. ─ 어떤 경 우라도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은 있을 것이고,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현대 인의 예지(銳智)가 아닐까요.”


    “네, 자진해서 진다는 것이 현대인의 예지이지요. 사려와 예지 ─ 얼마나 훌륭 한 표어입니까.”


    “왜 알아주지 않아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알고도 남을 만큼 알고 있어요. 당신의 기분 깨끗이 알았어요.” “아아, 미치겠다. 삐뚤어지고 싶은 것은 도리어 내 쪽이예요.” “그럼 제발 삐뚤어지세요.”


    요코는 손에 있던 뜨개질감을 던지고 일어나 발작적으로 창가에 갔다가 다시 돌 아와서 책상 위에 엎드렸는데 어깨 언저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요코씨.”


    불러보았지만 영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몸부림치고 싶을 정도였다.


    “요코씨.”


    “아니요, 이젠 좋아요. 모두 다 알았어요.” 머리를 위로 돌린 요코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얼룩진 볼이 악 의 없이 아름다웠으나 말소리만은 단정하고 탄력이 있었다.


    “실례지만 서슴없이 말씀드리면 당신에게는 이밖에도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니요, 그렇구 말구요. 눈앞에 매달린 그 귀중한 포획물 때문에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죠. 그것이 사려이고 예지인 것이지요.” “오 오해가 심하군요.”


    곧 취임하게 될 그 지위에 관해 언급되자 영민은 막 상기되어 온몸이 떨리기 시 작한 것이다.


    “오해를 넘어서 모 모욕이군요. 그러면 말을 이을 수가 없어요. 나갈께요. 어 머님께 잘 말씀드려 줘요.”


    아파트에 돌아가서도 머리는 아프고 허리가 떨려 잠시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선반에서 포도주 병을 꺼내어 큰 글라스로 마셔 본다. 괴로움과 시간을 말살할 수 있는 더 독한 마약은 없는 것일까 라며 휙 다시 한번 거리로 내려가 무난한 곳에 가서 강한 술을 마구 마시고 돌아왔다. 비틀거리면서 침대에 넘어지는 순간 책상 위의 속달이 눈에 띠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끌어당기니 요코의 흐트러진 필 적이 여러 겹으로 망막에 비쳤다.


    ─ 조금 전에 드린 말 너무 실례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게는 그런 감 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정말 그것이 오해라고 한다면 얼마나 행복 스럽겠습니까. 지금 눈앞이 캄캄합니다. 내 고뇌가 이렇게 크리라고는 나도 처 음으로 알게 되고 대단히 놀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괴로울 바에는 차라리 눈앞 의 암흑 속으로 몸을 던져 버리는 쪽이 오히려 시원할 것입니다. 요코 ─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편지인가, 기쁨은커녕 도리어 고뇌를 더해 주는 어두운 글이었다. 영민은 일어나서 책상에 기대어 답장을 썼다.


    ─ 요코씨로부터 마저 오해를 받으니 내게는 이미 아무런 할말이 없습니다.


    예지라고 한 것이 나빴다면 수박 겉핥기식의 구라파적 교양의 죄로 돌려주세요.


    시간이 지나가면 서로 모든 것을 명백히 알게 것입니다. 영민─ 해질 무렵이었으므로 사무실의 급사에게 속달로 부탁하고 돌아오자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성급한 전화로 일어났던 것이다. 사무실로 달려가 수화기 를 들자 마키의 소리였다.


    “나다. 어젯밤 요코가 음독했어.”


    “뭐 뭐라고.”


    “약의 분량이 과다했던 것 같다. 지금 가까운 병원에 입원해 있어. 아직 인사 불성이야.”


    “무 무 무슨 말이야.”


    영민의 입술은 파래지고 경련이 일어난 것이었다.


    백과 흑


    영민은 그 발로 언덕 위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침의 작은 병원은 냉랭할 정도로 희었다.


    침대 위에 하얀 시트로 덮인 요코는 아직 혼수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옆의 의자에 히사코와 마키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다. 크게 놀란 두 사람에게 영민도 이미 진객이 아닌 것이다. 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영민을 맞이했다.


    “왜 성급한 일을 했을까요.”


    침대에 가까이 가도 무의식중에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요코에게 말이 통할 가망 은 없었다.


    “뭐가 뭔지, 나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어미에게도 무어라 한마디도 없었습니 다.”


    “밤중 세 시쯤이었어. 기분 나쁜 신음소리로 일어나니 옆방에서 이미 먹어 버 린 후였어. 늦게까지 놀면서도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았어. 모두 잠드는 것을 기 다리고 있었나봐.”


    마키는 선잠을 잔 빨간 눈을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베개 밑에 네가 보낸 속달과 앨범의 사진 등이 널려 있었어. 우리도 그 속달 을 보고 처음으로 사정을 알아차렸어. 본인으로부터는 일언반구도 없었어. 아직 도 이유를 모르겠다구.”


    영민에게는 질책으로밖에 들리지 않고 특히 히사코의 앞이라 몸이 졸아드는 느 낌이었다.


    “나도 의외야.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말싸움을 한 것도 아니지만 당신 집에서 돌아와 나도 마음이 뒤숭숭해서 술을 마시고 다녔어.


    돌아오니 요코씨의 속달이 와 있었어. 곧 회답의 편지를 써 보내고는 꾸벅꾸벅 고통스러운 하룻밤을 지냈어. 급사가 깨워서 자네의 전화를 받았어.” 말을 들으니 마키 쪽에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 애는 평시엔 침착하지만 때때로 흥분하는 성질이어서……요전 하나이와의 일에 관하여 들었을 때 이 일은 매우 귀찮게 되리라고 생각했었어. 그러나 그것 은 한 시련이라고 생각하여 동생을 도리어 격려해 주었지. 자네하고도 한번 상담 할 생각이었지만 자네에게 맡기고 만 것이었어. 그것이 의외로 심각한 결과가 된 것이야.”


    “하나이군이 한 말을 내가 반성하자 요코씨가 그것을 오해해 버린 것이야. 생 각하는 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어.” “순수한 애여서.”


    사랑하는 육친을 감싸는 모친의 자애가 영민의 가슴에도 크게 울려온다.


    “자기가 정당하다고 정한 것은 한번도 꺽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말을 마키가 이어,


    “하나이군의 말엔 정말 분개하게 돼. 칼싸움에서 패배했다면 당당하게 후퇴해 야 해. 살금살금 잔재주를 부리는 것은 너무나 비겁해. 그런 사내는 아니었을 터 인데 ─ 나도 모르게 되어가.”


    회진의가 간호부를 이끌고 들어왔다.


    “어때요,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히사코는 뛰어가서 시트를 벗기면서 반대로 묻고 싶은 듯이, “깨어나긴 깨어날까요, 선생님.”


    대충 병자의 안색을 보고 맥박을 세고 또 한번 해독주사를 놓는 것이었다.


    “여하간 양이 과다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이미 깨어날 쯤 인데요.” “트 틀렸을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다.”


    “생명에만 지장이 없다면 좋겠습니다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대체로 괜찮을 것입니다.” 젊은 의사는 마키 쪽을 돌아보면서,


    “언젠가도 한번 비슷한 일을 저지른 분이 있었습니다. 반일에 겨우 정가을에 이신이 들었는데 어째서 봄과 가을에 이런 일이 거장 많이 일어나는 듯합니다.” 사건의 동기에 관하여 알고 싶어 하는 말투였다. 간호부도 맞장구를 치고 가볍 게 얼굴 표정을 풀었다.


    의사는 도구를 거두고 나가는 길에 영민 쪽에도 살짝 눈길을 보냈지만 물론 마 키들에게는 그에게 알맞을 정도의 기분의 여유가 없었다. 다만 그런 의사의 여유 있는 태도가 요코의 용태에 대한 안심감을 주었고 그것이 무엇보다도 세 사람의 걱정을 가볍게 해 주었다.


    의사가 나간 다음,


    “잠깐.”


    하고 마키는 영민에게 귀엣말을 하고 둘이서 병실을 나갔다.


    구내를 빠져 나가자 긴 벚나무 가로수 길. 투명한 단풍은 아침 공기에 냉랭하게 선명하고 나무 사이 그늘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 옆의 집들도 싱싱하다.


    마키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걸음은 안정성이 있었 다.


    “운 좋게 살아날 것 같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지만 밤중의 흐트러졌던 광경은 민망하였어. 덕택으로 한잠도 못 잤지. 몸이 노곤해.” “가여워.”


    함께 걸어가지만 영민은 한 발자국 뒤떨어진 기분이고 마음의 무거운 짐을 어찌 할 수도 없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도 못하겠어.” “네가 사과한다니 도리어 내가 괴롭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로가 그래.”


    “내가 꿋꿋하지 못해서 그래. 왜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 는지 하고 생각해.”


    “신뢰하지 않은 것이 나빠. 틀림없이.” 산꼭대기에 아침 해가 비치고 거리가 급히 훤하게 빛나기 시작하여 붉은 잎이 다시 피어난 것처럼 밝다. 두 사람은 너무 눈이 부셔서 태양에 얼굴은 향하지 못 하고 빛을 등지고 걸었다. 영민들의 말다툼과는 관계 없이 가을날은 하루를 아름 답게 빛낼 것이다.


    “참, 안군. 소원이 있어.”


    마키는 얼굴을 들지 않고 발에 밟히는 낙엽만을 보고 있다.


    “ ─ 새삼스러워서 멋쩍지만.”


    “좋아, 무엇인가.”


    마키는 발에 닿은 자갈을 집어올리고는 나뭇가지 끝으로 던져 본다. 펄럭펄럭 나뭇잎이 길 앞에 춤추며 떨어진다.


    “……요코와 결혼해 주지 않겠는가.” 잎이 떨어진 후에는 다시 전과 같이 조용해지고 발소리만 울린다.


    “…………”


    침묵을 깨고 싶은 심정으로 마키는 이번에는 발끝으로 낙엽을 힘껏 찬다. 여러 가지 색의 잎이 세차게 펄럭펄럭 날아 올라갔다가 차례로 떨어진다.


    “─ 내가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그 애는 너를 매우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 구.”


    “알고 있어.”


    “이런 경우에 옆에서의 편견은 반드시 붙어 다니는 것이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일일이 상대할 가치도 없어. 본인 당사자들의 마음이 중요해. 그것을 밀어 붙일 뿐이라고 생각해.”


    “그런 것도 잘 알고 있어……요코씨는 열정이라는 것을 조급한 것으로 해석하 고 있던 것 같아. 나는 전혀 그렇게 해석할 생각은 없었어.” “확실히 이번 일은 급히 서둔 흠이 있어.” “나도 뭐 마음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결혼 건도 물론 생각하고 있어. 다만 장애물이 물러갈 때가지 잠시 자중하고 싶다고 생각 한 것뿐이었 어.”


    “결혼해 주겠는가. 그건 기쁘다.”


    “요코씨가 일어나면 더 새로운 기분으로 목적을 향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


    이번 일은 도리어 힘을 준 결과가 되었어. 이제 직진할 뿐이야.” “고맙다.”


    가로수가 끝난 곳에서 발을 돌려 길을 되돌아 올라오는 두 사람에게 이번 아침 태양은 정면으로 비쳤으나 이미 눈부심에 굴하지 않고 두 사람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내 묘한 역할을 웃지 말아줘. 너무 앞질러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유일 한 오빠로서 동생을 위하여 ─ 특히 가련한 작은 마음의 진실을 보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네.”


    숲 사이의 흰 병원이 깨끗이 올려다 보이는데 이것도 아침 햇살에 밝게 빛나고 있다.


    그로부터 수 시간이 지난 정오 조금 전에 요코는 겨우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고 방안을 둘러보다가 영민의 모습을 보자 부끄러운 듯이, 안심한 듯이 조용한 표정으로 변했다.


    “쓸데없는 짓을 해 얼마나 모두가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히사코와 함께 마키가 달려들어 동생을 들여다본다.


    “이제 안심해도 돼. 안군으로부터도 확실한 말을 들었다. 다시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야.”


    요코는 벽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말았다. 눈물이 솟아올라 귀를 적시는 것이었 으나 물론 아무에게 보이지 않는다.


    요코의 용태가 확실한 것을 확인하자 영민은 병실을 나왔다. 위문객들의 쇄도가 예상되었고 그들 각각을 일일이 만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학교를 쉬게 되니 아파트에도 조용히 있을 수가 없어 오래간만에 거리를 번둥거 리며 하루를 소비하게 했다. 곳곳에서 마키에게 전화를 걸어 요코의 용태의 변화 를 물으면서 막연하게 지내는 하루는 갑갑하지 않은 것이기는 했지만 식사를 하 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빈둥거리며 지나는 하루의 인상 은 또한 생각보다 길었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방대한 하루의 기록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것은 심리와 의식으로 긴 하루가 된 것이었지만 영민의 긴 하루도 심리 때문이라고 하면 그렇 기도 하다.


    요코의 일로 가득했다. 사전과는 또 다른 감각으로 그 여자의 모든 자태와 언동 이 떠오르며 그것이 예를 들면 음악같이 잘 조화된 한 개의 구체(具體)로서 마음 을 붙잡는다. ‘새로워진 애정’과 같은 말을 생각해 본다. 완전히 새로워진 애 정을 느끼지 않고는 이미 요코의 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신선미로 생생하게 다가와서는 새로운 애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애정과 동경과 상상과 상념으로 방 랑한 하루는 길었고, 날이 저물어 아파트에 돌아왔을 때에는 정신적 피로로 녹초 가 되었다.


    방에 올라가기 전에 잠깐 쉴 요량으로 응접실 소파에 누워 테이블 위의 배달된 지 얼마 안된 그날의 석간을 집어 지면을 넘기려는 때였다. 엉겁결에 일어나 큰 활자에 눈이 빨려들었다. 하루의 애정의 방랑에 이어지는 것은 또 하나 의외의 놀라움과 치욕과의 직면이었다. 신문 보도라는 것은 하나의 신묘한 일인 듯 요코 의 일건이 검은 활자로 크게 보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초호활자로 된 표제도 그렇지만 몹시 불가사의한 것은 요코와 자기의 사진이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도 입수한 것일까. 신이 한 일인가, 악마가 한 일인가. 처참하게 생각되는 것이 었다.


    ─ 쓸쓸한 가을 사랑에 이상 있음. 젊은 학도에게 배신당하고 열정의 처녀 자해 기도 ─


    여러 줄로 나누어 쓴 표제에 이어 영민을 명(明)씨, 요코(洋子[양자]) 를 요코 用子[용자]라는 가명으로 어제 이래의 일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일언일구 눈 을 찌르는 듯한 자극적인 글쓰기 태도였다.


    ─ 덧붙여서 영민은 근간 학부의 강사로 취임할 예정인 신분으로 그 준비를 위 해 몹시 바쁘며 지위와 사랑 사이에 끼어 고뇌하고 있었는데 요코는 배신당했다 고만 생각하고 이런 일을 저지른 것 같으며 운운 ─ 자기 일 같기도 하고 남의 일 같기도 한 묘한 착각이 일어나 활자가 어른어른 눈앞에서 흔들렸다.


    사실만이 아니고 제멋대로의 추측과 왜곡이 있었다. 적지 않은 조작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한 악의일까.”


    세상 사람들 눈앞에서 돌연 억지로 발가벗겨진 것 같은 부끄러움이 전신을 습격 하여 눈앞이 캄캄하게 흐려졌다.


    집안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그리고 이미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작은 사사 로운 일이 한번 그런 식으로 폭로당하고 보니 의외로 큰 문제인 것처럼 과장되어 버려 하는 수 없이 그 와중에 떨어지게 된 것에 새삼스럽게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 방으로 향하여 움직이는 발걸음도 비틀거리고 영민은 당장에 쓰러질 듯이 층계에서도 비틀거렸다.


    거의 같은 때에 병실에서 석간의 같은 기사를 다 읽은 마키는 격노하여 점점 입 술이 파랗게 되었다.


    “좀 나가 주지 않겠는가.”


    마침 문안하러 와 있던 하나이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갔다.


    거리에서 불어 올라오는 미풍이 포플러의 가지 끝을 흔들고 있다. 마키는 쑤욱 어깨를 펴 보였다.


    “솔직히 말해 주지 않겠는가.”


    하나이는 저도 모르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뭐, 내 내가 고자질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고 뭔가.”


    “아는 기자가 있지만 내가 자진해서 말한 것은 아니야. 질문에 대답했을 뿐이 지.”


    “처음부터 기자가 냄새를 맡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몰라, 기자에게 알린 기억은 없어. 아오키 강사와 소문 이야기를 했을 뿐이 다.”


    “고자질 안했다면서 사진까지 깨끗이 제공했다는 말인가.” “제 제공한 건 아니야. 제멋대로 앨범에서 떼어 가져간 거야.” “허둥대지 않아도 돼.”


    포플러 밑에 이르렀을 때, 마키는 홀연히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급히 돌아보았 다.


    “언제까지나 벙어리처럼 있을 수는 없어. 오늘은 이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가 없단 말이야.”


    하나이는 세차게 뺨을 맞고 쩔쩔매면서 뒷걸음질쳤다.


    “무 무엇을 해. 네게서 난폭하게 당하는 것은 뜻밖이야.” “나도 뜻밖이어서 이렇게 하는 거다. 힘은 이런데 쓰라고 있는 것이다.” 가볍게 휘둘러 치는 바람에 하나이는 포플러 줄기에 심하게 몸뚱이를 부딪쳤다.


    나무 끝이 흔들리고 잎이 펄럭펄럭 떨어졌다.


    “너는 잘못하고 있어.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는 내 진정을 받 아주지 않으면 안돼. 너도 요코씨도 주객을 전도하고 있어. 내가 적은 아닐 것이 야. 분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 어처구니 없는 비약은 꼴 사나워. 아니 용서할 수 없어.”


    “그런 생각부터가 틀렸어. 내가 무엇을 선택하건 이미 네가 입을 놀릴 일은 아 니야. 그런 편협한 고집은 개에게나 줘. 너야말로 볼꼴사나운 웃음꺼리야.” 신음하는 하나이를 본체만체하며 불이 켜진 거리를 지나 불 없는 미풍을 맞으면 서 마키는 호연히 읊조렸다.


    그날 밤 영민은 왜성대 사택의 시마 교수 방에 가 있었다.


    가족을 도쿄에 두고 경쾌한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는 교수는 여러 명이 공동으 로 사용하는 넒은 저택 이층의 한 방을 거실로 쓰고 있었다.


    벽 삼면에 높이 쌓여 있는 책의 골짜기에 거의 파묻히듯이 의자에 기댄 교수는 아무리 하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은사의 우려 앞에서 영민도 굳어진 채 전부터 말이 없다.


    “무어라고 해도 서툴렀어. 이미 늦었어.” 교수의 한탄에 영민은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


    “신문에 나지만 않았으면 문제는 없었다. 이렇게 크게 기사화되면 빠져나갈 도 리가 없어. 사회는 이런 일에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


    “……아쉬운 일이다. 교수회의에서 문제가 될 것이지만 이렇게 명백한 증거를 내놓으면 누구에게든 변호의 여지가 없어, 이전 회의에서도 다른 의미로 큰 난색 이 있었다. 이번 일로 안성맞춤의 약점을 제공하게 된 것이야. 모두는 단합하여 나를 반격할 것이야.”


    “완전히 일생일대의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드릴 말씀조차 없습니다.” “그렇게 되었지만 그 사건에 대하여 이전에 내게 한마디 이야기했어야 했다.


    무언가 다른 방책을 쓸 수도 있었을 터인데.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 “선생님.”


    교수의 실망하는 어투를 견디다 못해 영민은 교수의 말을 가로막았다.


    “……고향에 가서 잠시 정양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좋겠지. 당분간 사람이 눈에 띠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그러는 중에 모두에게 명확한 사정이 알려지게 될게다.” “알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허사로 돌아가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을 키워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자포자기할 일도 아니야. 인생은 길어. 나도 더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 겠다.”


    좁은 길


    원동의 민자작 댁에서는 식사가 끝나자 자작부인은 언덕 위의 신관에 올라가는 것이 일상의 일로 되어 있다.


    구관만으로도 넓은 집터 안에 여러 채의 고풍 건물이 있어 넉넉한 구도이지만 부인의 취향으로 작년 가을 뒤의 언덕 위에 작고 산뜻한 양관을 신축하였다. 자 작은 부인과 딸 소희를 합쳐 고작 3인 가족인데, 어느 사이에 가까운 친척과 먼 친척들이 모여서 번거로운 큰 세대를 이루게 되었다. 신관은 그 번잡에서 벗어나 기 위한 부인의 착상에서 나온 것이다. 종들은 물론 모든 가족이 구관에서 지내 고 한달에 두서너 번 본저에서 자작이 와도 구관에서 지낸다. 양관은 다만 부인 과 소희의 거실로 쓰이는 감이 있었다. 집사인 김성준과 가정교사인 최철 등의 출입이 허락되고 때로 여자 방문객을 응대하는 일 외에는 대개 모녀 둘이 양관을 근거로 하여 긴 세월을 쓸쓸하게 보낸다. 젊은 모녀라는 것은 사이좋은 자매와 같이 보인다.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고 딸각딸각 소리를 내면서 암사슴처럼 사이가 좋았다.


    잔디로 덮인 언덕의 여기저기에는 풀숲이 무성하고 단풍나무와 백양의 껍질은 희다. 양관으로 가는 오솔길에는 흰 모래를 깔았고 그 양쪽에는 들국화가 피어 산장의 마당을 떠올리게 한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막 마친 자작부인은 지금 이 작 은 오솔길을 올라가면서 소희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피아노를 전에 없이 잘 친다 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많은 가지에 진홍색의 수많은 꽃을 뽐내던 들장미도 어느 사이엔가 거무스레한 잎만의 풍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가는 가시가 있는 가지를 꺾어서 손끝으로 가지고 노닐면서 부인은 총총히 현관에 들어섰다. 큰 거실을 잠 깐 엿보고 딸의 거실을 노크하니 피아노 소리가 멎고 소희가 뛰어나와 어머니를 맞이하였다.


    “많이 숙달해졌구나. 지금 친 연습곡 멋이 있구나.” “내가 친줄 알았어요,”


    “그래요, 바흐만이 친 거예요. 제 쇼팽이 아니예요,” “뭐야.”


    “미안해요. 바흐만과 경주하고 있던 거예요. 이번에는 어머니가 심사원이 되어 주세요 네.”


    소희는 자신 있는 듯이 피아노 앞에 앉아서 같은 쇼팽의 에튀드를 치기 시작했 다. 화사한 손끝이 폭풍처럼 뛰고 흑백의 건반은 생물처럼 혼을 불러낸다. 사람 의 숨이 가해지면 이상하게도 소리치고 혼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었다. 익숙해져 있어야 할 부인도 취한 듯이 딸과 명장의 연기를 구별할 수 없었다.


    곡이 끝난 다음 한 사람의 청중의 박수가 격에 맞지 않게 크게 울렸다. 얼굴을 돌린 딸의 웃음에 답한 것이다.


    “바흐만보다 더 잘 치는데.”


    “싫어요. 위태로운 심사원이세요. 못써요 ─ 쇼팽이란 암만해도 후배를 골려주 기 위해서 존재했던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그 정도라면 어떤 사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겠는데.” “안돼 안돼, 아직 멀었어요.”


    다시 피아노로 향하자 파데레프스키의 미뉴에트를 치기 시작한다. 경쾌하기는 하지만 애수를 띤 삼박자가 아직 등불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이 울렸다. 이런 정도의 기량이면 잘하는 편이 아닌가 하 고 부인은 마음속으로 감동하며 사랑하는 딸의 뒷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소희가 영어회화 연습으로 다니고 있는 미국 영사관의 스미스 부인 집에서는 주 말에 파티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소희는 초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여흥으 로 피아노 독주를 한 곡 하게 되어 있다. 늘 좋아하는 곡 중에서 마음대로 택한 곡이 에튀드와 미뉴에트이었으나 자신 있는 곡이라도 외국인 딸들 사이에 섞여 사람들 앞에서 연주한다고 생각하니 예상만 해도 겁이 난다. 명장과 경연하면서 매일 같은 곡을 반복하는데도 어머니가 심사원이어서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되며 칭찬만 하는 것 밖에 모르는 육친 앞에서는 날이 저물 때까지 연습해도 보람이 없고 초조하다. 사정없이 질책해 주는 사정없는 방청자가 한사람 정도 있었으면 했다.


    큰방으로 가서 등불을 켰다. 모녀가 앉아서 홍차를 마시고 있는데 주위가 조용 한 것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지만 갑자기 쓸쓸해졌다.


    “최씨나 김씨를 불러서 잡담을 하세요.” 딸의 제의에 어머니도 찬성하여 별가의 심부름 소녀에게 구관에서 두 사람을 불 러오도록 분부했다.


    소희가 창에서 어두워진 마당과 먼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최철과 집사인 김이 들어왔다. 불러 주니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었다.


    “방해한 것은 아닌가요. 쓸쓸해서 오라고 했어요.” “우리들도 심심해서 거리에 나갈까 생각하고 있던 차입니다” “앉으세요……무언가 색다른 거리의 뉴스는 없는지요.” 영민에게서 아무런 흥취도 사지 못했던 모녀였지만 집에서는 영주여서 주종의 관계도 명확히 하는 것이 가풍의 전통을 자랑하는 부인의 방침이었다. 그러한 모 녀 앞에서 두 사람은 집 밖에서와 달리 더 저자세이고, 거리의 일을 전하는 정보 계원으로서는 완전히 충실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저, 최씨.”


    소희는 차를 마시면서 부탁하듯이,


    “─ 이번 파티에는 꼭 파트너와 함께 오라는 말이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 각하고 있어요. 모두 두 사람씩 오겠지요. 나는 얼마나 면목이 없을까를 생각해 요.”


    “짝 잃은 원앙새 같겠네요.”


    최철이 서투른 재담을 던지자, 소희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그러니까요……영어를 잘하고 춤을 잘 추고……그런 사람은 없을까 몰라.” 안 그런 척하면서 영민에 관하여 알고 싶은 속마음이 있다는 것을 최씨가 알아 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아직은 자기만이 알고 있는 영민에 관한 어제의 일건을 모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좋은 것일까 어떨까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이미 그 건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생각했습니다만……안군에게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입이다 만요.” “무엇일까요.”


    영민의 일이라고 하니 딸뿐 아니라 어머니도 걱정스러운 듯이 의자를 가까이 가 져왔다.


    “아주 빅뉴스입이다.”


    “애를 먹이지 말고 말하세요.”


    “기분이 상하시면 해서 좀더 있다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싫어요.”


    “안군의 학교 동창의 누이동생이 안군에게 열정적으로 달려들었다가 자해하려 고 했습니다. 생명은 겨우 건졌지만 그 때문에 안군은 코앞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었어요. 아마도 일을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일이 아깝게 되었습니다.” 하고 최는 좀더 자세히 요코의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놀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 일이라는 것이 요코와의 연애 사건인가 ─ 아마도 그 둘을 싸잡아서 하는 말일까. 여하간 모녀의 놀람은 큰 것이었다.


    “단순한 사람이란 없군요. 대체로 마음속 어딘가에 복잡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 어요.”


    “딱하게 됐어요.”


    라고 했지만 영민들에 대한 동정보다도 실망의 빛을 역력히 얼굴에서 읽을 수 있 었다.


    “그 요코씨라는 사람 대단히 예뻐요.” 그런 곳에 억지로 희망을 걸어두고 싶었을지 모른다. 여자끼리는 이런 일에 대 한 탐색은 가장 중대한 관심사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지적인 타입의 발랄한 현대여성입니다.” “그래, 좋았어요.”


    소희는 영민에 대한 실망이 컸던 듯 자포자기하여 의자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소희는 후다닥 방에서 뛰쳐나가버렸다. 무엇에 홀린 것처 럼 어둠에 쌓인 마당으로 내려갔다.


    넓은 방은 어색하게 되어 아무도 말이 없었다.


    “쓸데없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김이 걱정하니,


    “조만간 알려질 일이지요.”


    최도 미안한 듯한 얼굴을 한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꺼렸었어.” “좋아요. 어차피 알아두지 않으면 안될 일이지요.” 부인이 말을 꺼내고,


    “오늘밤은 유쾌하게 지내고자 했는데 아깝게 되었어요.” 라며 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소희는 장미의 오솔길을 지나 구저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밤의 미풍에 흔들리며 수목의 잎이 서로 비비는 소리가 쓸쓸하였고, 거리의 소 음에서 멀어진 정적 속에 쓸쓸함이 냉랭하게 몸에 스며들었다.


    “어떤 일도 생각대로는 안돼요.”


    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슴속이 뜨끔뜨끔하며 아팠다. 떠오르는 영민의 환상이 더 욱 더 훌륭한 것처럼 보여 온다. 어느 사이엔가 그것은 그 여자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증오의 대상이 아니고 애정의 발광체로서 지금 그 여자의 가슴을 꿰뚫고 있다.


    저택의 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그 여자의 머리를 비친다. 그것을 피하는 것 처럼 발 빠르게 불빛의 폭에서 나와 나무 그늘에 들어갔다. 자연히 구부러진 나 무줄기에 앉으니 희끄무레한 모래가 발바닥에 사락사락 밟혔다. 소름이 끼치며 몸이 떨리면서 온 몸뚱이를 모래 위에 부딪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괴로워할 것이 없지 않은가.”


    어둠 속에 소리가 나더니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느 사이에 뒤 따라 왔는지 근심 스러운 얼굴이었다.


    “실망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해. 오늘 예기치 않게 그런 소식을 들었다고 하는, 그저 그것뿐이야. 사건이 어떤 모양으로 결론이 날지는 아직은 알 수 없고 우리 들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본다는 법도 있지 않아. 듣고 ─ 실망하고 ─ 그 만 둔다 ─ 그렇게 무기력해서 무엇에 쓰나, 잘 되어 나가게 할 만큼 해보는 것 이다.”


    “안돼요, 어머니. 이보다 더 명확한 일이란 없지 않아요. 한다 안 한다 그런 여지 따위는 없어요.”


    “그게 아이들의 기분이라는 것이다. 저쪽에서는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는 것 같 지 않구나. 세상의 일은 언제나 갑자기 변하는 것이니 앞으로 바람이 어떤 방행 으로 불지 어찌 알겠느냐.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 해보는 것이 현명해.” “어머니는 흡사 시험 공부처럼 말씀하시네. 노력 같은 것은 못난이나 하는 것 이예요. 첫째로 흉하지 않아요.”


    “아니, 틀렸어. 사랑도 노력이야. 노력으로 사랑은 굳어져요. 천박한 직감으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된다고 하면 진실한 깊이에 도달할 수는 없어요.” 설득해 오는 어머니를 상대로 해서는 결정이 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소희는 훌쩍 일어나서 어머니 앞을 떠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가만히 있지 않고 뒤를 따른다.


    “저 외국 가는 거 확실히 정했어요. 이제 아무것도 마음을 붙잡는 것이 없어 요. 아버지에게 수속을 해 달래가지고 이해가 가기 전에 출발할 계획이예요.” 준비하고 있던 최후의 비방을 내놓는 것처럼 쉽게 그것을 말하는 젊은 딸을 어 머니는 가련히 생각하면서도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뜨끔했다.


    “네 기분은 알지만 지금 무리한 이야기를 해도 곤란할 뿐이 아니냐.” “싫어졌어요. 이런 곳에서 언제까지나 어정거리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 가기는 가는 거지만 지금 같은 자기 타락의 기분으로 간다고 해도 마 음이 불안할 뿐, 별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아니요, 지금이 물때예요. 마음에 큰 움직임이 없다면 이런 일을 하기 어렵게 될 뿐이예요.”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려무나. 하는 데까지 해볼 테니까. 외국행은 그 때부 터 해도 충분하다. 몇 번 말해도 같은 것. 또 실패하지는 않는다니까. 용감하지 않으면 안돼. 훌쩍거리는 현대여성의 그런 모양새는 뭐야.” 떼쟁이를 얼리는 것처럼 어머니는 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안색을 엿보는 것이었 으나 소희는 아무리 해도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발 빠르게 어머니의 애무에서 피하려고 했다.


    밤의 미풍에 어둠 속의 나무 끝은 살랑살랑 소리 내며 밤이 깊어지는 것을 알려 주는 듯하였다.


    다음날 아침 어떤 바람이 불고 돌아갔는지 소희는 어젯밤의 초침한 의기와는 전 혀 다르게 밝은 기색에 몸단장을 하는 손놀림도 명랑했다. 어머니의 설복이 성공 한 것일까. 생생한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연한 화장을 끝내고는 좀 화사한 드레스로 바꾸어 입었다.


    “딴사람이 된 것처럼 예뻐졌구나.” 여행을 떠나는 아기의 출발을 도와 준다는 식으로 어머니는 옆에서 여자다운 세 세한 주의를 기울였다.


    “용감하고 확고하게 해라.”


    스포츠의 응원 같았다. 사랑은 스포츠 정신과 닮았을지 몰라. ─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부인의 격려의 말이었다.


    좁은 장미의 오솔길을 경쾌한 차림으로 내려가는 딸의 모습을 창문을 통하여 바 라보면서 부인은 아이들처럼 손을 흔들었다.


    이미 어제까지의 조심성 있는 소희는 아니었다. 오늘은 겁 없이 질리지 않고 넓 은 마음으로 영민의 아파트를 방문할 수 있었다. 뜻을 정한 처녀의 마음은 아무 것도 겁내지 않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영민은 외출 중이었다. 문을 열 수 있었다면 멋대로 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이라도 기다리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방 열쇠는 주인만이 가 질 수 있게 되어 있다. 반시간이나 응접실에서 멍하니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갔 다.


    원망스러운 듯이 거리를 빈둥거리다가 문득 생각해 냈는지, “그렇다. 병원에 가봐야지.”


    영민을 만나고 싶은 생각에, 또 하나 요코를 보아야겠다 라는 악귀 같은 기분이 적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언덕 위의 병원에서 침대에 일어나 있는 요코를 영민 대신에 ─ 상상 중에서 여러 모양으로 생각하고 그려보던 그 여자를 만난 것이었다.


    초대면의 두 사람은 모두 놀란 듯이 잠시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양쪽 다 상대 방을 다루기 쉽다고는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영민씨를 만나고 싶은데요.”


    “안계신데요. 누구신지요.”


    물으면서도 요코는 그 품위 있는 치장에서부터 언젠가 영민에게 들은 자작의 딸 이 아닐까라고 직감했다.


    “민소희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몸가짐을 바로했다.


    “댁은 요코씨지요. 소문으로 듣고 있어요.”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요코는 서슴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상대를 예리하게 돌아 보았다.


    “영민씨를 만나서 어떡할래요.”


    “그저 만나고 싶을 뿐, 오래간만이니까.” 침착한 것이 약간 미울 정도였다.


    “아파트로 찾아가시면 좋을 터인데 왜 이런 곳에까지 왔어요.” “없었어요, 아파트에. 거리를 빈들거리다가 문득 여기 일을 생각했어요” “이런 꼴을 보러 왔군요, 아아, 분해.” 요코는 짧게 소리치고는 그만 이불을 덮어쓰고 말았다.


    “그런 뜻으로 온 것은 아니예요.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매정하게 당하고 보니 소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 다.


    “나가주세요”


    옆에서 보고 있던 마키는 마침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돌연한 방문을 받고 위 축되어 있는 동생이 불쌍해서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병에 해로우니까 나가 주세요.”


    큰소리를 치는 듯한 말을 듣고 소희는 용기를 잃고 주춤거리는 모양이었다.


    고향의 가을


    소희가 아파트를 방문한 날 영민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인천 바다에 가 있었다.


    고향에 가기 위한 짐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아직 뜻을 굳히지 못한 기분이어서 덜렁 바다에 온 것이었다.


    섬을 거닐거나 해수탕욕을 하거나 하며 무엇인가에게 몸을 맡겨 버리려고 해도 누군가가 뒷머리를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불안이 한시도 없어지지 않았다. 쉬지 않고 밀려오는 물결 소리의 단조로움도 신경을 건드릴 뿐이었다. 이틀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와 보니 고향으로 가는 도리 밖에 없었다. 넓은 바다에도 열 터지게 돌아치는 상념을 버릴 수는 없었다.


    병원의 요코에게는 간단한 편지를 보내고 아파트에서 똑바로 정거장으로 향했 다.


    기차에 앉았지만 같은 시간의 연장으로서 바다에서와 같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창으로 늘 보던 풍물에 눈을 돌리고 있을 때 차례차례로 지나가는 한 폭 한 폭 이 마치 지나간 날들과 같이 조급하게 보인다.


    ─ 무엇을 위한 조급한 변화였을까.


    날아가 버리는 나무처럼, 전원처럼, 구릉처럼, 짧은 시간 중에 급격한 기복을 보이며 모든 것이 싱겁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큰 뜻을 안고 있었다. 목적을 향해서는 일사 불란, 피 나는 노력을 했다. 그리하여 겨우 빛나는 날이 오려고 했다. 사랑도 뜻도 한꺼번 에 이루어지려고 해서 이런 행복이 일시에 와도 좋은가라는 위구의 염까지 솟았 다. 그 위구의 염이 맞아든 것이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차질이 생기고 모든 것 이 헛된 기쁨으로 끝났다. 기쁨 대신에 절망은 컸다.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의 맥 이 풀렸다……짧은 시간 중에 일어난 일이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날아가는 전원처럼 구릉처럼 모든 것이 한 개의 고통과 같은 생각이 들고 가슴 속 가득히 쌓이는 것이었다…….


    ─ 아버지는 얼마나 한탄하실까.


    고향이 가까워짐에 따라 자기의 사건에서 떠나 생각의 범위를 넓혀 갔다. 나이 많은 아버지의 실망은 얼마나 클까.


    대대로 학문을 가지고 일어선 가문이었다. 아버지 대에 와서 생각한 바 있어 잠 시 직업을 바꾸어서 기울기 시작한 유산의 만회에 힘써 가운을 되찾은 일은 있었 지만 생활에 부족이 없는 지금은 아버지가 외아들인 영민에게 바라는 것은 학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학자로서 대성하고 선조의 자랑을 일으키는 일 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번 발을 들여 놓은 실업계에서 몸을 빼고서는 경서를 읽으 며 유유히 세월을 보내며 다만 아들의 성공을 지켜보아 왔다. 영민으로서도 그런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왔으므로 더욱더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구인(九仞)의 공 에까지 끌고 온 것이었다. 불행히 생각지도 않은 한 삼태기 부족으로 실패하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얼굴을 마주할 체면도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아버지와 같 이 어머니의 실망도 클 것이다. 수없이 많은 혼담을 준비하고도 영민에게 닥치는 대로 퇴짜 맞은 어머니였다. 아들을 참말로 믿으니까, 행복을 마음으로부터 기도 하니까, 자신을 꺾고 아들의 뜻대로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있었다. 영민은 아직 요코에 관한 일을 밝히지 않았으나 말씀드리면 틀림없이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사건 쪽이 먼저 터진 것이다……구습에 젖 은 어버이 앞에 회초리를 준비하고 견책을 바라고 싶은 기분까지도 있었다.


    지금은 육친으로 향한 애정이 벅차게 가슴으로 밀려와 절망에 시달리는 몸을 맡 길 곳은 고향밖에는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차창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풍경이 만연한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점점 친한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왔다…….


    평양시 서쪽 변두리 취만(翠萬)을 뒤로하고 느리게 기울어진 주택구가 있다. 잡 초가 누렇게 되고 활엽수 잎의 색이 달라지는 가운데 적색 녹색의 슬레이트 지붕 이 한층 더 눈에 띠었다. 고풍인 모란대의 누각이 산꼭대기에 올려다 보이고 훨 씬 서쪽의 평지에는 서장대의 백양 숲이 곱게 바라보인다. 하늘은 파랗게 맑아서 경사지의 아침은 조용하고 시원했다.


    숲 속을 산보하다가 돌아오는 영민의 손에는 벚나무와 가죽나무의 낙엽이 있었 다. 우리 집의 지붕을 올려다보며 낙엽을 입에 무니 온몸이 빨갛게 물들 것 같은 가을의 정기가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모든 상념에서 해방되어 몸은 깨끗한 계절의 냉기 속에 있었다. 돌아와서 좋았다라고 새삼스럽게 고향의 품을 그리워 하면서 마당의 잔디를 짓밟는다.


    집에 들어가니 그곳에도 자애가 있고, 평화가 있고, 방 ─ 즐거운 내 방. 책이 있고, 서화가 있고, 곰팡이 냄새가 있고, 어릴 적의 기억이 있다. 마음이 숨을 곳이고 ─ 무엇보다 집은 좋구나 하고 깊이깊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마음의 가장(假裝)은 아니었을까. 참말로 마음이 부드러워 지고 우수는 깨끗이 씻어져 있을까. 어젯밤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을 뿐인 영 민은 아직 집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괴로운 임무를 앞 에 놓고 참말로 마음이 즐거워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창을 열고 멍청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노라니 여학교의 상급에 다니고 있는 동 생 영옥이가 들어왔다. 제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등교전의 모습이다. 집에서는 누구보다도 그 애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나보다도 오빠가 일찍 일어났군요. 어젯밤에 일찍 자서 실례. 요즈음 운동으 로 피곤해요.”


    “벌써 학교에 가느냐.”


    “오늘 아침은 늦은 편이예요.”


    “그럼 빨리 가렴……어때, 피아노는 늘었느냐.” “응 조금은요. 올해에는 음악하교 시험을 봐요. 그런 요량으로 열심히.” “틀림없이 하는 거다. 해야 할 것은 모두 충실히 해야 한다.” “저.”


    영욱은 장난기를 보이며 눈을 빛냈다.


    “오빠가 왜 갑자기 돌아왔는지 모두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냐.”


    “신문과 기타로 알아 버렸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음엔 많이 걱정 했지만 요즈음엔 뜻밖에 태연하세요.”


    “알고 있었구나. 그건 다행한 일이다……그런데 기분은 어떠시냐” “그러니까 걱정 안하신다고요. 성을 내셔도 할 수 없지 않아요. 이미 다 잊어 버린 듯이 보여요. 하지만 요코씨의 일을 꼬치꼬치 물으셨지만 나도 아무것도 몰 라 초조해 하고 있었어요.”


    “그러냐. 잘 알았다.”


    “나도 요코씨를 만나고 싶어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며 마음대로 공상하고 있 어요”


    “자, 늦었으니 빨리 학교에 가거라.” 시계를 보면서 동생을 쫓아 보내듯이 서둘렀다.


    오전에 거실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어머니도 뒤따라 들어왔다.


    자세한 내용을 듣고 과연 양친의 놀라움은 컸으나 아버지는 대범하게 고개를 끄 덕이며 태연한 태도였다.


    “학교가 어떻게 해도 안된다면 어떠냐. 좀 장소를 바꾸어서 공부할 생각은 없 느냐. 외국이라도 어디라도 좋아. 네 뜻 여하에 따라 어떻게든 될 것으로 생각한 다. 내가 한때 피땀 흘려 일한 것은 모두 너희들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조금은 힘이 있다.”


    “고맙습니다. 그 동안에 생각해 두겠습니다.” 육친의 일이라고 하지만 고마웠다. 아픈 데를 어루만지는 애정의 손 ─ 그것은 육친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그것을 알고 영민은 감격하여 목이 메었다.


    아버지가 나간 후에 어머니는 소곤소곤 말수가 많았다.


    “아버지의 기분에는 자나 깨나 학문밖에는 없단다. 감사한 말씀이다……걱정할 것은 없다. 지금과 같은 기분으로 지금부터 힘껏 하는 것이다.” “꼭 다시 해 보이겠습니다.”


    “또 한 가지. 네가 놀랄지 몰라.”


    라고 하며 어머니는 아들의 안색을 엿보듯이, “민자작가와의 일 말이다. 그것도 알고 있지만 이렇게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 한다. 이젠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것으로 체념하고 그쪽에 대한 생각을 결정해 주렴.”


    청천병력에 영민은 멍청해졌다.


    “그건 어떤 일이지요.”


    “자작부인이 딸을 데리고 어제 집에 오셨단다. 참으로 훌륭한 따님이 아닌가, 우리로서는 분에 넘칠 정도야.”


    “어머니.”


    영민은 뜻 없이 짧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자작부인이 무엇 때문에 왔어요. 그렇게도 확실히 말해 두었는데.” “무엇 때문이라니. 그런 실례스러운 말은 안돼. 고맙다고 생각해야지. 저런 고 귀한 몸이 일부러 애써 오신 것이다.” “안됩니다. 아무리 어머니를 설득해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네 생각대로는 안될 것이야. 아버지도 내키시는 마음이시니 신중히 생각해 두 어라.”


    “그럼 아버지는 그런 일로 나를 달래려고 한 것입니까. 외국에라도 가라고 하 신 것은 그것은 다 나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었군요.” “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침착하도록 해. 아버지가 말씀하신 건 물론 그 런 의미가 아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 문제다. 다만 그만한 문벌이니. 아버지도 그 점이 마음에 드신 것 같다”


    “나는 그런 방식은 원래 싫어요.”


    “얘, 너 흥분해 있어. 찬바람이라도 쐬고 오노라. 또 천천히 말해 보자.” “내 생각은 언제나 변하지 않아요.” “산보 나가자. 오늘은 나도 함께 갈 터이니까.” 옷을 갈아입고 어머니도 전에 없이 뒤를 따라 나왔다.


    경치가 좋은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걸어 본 일은 거의 없었다.


    부근의 솔밭을 지나고 숲이 깊은 오솔길을 걷고 있으니 전의 거칠었던 마음과는 달리 늙은 어머니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솟았다.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백 양의 숲 속에 들어가니 무수한 작고 둥근 잎이 흰 뒷면을 뒤집어 보이면서 쉴새 없이 미풍에 소리 내며 살랑거렸다.


    “조금은 냉정을 되찾았느냐.”


    오솔길이 끝나고 거리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차를 잡으며, “오늘은 어머니가 한턱내겠다. 이런 곳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도착한 곳은 호텔이었다. 어머니는 서투르게 차에서 내려 들어갔는데 복도에 들 어가자마자 영민이가 만난 것은 뜻밖에도 자작부인이었다.


    어머니 의도를 깜박 알아차렸지만 이미 그 자리에서 머뭇거릴 수가 없어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부인의 등 뒤에서 소희가 생긋 웃으며 나타났다.


    어머니가 부인과 끈덕지게 이야기하는 동안에 영민은 로비로 들어갔다. 소희는 어머니들을 그곳에 남겨 두고 영민의 뒤를 따라갔다.


    “어처구니없지요. ─ 당신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렇게 용감한데 좀 감복했어요. 어느 사이에 그렇게 용감하게 되었습니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상입니다.”


    “어머니에게 배웠어요. 소문을 듣고 기운이 빠져 있는데 좀더 원기를 내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용감하게 부딪쳐 보기로 했어요. 심기일전이예요.” “현대여성은 무서운 존재군요.”


    “그래요. ‘무서운 아이’예요. 그런 아이가 되도록 결심했어요.” 수줍음을 머금은 백장미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더니 과감한 탈토(脫兎)로 변해 있 는 것이었다. 말뿐 아니라 표정이나 거동이나 모든 것이 탈토의 그것이다. 영민 에게 권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앉는 모습은 팔팔 튀는 것 같았다.


    “용감해져서 대체 날 어떡할 작정이지요.” “싸우는 겁니다. 당신의 완고한 마음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엇차, 그렇게는 안될 겁니다. 이래봬도 나도 굳은 편이니까요.” “아니요, 쟁취해 보고 말고요. 마음을 쟁취하지 못하면 ─ 실례지만 머리를 가 지겠어요.”


    “마치 살로메로군요. 아아, 무서운 무서워.” 자기도 모르게 더듬더듬 그 여자의 농담에 맞장구를 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영 민은 깜박 자기를 되찾도록 노력하였다.


    소희는 완전히 용감한 병사가 된 셈이었다.


    호텔에서 영민을 만난 다음부터는 따라붙는 그림자처럼 잠시도 그로부터 떨어지 지 않았다. 거리에 나서면 어느 사이엔가 뒤를 따르고 집에 돌아가서도 거침없이 따랐다. 산보하러 나가도 언젠가 옆에서 훌쩍 나타나서 영민을 몹시 놀라게 하기 도 한다. 언제 돌아갈지도 모른다. 호텔에 숙박하면서 영민의 뒤에 붙어 다니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제멋대로의 일과이다. 영민이라 하더라도 입을 놀리거나 의 견을 내놓거나 할 사이가 아니고 한 폭의 풍경처럼 만연히 그 여자의 모습을 바 라보는데 불과하였다.


    “나 겁나지 않아요. 어디든지 따라갈 거예요.” “예, 마음대로.”


    “감동했지요.”


    “네, 다리가 강한 데는요.”


    “학교 때에 체조로 단련했으니까요. 매일 원족 가는 것 같아 아무것도 아니예 요.”


    “호오, 믿음직하군요.”


    둘째 날, 소희는 다름없이 원기가 있었다. 거리에서 소풍 나온 영민을 따르면서 숨찬 소리로 말한다.


    “그저 믿을만할 뿐? 거짓말 마세요……감복했지요.” “예, 조금씩.”


    “저는 사랑은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에게서 그렇게 배웠어요. 영감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더니 중학교 때의 수험 공부 같은 것이라고요. 그래 지 금 그와 같이 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세요. 실패하지 않도록요.” “충고 감사해요. 군인들처럼 강해요 ─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둘……” 그리고 사흘째 날.


    영민은 아침 일찍 집을 빠져나와 모란봉의 가죽나무 숲 속에 있었다. 어떻게 그 것을 알고 뒤를 따른 것일까. 걸어가는 방향에서 별안간 나타난 것은 소희였다.


    매일 그랬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곳에서 그 여자를 만나자 영민은 뜨끔했다.


    구불구불한 소로를 지나 산마루의 찻집 앞에 왔을 때, 그 여자는 거의 몸이 맞 닿을 정도로 영민의 옆에 섰다.


    멀리 아래에는 대동강의 푸른 물이 머물러 있고 그 배경으로 아침의 단풍이 한 층 더 맑아 보였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흙의 인상에서 벗어난 수목의 상층 부만의 여러 색깔의 자수(刺繡)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슬플 정도로 아름 답다 ─ 아름다우니까 슬픈 것일까. 슬프니까 아름다운가. 그 청청한 아름다움 앞에서 영민은 초연하여 말이 없었다.


    소희도 같은 기분일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쓸쓸한 모습이었다.


    “어때요, 감동했어요.”


    “…………”


    조용한 소리가 반향도 없이 나무 사이로 사라져 간다.


    “지쳐 버렸어요.”


    어제까지도 용감하고 강한 군인은 어떻게 된 것일까. 소리도, 몸도, 정말로 지 쳐서 오늘은 하늘하늘하게 가냘픈 여자였다.


    “역시 바보였어요. 강하다고 자부했었지만 틀렸어요. 이렇게 기운이 빠져 버리 고……”


    영민도 어쩐지 같은 기분이었다. 고집이 세고 드세었던 그도 하늘하늘한 소희의 모습을 앞에 두고는 왠지 마음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이미 어제의 소희는 아니 다. 오늘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귀엽게 마음을 두드렸다.


    백장미의 탄식


    괴로운 아침 산보에서 돌아오니 소희의 환상이 못 견디게 어른거려서 영민은 종 일 집에 칩거하기로 했다.


    어제까지의 소희가 아니고 오늘은 새로운 힘을 가지고 마음을 휘어 잡고 있다.


    그 집요성과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한 여자가 왜 이리도 나를 의지하여 오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은 대체 어 떤 의미인가.


    약하면서도 강한 군인을 흉내내어 보지만 결국은 약한 것 가운데 되돌아가 버리 는 소희였다. 나 때문에 이렇게 지쳐서 허덕이는 그 여자가 아니었는가. 넓은 세 상 속에서 무엇이 좋다고 한 개의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나 같은 것을 택하고 스 스로 괴로워하는 것일까. 아무런 부자유한 것이 없는 그 여자가 왜 좀더 분별 있 는 선택을 시도하지 않고 편협한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것일까. ─ 그런 그 여자 의 모습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잘못된 유랑인 것이다. 사치한 희생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스러울 뿐이고 그것에서 해방되려면 요코를 계 속 생각하는 길 밖에 없었다.


    편지다발을 꺼내어 읽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반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가 상당히 많이 모여 있었다. 그리운 글자를 골라 읽고 있는 동안에 새로운 기분이 솟아오르고 잊어버리고 있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세계 가 되살아났다. 요코의 세계는 역시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여자 독자의 것 이었다. 풍부한 정감과 높은 교양이 글자 속에서 스며 나와 강한 끈으로 마음을 힘껏 끌어당겼다. 마음과 마음의 접촉은 우연한 기회에 일어날지 모르나 그것이 매어질 단계에 이르는 것은 어떤 필연의 힘에 의한 것 같아 보였다. 의심도 없고 방황도 없고 ─ 이미 운명과 대면하는 듯한 기분이 요코에 대한 기분이었다. 협 잡물의 그림자도 형태도 없고 마음은 순화되어 갔다.


    팽팽하던 긴장이 풀리자 밤의 피로가 밀려왔다. 피로의 틈을 타고 들어오는 것 이 끈질긴 마음의 도둑이었다.


    벽에 그려진 얼빠진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동생 영옥이 들어왔 다.


    “하루 멍청하게 있지 말고 내 방에 놀러 오세요.” 식사 때 얼굴을 대했었을 터인데 새삼스럽게 건방진 어조였다.


    “네, 안 오셔서. 피아노를 쳐 드리겠어요.” “아무 말 말고 공부나 하지 왜 유혹하러 왔어.” 큰소리를 치니까 기가 죽어서,


    “무서워요.”


    눈을 둥글게 뜨고는,


    “그럼 말해 버릴 거예요.”


    이번에는 심술궂은 척하며 민첩하게 말했다.


    “소희씨가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새삼스럽지도 않으나 영민은 역시 동생을 빤히 응시하였다.


    “피아노를 참 잘 쳐요. 아까 것은 내가 친 것이 아니었어요. 소희씨가 연주한 거예요. 들었어요.”


    “그럼 더 연주하라지 그래. 나는 소용이 없다.” “실례예요. 손님을 기다리게 해놓고.” 영옥은 엄숙한 태도로 오빠를 꾸짖듯이, “오빠 고집쟁이.”


    “아무렇게나 말해라. 상관 않는다.” “오빠의 기분 나는 모르겠어요.”


    영옥은 조용한 어조로 돌아갔다.


    “소희씨. 저렇게 기품이 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빠는 왜 싫어해 요. ─ 요코씨는 아직 안 만났으니까 알 수 없지만 난 단연 소희 씨가 좋아요.


    피아노 선생님으로 모시겠어요.”


    “그럼 얼마든지 사이좋게 지내면 좋지 않아. 네 마음대로다.” “곧 틀림없이 좋아질 거예요. 내가 떠맡겠어요.” “시끄러워, 빨리 돌아가.”


    그리고는 뚝 말을 멈춘 동생에게,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어머니가 물으시며 그렇게 전해줘.” 말해 버리고 영민은 살짝 방을 나갔다.


    만포선의 양덕 행 야간열차를 여유있게 탈 수 있었다.


    거리에 나가서 생각난 것이 늘 가던 그 온천이었다.


    고향집도 좁아 답답한 곳이 되었다. 그 이상 뒤따라 올 수 없는 조용한 은신처 가 필요했다.


    손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벼운 도피행이 시원하고 상쾌했다.


    객차를 갈아타기도 하면서 산길을 흔들리며 산협의 숙소에 도착하니 밤은 반이 지나갔다.


    뜨거운 물에 피로를 씻고 푸른색 다다미에 깐 요에 누우니 모두가 조용한 가운 데 계류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맑게 울려왔다. 속세를 떠난 온천, 온천 여관의 한 방은 참으로 어디에서도 엿볼 수 없는 좋은 은신처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산꼭 대기에서 별이 들여다보고 있을 정도가 기껏이다.


    아침은 더욱 시원하고 낮은 더 조용하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햇빛을 받아 가까운 산 우묵한 곳의 단풍은 붉게 타고 있었다. 청결한 공기를 만끽하고 사람도 생물도 입을 여닫는 어항 속의 금 붕어처럼 기뻐하는 자태였다. 계류를 따라 계곡을 올라가니 들장미와 산사자의 마른가지에 빨간 열매가 넘칠 정도이다. 냉기가 도는 빈 별장 단지를 돌아 혼자 만의 산책에서 돌아오면서 자연의 영기로 머리를 비게 했을 터인데 철심처럼 최 후까지 몸 속을 관통해 있는 것이 있다. 자연 속에 녹아 버린다는 것은 결국 불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해질 무렵 혼자 욕조에 깊이 몸을 담그고 있는데 무럭무럭 김이 서리는 가운데 석양이 창으로부터 들어와 욕실을 관통하였다. 심해 같았다. 파랑색 타일이 해초 처럼 젖어 빛나고 그 위에 떠 있는 육체는 흔들흔들 움직여 무언가 신비한 것처 럼 향기롭다. 뜨거운 피가 난류처럼 몸 속을 흐르면서 여기에 가장 고귀한 생물 이 조용히 헤엄치고 있다.


    쑥 튀기며 일어서자 욕조의 물이 물결치며 넘치면서 불그레하게 상기한 지체가 가볍게 솟아올랐다. 난간에 기대니 해변에 올라온 인어처럼 녹초가 되었다. 풍부 한 허리, 탄력 있는 사지, 시원하게 긴 몸매, 부드럽게 불룩한 곡선 ─ 태고 적 부터 이어받아온 그 원시체를 영민은 오늘 새롭게 발견한 듯이 아름답게 보고 또 보았다.


    세상에 몇 억이나 되는 그 같은 육체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내 몸처럼 아름다 운 것은 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 속에 살짝 피어나온 꽃 같이 흰 피부는 다른 곳 아무데도 없고 여기에 있을 뿐이다.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 다만 여기에 만 있다. 그리고 이 하나밖에 없는, 어떤 대가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 이다. 살아 있다. 이 형태, 이렇게 흰 것 ─ 세상의 어떤 다른 것보다도 지고(至高)한 것이고 지미(至美)한 것이며 아무에게 도 줄 수 없는 훌륭한 것이다.


    몸의 구석구석을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며 육체의 사상에 잠기는 일은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이 무섭게 자기본위적인 생각 방식은 대체 어디서 터득했는지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다만 황홀하여 나와 내 몸을 보며 심취해 있을 뿐이었다.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훌륭한 것이다. 이 훌륭한 한 개의 절대를 요코와 소희가 원하고 있다.


    그 여자들의 일방적인 희망이다. 그것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거나, 주거나 안주 거나 는 이쪽의 마음대로다. 신이 준 단 한 개의 특전인 것이다. 그렇다. 사랑의 특전은 누구에게도 지배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옆방 욕실에서 찰삭찰삭 물을 치는 소리가 나면서 그곳에도 한 인간이 있음을 알렸다. 영민은 문득 내 육체의 사상에서 깨어나 벽 한 겹 저쪽에 같은 한 육체 가 있다고 상상했다. 그것도 틀림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 육체의 주인에게는 마치 영민의 경우와 같이 지고한 것이고 지미한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 아름다운 육체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었다.


    몸을 닦고 욕의로 갈아입은 다음 유유히 유리창 문을 열었을 때였다.


    옆방 욕실의 문이 같이 열리며 거기서 나온 여자의 모습을 본 영민은 갑자기 우 뚝 서 버렸다.


    “아니, 당신이.”


    “그래요.”


    소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화려하게 피어난 희디흰 꽃이었다.


    윤나고 싱싱한 얼굴이나, 목덜미나, 요의 자락에서 내비친 복사뼈나 ─ 목욕물 에 젖어 부풀어서 희게 솟아오른 꽃잎이었다. 떠오르는 김은 꽃잎의 호흡이고 향 기였다. 그 적색의 흰 것 중에 빨갛게 칠한 손톱은 산에서 본 산사자의 열매이 고, 그리고 늘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 포도송이라고 할 수 없을까.


    뜻하지 않게 편안한 소희의 자태를 앞에 두고 영민은 가장 아름다운 한 육체를 거기서 보았다. 하나의 경이이고 ─ 그것이야말로 절대였다.


    자기의 육체를 최상의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였으나 눈앞 의 그것은 월등히 아름다운 것이고 지고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좁은 욕조 속에서 는 오직 자기만을 보고 있었으나 지금 다른 하나를 눈 앞에 두고 보게 되자 몽매 함이 열리고 훤히 눈을 뜬 것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나 자신이 아니고 상대방이 었던 것이다 ─ 내가 아니라 너였다. 영민은 황홀하여 나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뜻밖이었지요.”


    소희의 소리를 듣고 수줍은 눈을 돌려 복도로 가는 층계를 올라갔다. 소희도 욕 의 자락을 좁히면서 뒤따랐다.


    “아마도 온천에 갔을 것이라고 영옥이가 말해 주었어요. 제멋대로 짐작하고 타 보았어요. 오전의 기차였는데 이렇게 늦었어요.” “세계 제일의 탐정이군요.”


    “그런 것보다도 ─ 당신, 대단히 잔혹한 분이예요 사람을 마치 노예처럼 대접 하고 있지 않아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모두 당신이 하고 있어요. 당신 때문이예요.” “그럴까요.”


    “나를 무어라고 생각하고 계실까 몰라…… 벌레처럼 아무렇게 취급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틀림없이.”


    “천만에요.”


    “아니요, 그래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대접할 수는 없을 거예요.” “나는 다만 내 마음대로 ─.”


    “그것이 결과부터 말하면 모두 나를 희롱한 것이예요. 이렇게 계속 희롱당해 왔어요 ─ 곧 깨닫게 해드릴 거예요.” 이런 말까지 듣고,


    “모두 당신 멋대로군요.”


    라고 하며 더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그 여자의 태도는 너무도 진실했으며 ─ 거기다 그 여자의 아름다움을 앞에 두 고는 전에 욕조 안에서 생각했던 큰 교만과 자신은 어쩐지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 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의 제멋대로의 희망에 대답하거나 안하거나, 주거나 안 주거나 는 이쪽 마음대로이고 하나의 특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지고한 것이라고 만 느꼈다. 자기의 아름다움은 그 여자의 그것 앞에서는 볼품도 없이 부서진 것 이었다. 그런 자유와 특권은 그 여자의 옆에만 있어야 했다.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그 여자 측이고 그 선택 앞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 내가 그 여자의 열정에 응할만한 값어치가 정말 있는 것일까.


    지금은 이미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한 가치 표준 앞에서 영민은 하나 더 큰 고뇌 와 부딪치려 하고 있었다.


    소희는 영민의 방 바로 옆의 방에 있었다.


    저녁 식사를 가져올 때 하녀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같은 방으로 할까요라고 한 것을 영민은 굳이 거절했다. 하녀는 웃고 있었다.


    침착해지려던 영민의 기분은 또 무너지려고 하고 있었다. 식후 때늦은 신문을 폈지만 심경이 불안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라디오에 스위치를 넣었다. 동요 시간이었다. 도회지 아이들의 목가는 산간 벽지의 한 방에서는 듣기에 좀 사치스 러웠다. 순진한 합창소리가 정적한 풍경에 알맞게 방안에 가득 찼다. 정적을 찾 기 위해 영민은 도리어 소리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들어가도 좋아요.”


    미닫이를 연 것은 소희였다. 몸단장을 바로 하여 밤눈에는 더욱 청초하다는 느 낌이었다.


    “아까는 뜻하지 않게 실례스러운 모양이어서……미안했어요.” 그러나 지금 정중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아까 욕의를 입은 싱싱한 모습과 조 금도 다르지 않고 여유 있는 한복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영민은 처음 보는 듯한 생각이었다. 외계의 모든 것에서 단절되고 구별된 액자 중의 화재(畵材)처럼 훌 륭하게 보였다.


    영민의 고통은 거기에 있었다. 그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투쟁, 그 여자를 멀리 두고 보지 않을 때에는 감독하지 못했던 고뇌가 지금 거리가 단 축되자 의외로 강한 힘으로 그를 억눌러 부수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참으로 강한 사람이예요. 저 이제는 항복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답지도 않군요. 용감한 군인이 아니었나요.” “당신은 쇠(鐵[철])거나 돌 같은 무정한 사람이예요. ─ 아니면……” “정말 그런 것이었으면 해요.”


    “아직 안 그렇다고 생각해요.”


    “글쎄.”


    “거짓말 마세요. 그런 태평한 태도가 돌인 거예요.” “그렇게 보일까 몰라.”


    쓴웃음을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뻔뻔스러워요.”


    동요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단순한 피아노의 화음이 소박하게 조화를 이루었 다.


    “저 ─.”


    고백을 위한 반주로서는 너무도 시끄럽다는 것일까. 소희는 끝내 라디오를 꺼버 렸다. 공허한 침묵속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는 기미였다.


    “ ─ 정말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렇게까지 했어도 아무렇지도 않군 요……아아, 슬퍼.”


    “……그렇지만 나에게는 ─.”


    “요코씨지요……요코씨의 입장에 놓이면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생각하지요.” “나는 요코씨의 일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운명입니다.” “왜 그럴까요. ─ 요코씨가 저렇게 되었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나도 해 볼까 보다. 그런 열정의 표시를.” “그래선 안 돼요.”


    “아아, 분해.”


    책상 위에 쓰러지면서 소희는 으악 하며 신음했다. 별안간 무슨 일인가 했더니 격렬한 오열이었다. 검은 머리는 흐트러지고 흔들렸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영민은 무서워졌다. 산중의 한 곳에 지금 두 사람이 있 다. 아름다운 백장미가 눈앞에서 호소하며 탄식하고 있다. ─ 보통일이 아니다.


    무언가 먼 꿈같은 느낌이다.


    “정신 차리세요.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세요. 자.” 머리를 흔들면서 흐느껴 울 따름이었다. 사람을 위로하기는커녕 자신도 자제하 지 못하고 영민은 문득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방을 뛰쳐나갔다.


    다음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룻밤을 회상하며 안도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옆방에는 변함없이 소희가 혼자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는 하지만 피곤하면서도 몸이 달아오르는 영민이었다. 어떻 게 하면 한번 더 소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몰두하면서 숙소 뒤 쪽의 낙엽 쌓인 솔밭을 거닐었다. 숲 속은 전면이 황색의 눈으로 덮여 있다. 화 사한 줄기를 흔들면 떨어지는 눈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맨발로 밟으면 융단같 이 부드러운 느낌이다. 몸을 눕혀 보았다. 서로 얽힌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 의 파편이 굳은 돌처럼 보였다.


    쓸쓸함


    퇴원한지 얼마 안된 요코는 집에서 양생하고 있었다. 다행히 다른 병이 병발하 지 않아 가볍게 일어날 수는 있었으나 여러 가지 심적 고통에서 오는 쇠약이 심 하여 방에 있어도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다. 누워서 쓸쓸함을 곰곰이 씹고 있었 다.


    몹시 쓸쓸했다, 세상이 끝난 것 같고 몸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쓸쓸함이었 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황색이고 귀에서는 소리가 나며 환청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 고독은 사람의 마음을 귀족으로 만든다 ─.


    누군가의 말을 아무리 계속 생각해도 고독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마음의 귀족이 되어 보기는 했지만 그런 냉랭한 자랑스러움은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았 다. 귀족이 아니라도 좋다. 고독하게 되고 싶지만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말이었다.


    책상 위에 잡연히 널려 있는 문학서를 손짐작으로 끌어당겨 여기저기 펴 보아도 허한 마음을 윤택하게 하거나 부유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고독」이라는 표제를 가진 번역서 등에 눈을 번뜩이며 책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도중에 견디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는 던지고 만다. 고독과 끈질기게 싸운 사람들에게 경의는 표하여도 도저히 그것과 친해질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 라고 하지만 이것 은 아직 고독을 즐기고 있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고독의 밖에 있으면 고 독을 즐길 수 있으나 그 한 가운데 있으면 그것에 압도당할 뿐이고 음미할 마음 의 여유는 없었다.


    땅거미가 깔릴 때의 방안은 특히 적막해서 창에 비치는 희미한 나뭇가지 끝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뱃속을 후벼내는 기분이 들었다. 사면의 벽에 갇힌 그 작고 어스름한 공간이 그대로 바다 속이나 어딘가에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었다. 창문으로부터는 이미 청신한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방속의 공기는 점점 희박해지고 더럽혀져서 호흡이 곤란하게 되고 가슴이 괴로워진다. 질식할 것 같 은 환상에서 빠져 나오려고 요코는 손발을 버둥거리며 이불을 차고 갑자기 상반 신을 일으켰다.


    마침 들어온 어머니 히사코가,


    “너무 책 같은 거 읽지 말아요.”


    하며 근심스럽게 다가와서 딸을 위로했다.


    “피곤해지면 또 되풀이되지 않겠느냐. 규칙대로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잘 못이다. 아직은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생각이 지나치면 안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누워 있어야 해요. 네 게는 네 초췌한 얼굴이 보이지 않아. 몸이 무엇보다 귀해, 생각하는 일은 그 다 음에 천천히 할 수 있어.”


    “어머니, 이 방에 함께 있어 주세요. 혼자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악몽을 꾸게 돼요.”


    “그럼. 함께 있고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정신을 확실히 차리고.” 히사코는 일어서서 책상의 책들을 치우고 화로의 철병을 내려놓고 차를 넣기도 했다. 딸의 주위를 맴돌며 어미닭처럼 자애를 베풀었다.


    “요코야, 너는 훌륭한 애가 됐어. 훌륭하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해요.” 젖먹이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였다. 아무리 커도 모친에게는 젖먹이 아기인지 모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요코만이 할 수 있는 훌륭한, 위대한 일을 한 것이야.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위대해. 누구보다도 인생 공부를 더 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반듯하게 열리게 될 것이다. 이미 큰 물결의 꼭대기는 대번에 뛰어넘 었으니까.”


    “정말 그럴까. 뛰어넘은 걸까.”


    “그럼, 이미 저렇게 멀리 가버렸어. 모든 것이 한참 옛날 같은 기분이 들지.


    저런 물결은 다시는 오지 않아야 해요.” 동화를 들려주는 어머니 앞에서 요코는 정말 젖먹이 어린이가 되어 버리려는 것 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마키는 동생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어머니 제가 교대하겠어요.”


    하며 어머니를 딴 일을 하게 하고 동생의 상대자로 교대했다.


    “연구실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으려니 요즈음에는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다.” “오빠도 쓸쓸해요.”


    “안군이 없어진 후에는 그곳이 온통 빈 것 같은 느낌이다. 방에 들어가서는 기 염을 올리곤 한 것이 어제같이 생각된다. 오늘은 이미 없다고 생각하니 뼛속까지 아픈 것 같다.”


    “누구나 쓸쓸한가 봐요.”


    “모두 쓸쓸하단다. 너도 나도 ─ 안군도.” “누구나 모두.”


    “자작 따님도 마찬가지다, 틀림없이.” 요코의 머리 속에 소희의 일이 아직 왔다갔다 할 것으로 알아차린 마키는 그런 곳까지도 걱정했다.


    “그럴까요.”


    “그렇고 말고. 모두 같은 거야.”


    마키는 저도 모르게 정말 옳은 곳을 맞혔는지도 모른다.


    소희의 일은 영민만이 알고 있다. 영민의 뒤를 따라 거리에서 산으로 공허한 편 력을 시도하고 마침내 마음의 한탄을 드러내 보이고 만 그 여자의 쓸쓸함은 그 여자와 영민 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마키가 알아맞혔다. 입에서 말이 나오는 대로 했을지 모르나 진실을 뚫어 본 데는 틀림이 없다.


    난데없이 요코의 병실에 나타나서 요코를 당황하게 한 것은 바로 소희였다. 꽃 처럼 밝고 분주한 그 여자가 그 후에 어떻게 대담하게 행동하고 길을 헤쳐 나가 는데 노력하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요코에게 더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의외의 강 적의 출현으로 지금 고뇌가 하나 더 생겨 내 몸의 병보다도 도리어 그쪽에 대한 고뇌가 컸다. 언제나 자기 일같이 위로해 주는 이는 마키였다. 오빠라기보다 좋 은 친구같이 충실하였다.


    “그렇게 동요해서는 안돼. 확신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확신이다.” 신념에 불타는 말이었다. 늘 힘을 주었다.


    “나는 안군을 믿는다. 언젠가 맺은 약속의 말을 믿는다. 그는 굳은 남자다. 이 이상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나도 믿어요.”


    “그럼 더 원기를 내야 한다. 언제까지나 쓸쓸해 할 것은 없어.” 그리고 오늘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안군의 편지다. 들어오다가 현관에서 집어왔다.” “그래.”


    편지라는 말을 들으면 요코는 언제나 심장이 뛰었다. 조금 큰 봉투가 손에 가득 하여 믿음직스러웠다.


    “잠깐 내 방에 갔다가 올께.”


    오빠가 나가자 요코는 서두르는 기분으로 편지를 뜯었다. 늘 있던 일이지만 줄 에서 줄로 그리움에 찬 눈이 빨려 들어갔다.


    ─ 고향에 와 보아도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무엇 때문에 왔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에 대한 분함 때문이었던 것이나 지금은 나 자 신에 대한 분노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학교라든가 친구라든가 성에 차지 않는 것은 많지만 지금은 도리어 지가 혐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여전히 생각지도 않았던 장애물이 눈앞에 나타나 혼자서 생각하고 방침을 세우 려 한 것이 교란되어 기분이 혼돈스럽기만 합니다. 모두 내가 부족한 탓입니다.


    기개가 없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오랜 방랑생활을 해온 것 같은 ─ 무엇을 위한 방랑인지 이유가 없는 방랑을 해 온 느낌입니다. 힘이 빠져 마음이 피곤함을 느낍니다. 방랑을 하였다고 해서 ─ 아니 방랑을 했기 때문에 마음의 결정은 그대로 변함이 없고 처음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런 일로 요코씨의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나를 믿어 주십시오. 상경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뵙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 라고 생각하니 새로운 힘도 솟 아 오릅니다. 이제부터는 모두 굳혀 갈 뿐입니다. 그러면 만나 뵐 때까지 건강하 시기를 ─ 영민.


    영민의 연구실은 영민이가 떠날 때 그대로였다.


    마키가 문을 열었을 때 주인 없는 방의 허전함이 싸늘하게 다가와 엉겁결에 머 뭇거릴 정도였다.


    책상도 책꽂이도 타이프라이터도 쓰고 있던 그때 그대로였다. 가만히 있기는 하 나 모두 각각 무언가 표정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표정 중에서 주인이 없는 것은 공허한 느낌이었다.


    책상 위에는 어느 사이에 먼지가 앉아 있다. 마키는 손가락 끝으로 만지면서 거 기서 흘러 버린 시간의 켜를 감득했다.


    “먼지란 쓸쓸한 것이구나.”


    비어 있는 의자가 말을 하는 것처럼 ─ 방의 어딘가에 혼이 숨어 있어서 그것이 그들의 집기류와 호흡을 함게하고 있는 듯했다.


    창밖에는 잎이 떨어진 플라타너스의 가지가 슬픈 듯이 방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목에 변화가 왔듯이 방에도 변화가 온데 놀라고 있는 것일까.


    가운데 문을 열고 옆의 시마 교수의 방을 들여다보니 노교수는 변함없는 자세로 책을 펴놓고 있다. 집기류처럼 무표정하면서도 집기류처럼 어떤 표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쓸쓸하지 않으십니까, 선생님.”


    “응, 쓸쓸하군, 거기에 안군이 있다가 지금이라도 들어올 것 같은 생각이 들 어.”


    엄격해야 할 교수는 겁에 질린 듯한 눈으로 마키를 보았다. 마키는 교수의 그런 부드러운 눈을 아직 본 일이 없었다.


    “나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놓아 버린 것 같은 기분이야. 차차 더 그렇게 느껴 지겠지.”


    “사랑하는 것이 늘 있던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 왜 이리 괴로운지……” “이런 일은 생애에 여러 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대단한 감정의 낭비를 요 구해.”


    교수의 그런 애정이 묻은 말을 아직 들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누이동생의 용태는 어떤가. 그 후” “덕택으로 일어났습니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신문이 나빠. 안 써도 좋을 일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쓸 것이 아니었어. 개인 사정을 과장해서 돌리는 것은 나쁜 풍습이라고 생각해.” “일어나 버린 일은 할 수 없습니다만 사후 처리를 관대하게 해주는 사회의 아 량이 필요하다고 ─ 저는 절실히 생각합니다. 이렇게 박정하게 쫓겨나서야 설 곳 이 없지 않겠습니까. 특히 학문으로 입신하려는 학도는 좀더 동정의 눈으로 받아 들여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민에 대한 학교의 처리를 분개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교수는,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하지만 여하간 박정한 것이 세풍이어서.” 사죄하듯 미안해했다.


    “교수회의 경위를 대체로 들었습니다만, 좀더 이밖에 방법은 없었을까요. 참작 의 여지가 있다고 하면 학원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관대하게 처리해야 하며 교수 상호의 편협한 끝없는 논쟁의 희생이 되는 것은 너무 애석하지 않습니까.” “응, 의견이 서로 달라서. 더구나 각자가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언제나 엄정한 판단은 되지 않아. ─ 결국 당분간 외부에서 안군을 대신할 사람을 부르 게 되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물론 불만이 많아.” “선생님의 주의대로 실력 본위로 가는 것이 어때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 내 실력주의의 패배다. 참으로 한탄할 일이야.” 실망한 듯이 말하는 교수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패장이라는 감이 깃들어 있 다.


    “이미 학문의 전당은 없어졌어. 솔직히 말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곳 일지도 모르지.”


    “이번 사건의 처리는 적어도 우리들 조수 전체에 대한 하나의 협박처럼 생각되 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다만 작은 한 사사로운 일로 키워 온 모교가 자진해서 앞길을 막는 것은 무슨 일입이까. 우리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유린입니다.” “그래, 자네 기분은 잘 알겠어. 그러나 나에게 호소하는 것은 결국 의미가 없 는 것으로 되어 버렸어. 모든 교수를 상대로 해서는 나는 이미 할 방도가 없어.


    내가 혼자 몸을 던져서는 꼼작도 안해. 하나의 힘의 결성체가 이루어져 있어. 불 유쾌한 일이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것이 당당하게 되어 있어.” “…………”


    “안군의 사정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 그 사람 정도의 실력자는 좀처럼 찾 아볼 수 없어. 지금도 그의 논문을 읽고 있는데 참으로 훌륭한 논문이야……그러 나 실력으로는 통하지 않게 되어 버렸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 그런 풍조로 변해 버렸어. 참으로 한탄할 일이야.” “…………”


    “사실은 나도 정이 떨어져 버렸어.” 하나이는 요코의 사건이 있은 후 학교 일에도 태만해지고 우울한 얼굴로 집에서 누워 뒤척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로서도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다. 그런 정도까지의 결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 었다. 영민을 희롱한 것이 요코를 자극하여 격렬한 열정 표현을 하게 하고 마키 를 이렇게까지 격노하게 할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신문에 난 것을 계기로 영민의 앞길에 까지 화를 미치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결과가 훨씬 큰 것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동시에 요코에 대한 사모로 시작된 일이 결국 그렇게까지 되어버렸다.


    사모하는 마음이 큰 만큼 결과는 전혀 의외였고, 결과가 크니만치 고민도 컸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마키의 격노였다. 자기의 영민에 대한 의지가 어떤 것이 라 할지라도 마키가 영민을 위하여 그렇게까지 화를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 다.


    “너의 그런 생각부터가 잘못되어 있어.” 하고 병원의 백양나무 밑에서 공격을 당했을 때의 마키의 말이 가슴속에 새겨져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았다. 이미 피도 눈물도 없다. 순수한 애정은 어떤 경우 라도 어떤 장애라도 넘어서 교류하는 것이고, 그런 애정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며, 존경받을만한 것으로 하나이를 강타했다. 마키가 영민을 그렇게 비호할 줄은 몰랐다. 깨끗하고 순수한 것 앞에서 하나이는 눈이 부셨고 자신을 깊이 부 끄러워했다.


    마키의 일을 생각하고 요코의 사건을 떠올리면서 하나이는 대단히 슬펐다. 무엇 인가 큰 괴로운 진실을 알게 된 것 같은 감이 들어 슬픔이 가슴을 찔렀다. 진실 은 슬픈 것이다. 용서가 없는 엄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대단히 나빴던 것일까.”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비위를 맞추어 주고 싶어지는 것이 오늘과 요즈음의 심정 이었다.


    “모두는 적어도 그렇게 생가하고 있어.” 마침 와 있던 아오키가 숨기지 않고 말하니까, “아아, 살아날 수 없구나.”


    몸부림치듯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알았다면 물론 하지 않았지.”


    라고 무의식중에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뭐야,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면 어떡해.” “나약한 것도 강한 것도 없다. 너무했다고 오해받는 것이 괴로워 못 견디겠 어.”


    “나약한 메피스토펠레스이구먼. ─ 한심하구먼.” “나는 도저히 메피스토펠레스의 인품은 아니야. 악당의 두목이 아니다. 차라리 악당이 되어 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해도 악당이 될 수 없 다.”


    “지금 와서 우는 소리 하지 마. 보기 흉하다구.” “아니다, 앞으로 악당이라고 부르지 말아줘.” “본심도 거기까지 가면 수치를 드러내는 게 돼. 정신 차려.” “ ─ 요코씨에게 미안해. 무어라 해도 미안해.” 모든 본심 중에서 이것이 아마도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고백일지 모른다.


    승부가 끝나고 모든 것이 결정된 오늘날, 아직 요코에 대한 사모의 정은 꺼지지 않았다. 괴로워하면서 누워서 뒤척이는 가슴속에 끊임도 없이 이 감정이 끈질기 게 밀려왔다.


    “요코를 만나서 모든 것을 사죄하고 싶다.” 전혀 거짓이 없는 정직한 기분이었다.


    빛과 그림자


    영민의 뒤를 이어받게 되어 있던 야베 강사가 교단에서 떠나 유유히 유럽으로 떠날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으나 몸 주위의 정리도 다 되고 여권도 나와 출범할 날을 기다릴 일만 남으니 갑자기 신변이 분주하게 되고 밝고 화려한 공기가 주위 에 떠돌았다.


    학부내외의 유지들이 호응해서 후원회를 조직하고 격려, 준비, 송별 등 모든 것 을 계획하며 긴장하고 있는데, 본인도 더한층 마음의 긴장감을 느꼈다, 송별 강 연에 불려나가 격려의 말을 계속 듣다가 빛을 바라보듯 눈부신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도서관의 대기실 등에서 교수들에게 잡히면 늘 양행담의 한 토막을 들어야 했 다. 말하는 쪽에도 먼저 갔다 왔다는 자랑이 있었고 듣는 쪽에서는 한층 더 큰 희망을 가지게 됐다.


    “여기서는 지금 추운 것 같지만 배 속에는 곧 여름이 옵니다. 인도양을 지날 무렵에는 혹독한 한여름, 여기엔 없는 혹서에 며칠 시달리면 문어처럼 녹초가 됩 니다.”


    “런던의 겨울은 늘 흐리고 습기가 많아 그렇게 음산해요. 그곳의 겨울은 섬도 대륙도 우울해요.”


    야베 강사는 런던의 대학에 잠시 적을 두게 되어 있었다.


    “무어라고 해도 로마다. 겨울에서 초봄에 걸친 남쪽 풍물은 무어라 할 수 없을 만큼 좋아. 로마의 봄을 보고 순차 북으로 올라가면 유럽은 아름답고 즐거워.” 곰곰이 이야기하는 이는 로마에 오래 유학한 로마법의 소장교수였다.


    “여름은 스위스, 가을은 파리, 스위스의 산지에는 여름에도 빙하가 흐르고 있 어. 빙하의 능선을 넘고 있으면 계곡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 무지개처럼 아름다 워. 초원의 양떼와 양치기의 노래와 ─ 모든 것이 목가적이야.” 라고 하는 독일어의 조교수.


    “ ─ 3년이나 체재하면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곳은 역시 스위스야. 언제까지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은 시골의 우유 맛. 죽처럼 진해. 막 짜낸 진한 것이 목에서 꿀꺽꿀꺽 소리를 내지. 향기로운 풍미가 입속 가득이 퍼져서 옥수수의 유액을 삼 키는 기분이다. 우유의 제호탕(醍醐湯) 맛이라고나 할까. 그것을 마시지 않으면 유럽의 맛을 몰라. 나는 누구든 먼저 스위스의 우유를 마셔 보라고 권유하고 있 지만 야베군도 잔뜩 그것을 마시고 돌아오게나. 아마 생각의 방식도 달라질 거 야. 서양 문명의 진짜 맛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 긴 술회를 듣고 있노라면 야베 강사는 눈앞에 보여 오는 동경심으로 가슴이 가 득 부풀어올랐다.


    거리에 나가면 선배들의 충고가 있고, 집에 돌아가면 짐 꾸리기로 잡연한 가운 데 기쁨이 넘쳐 있었다. 큰 꿈이었던 것이, 더구나 단지 꿈으로 끝날지 몰랐던 일이 실현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유 있는 광명 속에 있는 듯한 기쁨이었다.


    여러 개의 큰 트렁크에 책과 양복과 늘 쓰던 작은 물건들을 넣고 있으면 그 가죽 상자가 문득 이상한 물건으로 생각되었다. 한 사람의 생활을 그 속에 간단히 집 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트렁크 속에 가득히 즐거운 꿈을 넣으니 이는 둘도 없는 반려로 생각되었다. 서툰 선실에서 또는 계속 바꾸게 될 이국의 숙소에서 이 그 리운 가죽 상자는 생물처럼 말을 걸어올 것이다. 고국의 향기를 잘 간직한 채 가 는 곳 가는 곳마다의 회상의 라벨을 여러 개 붙이면 주인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될 것이다.


    이미 선편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꿈의 트렁크가 여러 개 방에 쌓여 한없는 여 정을 불러일으켰다. 곧 필요한 여행기와 기행문집 등을 읽으면서 여행의 주인공 은 분주한 가운데서도 즐거운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후원회에서는 곧 송별연을 개최할 계획이었다. 당일의 행사를 정하거나 안내장 을 발송하는 일이었지만 학내에서는 아오키 강사가 알선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같은 꿈을 가까운 장래에 두고 있는 그는 동료의 기쁨이 그대로 자기의 기쁨 같 아서 뭔지 모르게 마음이 들뜨고 밝은 기분에 화합되었다.


    마키가 안내장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지만 아오키로부터도 참석하도록 직접 권유 받았다. 아오키들처럼 함께 기쁨에 동참하려고 하면서도 아직 마음속에 무엇인가 끼어 있는 것을 느낀 것은 영민의 심경을 늘 생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당연했을지 도 모른다.


    ─ 마음이 즐거운 자여, 조용조용히 춤을 추어라. 내 머리가 쑤시고 내 마음이 아프다.


    라는 기분이었다.


    송별회 참석을 약속했으나 분주하고 화려한 송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러한 심정에서였고 또 하나 기장 가까운 신변에 일이 생긴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돌연 도쿄의 외숙 다키카와히로토(瀧川弘人[롱천홍인])로부터 전보가 와서 도착 을 알린 것이었다.


    어머니의 오빠인 다키카와는 작은 기업을 경영하고 있어 지금은 불편함이 없는 유복한 몸이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멀리 한국에 보낸 것을 늘 마음 아프게 생 각하고 있었는데 더욱 매부가 죽은 지금은 기회만 있으면 도쿄에 데리고 가서 단 란하게 여생을 보내게 하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터에 최근 요코의 일건 을 듣고 얼마나 놀랐을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온다는 뜻은 대체로 상상이 되 지만 사업을 하고 있는 몸이므로 아무래도 의외였다.


    역으로 마중 나간 마키는,


    “편지도 안 주시고 갑자기 전보를 받고 잠시 당황했습니다.” 라고 하니까 외숙은 처음부터,


    “요코의 용태는 어떠냐.”


    하며 서둘러 물었다.


    예측한대로 요코 때문에 일부러 온 것이다.


    “요코의 일이라면 지금 급하게 오시지 않아도 편지로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터 인데요.”


    어머니 히사코가 무의식중에 눈물짓자, “그런 미지근한 일은 할 수 없어. 내 눈으로 보지 않고는 안심이 안돼.” 외숙은 머리를 흔들었다.


    어릴 때부터 요코를 누구보다 사랑해 왔었다. 조카라고는 하지만 제 자식처럼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귀여워했다 . 자녀가 없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다키카와는 아기가 없는 슬픔을 무엇보다도 괴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부러 미안합니다.”


    어머니보다도 마키는 외숙의 염려를 더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외삼촌.”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고 ─ 요코의 용태는 대체 어떠냐.” 외숙은 초초한 듯이 소리쳤다.


    “팔팔해요. 다행히 생명은 구했습니다. 외삼촌을 만나면 얼마나 기뻐할런지요.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금년은 어찌된해인지 참으로 큰 변이 일어났었습니 다.”


    “도쿄에서도 모두 대단히 걱정하고 있다. 나를 떠밀다시피 전송했어.” “뜻하지 않은 걱정을 끼쳐서.”


    “일어났다고 들으면 안심할 것이다.” “그 애는 어릴 때부터 저런 성질이었어요 ─ 남달리 심한.” “그 성질은 맘에 드나 이번 일은 불찬성이야. 대 반대다. 형편없는 일을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자신도 미안하다고 하고 있어요. ─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다 건전한 인간이 되어 주면 불행 중 다행이겠습니다만.” “그 사내란 것은 어떠냐. 어떤 인물이냐.” “순한, 훌륭한 남자입니다만.”


    영민의 일은 마키가 가로맡았다.


    “─ 보잘것없는 작은 서로의 오해 때문인 것 같습니다. 깊이 서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됐을 것입니다만 ─ 서로 생각하고 있는 사이의 신경이란 바늘처럼 되어 있으니까요.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일이 원인입니다.” “어떤 남자인지는 몰라도 요코만한 아이가 정신을 빼앗기다니. 시시한 일이다.


    흉한 일이야.”


    “흔치 않은 훌륭한 남자가 얼마든지 있다구. 요코의 생각에 나는 불찬성이야.


    반대한다.”


    외숙의 말투에는 무엇인지 몰라도 뚜렷한 심지가 엿보였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마키 모자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는 것 이 었다.


    그리고 다음날, 외숙은 당치도 않은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요코를 데리고 가겠다.”


    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도 쏘이고 양생도 할 겸 따뜻한 도쿄 쪽이 몸에도 좋다.” 요코의 모습이 아직 가냘프고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걱정해서인지 좀체로 물러 설 것 같지도 않고 완고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듯하게 생각하면서도 급작스러운 일이므로 무어라 답변을 할 수 없어 주저하였다.


    “몸을 위해서는 좋다고 생각되나, 거의 밖에 내돌린 일에 없는 애여서요.” “그래서 데리고 간다. 도쿄를 잘 구경시켜 줄 거야.” “도쿄의 학교에 가고 싶어 해도 내놓지 않았을 정도이니까요. 본인은 좋아해도 집에 남는 것은 다만 둘뿐이지요. 이런 큰 집에서 쓸쓸하게 살아나갈 수가 있을 까요.”


    “늘 생각하고 있던 일이지만 언젠가는 도쿄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돼. 이런 먼 곳은 안돼. 산산이 흩어져 있으면 양측 다 모두 쓸쓸하단다.” “마키의 학교 관계도 있고 그리 간단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요코만이라도 이번에 데리고 가는 것이야.” “외삼촌, 좀더 있어야 합니다. 아직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도쿄에 갔다고 해서 본인의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키의 심중에는 복잡한 일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동생을 간단히 보낼 수 없 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일로 볶이고 있는 중이니까 깨끗이 빠져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산뜻이 빠져 나갈 순 없어요. 가는 것만으로 문제가 다 해결된다면 걱 정할 것 없어요.”


    “뭔가, 남자 말인가.”


    하고 외숙은 마키를 쏘아보았다.


    영민의 일을 지적받고 마키도 입을 마물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쪽의 해결이 남아 있는 최대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빼고서는 그밖에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남자의 일 같은 거 아무래도 좋다. 만나면 더욱 더 복잡해질 뿐이야.” “아니, 만나는 것이 좋아요. 곧 상경할 것입니다. 요코도 그것을 바라고 있어 요. 외삼촌도 꼭 만나 주세요.”


    “난 안 만난다. 만날 필요가 없어. 나는 처음부터 반대다. 이런 곳에서 그런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돼. 혼담이라면 도쿄에 얼마든지 굴러다니고 있 어. 요코의 일은 내가 일체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 “외삼촌, 말이 그렇게 되려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혼담이라든가 무엇이든가 는 관계가 없는 일이 아닙니까.”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일체를 떠맡겠다. 내게 생각이 있다.” “외삼촌까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세요. 편견입니다, 외삼촌.” 마키는 자기도 모르게 어세가 강해졌다.


    요코는 참을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기 방으로 달아났다. 괴로운 기분 으로 책상 앞에 털썩 앉아 버렸다.


    “날 어떻게 할 작정일까.”


    외숙이 오신 것을 기쁘게 생각했더니 도리어 쓸데없는 고통을 가져온 결과가 됐 다. 왜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일까.


    “생각이 있어 라고 하셨는데 대체 어떤 생각일까.” 무언가 속셈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냥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닌 것처럼 생각 되었다.


    그렇다. 해도 빨리 영민을 만나고 싶다. 쓸쓸하기도 하지만 만나서 모든 것을 굳혀 버리고 싶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어려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 다. 무언가 장애물이 준비되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모든 것이 싱겁게 이별로 끝 나게 될 것 같았다.


    “영민씨는 지금 어디 계실까. 언제 돌아올까” 마음이 불안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외숙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여 끝내 다음날 밤에 요코를 데리고 도쿄로 출발한 것이었다.


    마키와 요코 자신까지 아무리 고집했지만 들어주지 않고 자기 손으로 요코의 트 렁크를 챙겨 가지고는 무조건 요코를 야행 열차에 태웠다. 어머니와 마키는 외숙 의 기세에 눌린 상태로 다만 방관할 뿐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나쁘게는 안 한다. 만사를 내게 맡겨라.” 그래도 모두 침묵하고 있으니까,


    “잠깐은 쓸쓸하겠지만 그런 사치스런 생각은 하지 말고 요코의 상한 모습을 보 는 게 좋아. 아직도 환자야. 따뜻한 곳에서 충분히 야생하지 않으면 안돼. 얘, 요코야, 정신 차려야 한다.”


    외숙은 혼자서 계속 말을 하다가 떠나 버린 것이었다.


    일진의 광풍이 지나간 다음 같았다. 사랑하는 육친을 보낸 뒤의 집안은 적적하 여 빈집처럼 조용해졌다.


    마키는 특히 동생을 떠나 보내고 보니 주위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랑하는 육친을 신변에서 한 사람 두 사람 잃어버 린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이런 때였으므로 야베 강사의 송별 소동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그 들뜨고 화려한 것에서 자신을 격리하였으며 자기의 세계에 박혀만 있었다. 아픈 머리로 다만 조 용히 마음이 즐거운 자들의 춤을 바라보고 있는 그런 처지였다. 그러는 중에 송 별회의 당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송별회에만은 가려고 생각하며 아오키 등과 함께 해질 무렵에 회장에 나갔다 야베 강사 양행 송별 연회장 ─ 이라고 쓴 얌전한 흰 간판이 세워지고 엄숙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는 곳은 야치요(八千代[팔천대]) 그릴의 입구 였다.


    야치요 그릴이라고 하면 언젠가 영민의 강사 승진을 앞당겨 축하한 장소였던 만 큼 마키는 더욱 감회가 깊은 것이 있었다. 영민의 전축(前祝)은 헛된 기쁨으로 끝났다. 그리고 지금 야베 강사는 더 큰 영광을 받들며 같은 회장에 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과 그날과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구나.


    도열한 사람들과 떠도는 공기에 큰 차이가 있었다. 하얀 식탁에는 누가 마음을 쓴 것인지 여러 가지 색의 꽃이 장식되고 천정에서는 일곱 색깔의 테이프가 무지 개 같았다. 색채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고상한 차림을 한 여자 손님들 은 꽃보다도 밝았으며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사이사이에 끼어있었다. 학교 관계 또는 거리의 친척과 지인들이 각각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빛과 색으로 장도에 오 를 사람의 영광에 꽃을 더해 주는 셈이었다. 행복하고 화려한 향기가 회장의 구 석구석까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영민의 축하식에는 요코 혼자였다. 회상하기도 슬프고 동생과 친구들이 생각나 서 더 가슴이 아팠다.


    송별회가 시작되자 교수 등의 축사가 있었고, 친구들의 격려사가 있었으며 본인 의 답사가 있었다 ─ 식사가 시작되어 테이블 스피치에 들어가니 각자의 유럽 여 행담에 꽃이 피었고 여자들이 즐겁게 웃으며 떠들어 송별회는 유쾌하게 진행되는 것이었다.


    ─ 영민이 때에는 나도 한마디 웅변을 토했었지.


    미키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릴의 주의와 기쁨은 회장에 집중되어 있고 대기실은 불이 꺼진 방처럼 조용하 다. ─ 조용한 가운데 단 한 사람이 소파에 초연하게 빠져 있는 그림자가 있었 다. 분명히 영민의 모습이었다.


    젖는 보도


    영민이가 하치요 그릴에 나타난 것은 안내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상경하 자마자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어가 보니 공교롭게도 야베강사의 송별회장이었 다. 회장 밖의 입간판을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짓궂은 운명에 영민은 놀랐 고 쓴웃음을 지었다.


    송별회가 시작된 후여서 상점의 생기와 빛은 회장에 집중되고 대기실은 조용하 고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카운터에서 키가 큰 흰 복장의 보이다 나타나, “회장은 저쪽인데요.”


    하고 권했지만 도중에서 얼굴을 내미는 것도 꺼림 직했다.


    “아니, 고마워.”


    소파에 몸을 던지니 자신의 그림자가 홀로 보였다.


    “유럽에 가신다고요.”


    회에 늦어서 나서기를 꺼려하는 손님인 줄 알고 보이는 익숙하게 말을 걸어왔 다.


    “대단한 성황입니다. ─ 여자 손님도 많습니다.” “그래.”


    “언제나 높은 분들의 좋은 회합만이어서 우리들도 콧대가 높습니다.” 언젠가 있었던 영민의 회합도 알고 잇는 것일까. 특별히 친한 어조였다.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영민은 보이 앞에서 얼굴도 들 수가 없었다.


    “성함을 말씀해 주세요.”


    하서 참석자의 성명을 기록할 카드철과 펜을 내놓았음으로 곤혹을 느꼈다.


    “됐어, 나는 별도이니까.”


    퉁명스럽게 소리쳐서 보이를 보내는 길밖에 없었다.


    보이가 가버린 뒤에는 회장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한층 더 똑똑하게 울려 와서 화려한 공기가 손에 잡히듯이 상상되었다. 여자들의 소리는 그것만으로 한 터치의 색채처럼 아름다워서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 빛과 그림자와.


    큰 거리를 느끼면서 빛의 저쪽 기슭을 보고 있으니까 더욱더 그림자 속에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회장에서 테이블 스피치의 차례가 가까워질 무렵, 마키는 그날은 말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이렇다 할 준비도 없어 괴롭게 생각하던 끝에 드디어 도중에서 자리를 떴다.


    즐거운 친구들과 여자들과 어울려 공허한 말과 기분으로 괴로운 조화를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잠깐 실례해요.”


    옆자리의 친구에게 넌지시 말하고 살짝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간막이를 돌아서 대기실에 들어가 소파의 사람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작은 탁자 부근에서 담뱃불을 켰을 때.


    “마키군.”


    소리에 돌아보고 비로소 그곳에서 영민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놀랐구나. 누군가 했어.”


    놀람과 기쁨, 달리다시피 다가갔다.


    “장소도 있으련만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마키뿐 아니라 영민에게도 의외였다.


    “알지 못하고 슬쩍 들렸더니─대단한 잔치가 아닌가.” “참을 수가 없어서 나왔어.”


    마키는 깊이 들여 마신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나도 어쩐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 것 같아. 회상이란 괴로운 것이어서.” 이번에는 담배 연기를 들이키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요코는 어젯밤 도쿄로 떠났어.”


    중대한 일은 슬그머니 말을 끄집어내는 것 이상 좋은 것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영민도 뜻밖에 태평한 것은,


    “듣고 왔어.”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역에서 바로 네 집에 들러 모든 것을 들었어.” “그런가.”


    “뜻밖이다.”


    “네가 하루만 빨리 왔으면.”


    “외숙이 왜 그렇게까지 강경했는지 만나서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고집을 부린 거라고 생각해. 따로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큰소리를 칠 수 있는 내가 아니지만 ─ 빨리 돌아왔으면 좋았을 것을. 무 의미한 방황을 해 미안해.”


    저녁.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거리는 쌀쌀하게 추워졌다.


    급격한 계절 변화의 징조였다.


    보도에 면한 상점에서 영민과 마키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렇다 할 중요한 상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낮과는 전혀 별개의 두 사람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만은 심한 비바람 속을 지나온 사람들처럼 평온한 표정이고 서로 요구가 있는 것도, 의견이 있는 것도 아닌 지극히 평화로운 사이였다.


    찻잔의 커피가 마약 같은 향기를 풍기고 음악이 간지럽게 흘렀다.


    “가나의 결혼이군.”


    마키는 벽에 걸린 액자를 오래 전부터 바라보고 있었는데 영민도 그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마키의 말소리로 결혼이라는 말이 분명히 떠오르고 영민은 그 고전의 한 폭에서 일종의 동경에 가까운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빨간 것이나 파란 것을 입고 수줍어하고 있구나.” 머리를 숙이고 있는 원색의 신부의 모습이 고풍의 정감으로 다가왔다.


    “예수는 저 혼인 때에 처음으로 기적을 행했다고 하지 않는가.” 마키도 옛말의 분위기 속에 젖어 버리고 있었다.


    “그래. 일곱 개의 물통에 가득히 포도주를 채웠다지.”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옛말은 모두 아름답지.”


    대답하고 영민은 곧 덧붙여서,


    “아니, 혼인은 아름다운거야.”


    그리고는 그대로 말을 끊었다.


    “혼인의 심리구나.”


    마키는 가나의 혼인에서 눈을 돌리고 차를 마셨다.


    “또 물고기의 심리인가.”


    영민이 미소를 지으니까,


    “물고기는 이미 그만두었어.”


    찻잔을 놓고,


    “심리라는 거, 신비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하나의 분명한 운동 이야. 몸의 움직임과 표정과 함께 변하는 하나의 운동이야. 물고기나 데아드라나 같은 것이야.”


    “물고기도 데아드라처럼 슬퍼하는 걸까.” “그럼 슬퍼하고 말고. ─ 대낮에 맑은 물 그늘에서 꼼짝 않고 정지하여 그림자 를 떨리게 하고 있는 것은, 그건 슬퍼하고 있는 것이야. 암컷이나 수컷을 잃어버 리고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엉터리 그만해.”


    연구 결과다. ─ 물고기에게 슬픔이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단정할 수 없어. 그 러므로 있다는 것이 되는 것이야.”


    “데아드라는 말이다 ─.”


    영민은 그런 일보다는 문득 데아드라의 일이 마음을 조여 와서, “ ─ 자살한 것이야.”


    마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였다.


    영민에게 데아드라는 이미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고 피가 통하고 있는 현실적인 혈족이었다. 마음의 가장 가까이에 있어서 서로 혼이 통하는 연인이기도 했다.


    “나이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달아났다고 해서 형제는 코튜바 왕에게 살해당하 고 그 여자는 자살한다.”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마키는 영민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을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문득 창밖의 소음을 듣고 내다 보니 보도에는 어느 사이엔 가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무거운 눈 조각이 섞여서 ─ 진눈깨비였다. 축축하게 내리는 가운데 준비가 없 는 사람들은 놀라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무수한 구두가 뒤따라 달리고 여 자의 다리가 물고기처럼 기운 좋게 뛰었다.


    “결국 내리는구나.”


    마키는 방안의 정감에서 깨어나 정신없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눈이 진눈깨비라. ─ 축축한 이야기다.” “진눈깨비 내리는 밤이다.”


    영민은 무언지 모르지만 어수선한 기분으로 보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계절도 본격적으로 되는 것인가.” 즉시 보도는 전면이 젖어 버리고 가로등이 반사하여 번들번들하게 빛나기 시작 했다. 빛 가운데를 사람의 발이 그림자처럼 지나갔다. 서두르는 사람도 있지만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비를 밟아 버리는 이도 있다. 그렇게 덤비며 법석대던 것 이 어떻게 저렇게 침착해졌나 하고 자세히 보고 있노라니 어느 사이엔가 비옷을 입고 비신을 신고 있는 것이었다. 겨우 수분 동안에 이런 준비가 된다.


    “인간이란 느려빠진 것 같지만 용의주도하단 말이야.” 영민은 보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말없이 쑥쑥 보도를 지나간다. 심하게 부추김은 당하는 기분으로 영민 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간다.”


    이유를 모르고 망연해 있는 마키를 남겨 두고 급히 의자를 떠났다.


    “어떻게 하려는 거야.”


    “아파트에 가서 준비를 하는 거다.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무슨 일인데.”


    “간다. 나도 간다.”


    급하게 말하고 혼자서 다방을 나서는 것이었다.


    마키는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영민은 젖은 보도를 혼자서 급하게 걸어갔다.


    옷이 젖고 구두가 새는 것도 탓하지 않고 정신없이 걸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밤은 누구나 마찬가지로 괴로운 기분이 드는 것일까.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된 하나이도 그날 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한 기분 으로 방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미닫이는 무겁게 밤 을 싸안고 있었다. 신변에 자질구레한 것들은 트렁크 속에 다 넣고는 가까운 책 상자에서 읽고 있던 책을 두서너 권 잡아 당겼다. 대단히 필요가 있다는 것도 아 니고 다만 가방의 빈곳을 채우려고 이것저것을 간단히 고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느낀 누이동생이 하나이 방에 들어왔지만 하나이는 태연하였다.


    “오빠, 어떻게 할 작정이야.”


    “잠깐 여행하고 올께.”


    오빠가 태평한데 비하여 동생은 의외라는 듯이, “여행? 그런 몸으로 여행을 한다구요.” “따뜻한 곳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온천에라도?”


    “응, 온천은 아니지만 ,곧 알게 돼.” “뭐야, 행선지를 모르는 여행이라니 ─ 걱정돼요. 어머니가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분명히.”


    “네가 잘 말씀드려 줘. 곧 돌아온다고.” 라고 말해 놓고 혼자서 소곤소곤.


    “아무래도 가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의 명령이다. 뒤는 어떻게 되던 지금으로 선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어.”


    라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새삼스레 변경할 수는 없어. 어떻게 해서라도 갔다 오지 않 으면 안돼.”


    동생이 나간 다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짐 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병으로 피로해진 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무엇에 홀린 것처럼 건들건들 움직 이는 것이었다.


    요코가 도쿄로 간다는 것을 아침 잠자리에서 들어 알았다.


    아오키 강사가 야베 송별회에 권유할 겸 그 새로운 뉴스를 가져와 하나이를 놀 라게 한 것이었다.


    “외숙이 무리하게 데리고 갔다는 거야. 그곳에 혼담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없는 것으로도 생각 돼. 안군의 일로 대단히 성을 내고 있었다는 이야기 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탐지했는지에 대해 빠짐없이 전하자 하나이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당황해 하며,


    “그래, 그래.”


    하며 눈을 빛냈다.”


    “그렇게 됐구나.”


    “더 재미있게 되어가는군 ─ 네 감상은 어떠냐” 하나이는 그것에 대답하는 대신,


    “나도 가지 않으면 안돼.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돼.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거야. 이렇게 편안하게 있어서는 안돼.” 라고 마음속에서 깊이 결심하는 것이었다.


    “오명을 쓰고 이렇게 병상에 눕게 된 것은 그 여자를 생각하기 때문이었어. 이 대로 염치없이 물러날 수는 없는 것이다.” 도쿄 행을 결심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어떤 말을 들어도 마음이 약한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미 조용히 누워있는 일밖 에는 없으니까.”


    아오키 강사는 악의 없는 야유를 퍼붓고 갔다. 하나이는 입으로는 내지 않았지 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있겠나. 어떤 일이 있어 도 간다. 어디까지나 이겨야 한다. 승패는 아직이다.” 라고 생각 또 생각. 밤이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다음날 하나이의 실종을 누구보다도 빨리 안 것은 아오키 강사였다.


    가족들이 당황해 가지고 혹시나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아오키도 적지 않게 더듬거리며 도리어, “무언가 그런 태도라도 있었는지요.” 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저런 몸으로 무리를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그것이 제일 걱정입니다. 지금까지 누워 있었거든요. 여간 깊이 생각하지 않 는 한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터무니없는 무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적당히 얼버무려 놓고 학교에 가니 아오키는 마키한테 가는 것 외에 그 수수께 끼를 가지고 갈 곳이 없었다.


    “하나이군도 없어졌다고?”


    마키는 거듭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놀라움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로 도쿄일 것이라고 짐작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아오키의 추측이 마키에게는 의외였다.


    “그건 또 왜.”


    “어제 아침 내가 요코씨의 일을 말해 버렸어. 깊이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는 데 그때 이미 결심이 서 있었는지 몰라.” 마키는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수수께끼를 내놓을 차례였다.


    “실은 안군도 어젯밤부터 없어지고 지금 곤란한 상태야.” “안군도?”


    “고향에서 상경하자마자 어제 하루 만났지만 밤에 갑자기 떠난다고 하면서 진 눈깨비 속으로 나가 버렸다 . 아파트에 갔더니 이미 없었어.” “그럼 도쿄다. 두 사람 다 도쿄다. 불을 보듯 명백해.” 아오키는 즉석에서 석연하게 말했다.


    마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오키의 말을 들으니 그새로운 사실 에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다 같은 곳에 모이면 이것은 또한 귀찮게 될 것이다.” 아오키에게는 두 사람의 행선지가 자기 일처럼 걱정이 되었다. 하나이 혼자 때 의 경우와는 문제가 다르게 된다. 영민의 사정까지 들은 아오키는 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지금쯤은 같은 기차 안에서 머리를 맞대로 있을지 모르고, 가령 기차가 다르 다고 해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어. 생각하면 믿음직한 놈들이 다. 그 기개는 상을 줄만해.”


    떠벌이는 아오키와는 반대로 마키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딴사람의 일이 아니고 그리고 평범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늠름한 분노


    “어떻게 되었어. ─ 정말 다시 태어난 것 같네.” 라고 자작부인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온천에서 돌아온 소희는 사람이 확 달 라져 있었다.


    그처럼 영민의 일로 열중하고, 탄식하고, 법석을 떨던 소희가 지금은 천연덕스 럽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표정이구나.” “그래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슬퍼하는 것은 시시한 일이니까. 저 건망증에 걸리기로 했어요. 모두 잊어버렸어요.” “그러나 잘됐다. 언제까지 눈물을 짜고 있으면 어찌할까 생각했었다. 단념하는 일이 중요하다.”


    “나 소희는 어디까지나 울어서는 안돼. ─ 슬픔 끝에 분노한 것이야. 분노한 것이다. 분노는 그만. 교만하게 되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마음이 안정되었어 요.”


    “그래, 교만하게 되는 것이 좋아. 무엇이든 경멸할 수 있으니까.” “상계에서 마음껏 하계를 경멸해 주겠어요. 뭐 이 벌레들, 이라는 식으로. ─ 마치 이 창에서 저 거리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자신 있는 듯이 말하기는 했지만, 물론 지는 것이 싫어서 하는 억지이고 자포자 기임에 틀림이 없었다.


    산속에서 영민에게 최후까지 냉랭하게 취급되고, 슬퍼하고, 괴로 워하고, 어린 애처럼 울어댔던 것이다. 온천 숙소에서 또다시 보기 좋게 내 팽개침을 당했을 때에는 큰 모욕을 느끼고 비통한 나머지 홀연히 분노가 밀려왔다.


    자신이 비굴함을 부끄러워하고 상대를 거꾸로 경멸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엄하 게 책망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에 남아 있는 분노를 깨끗이 청산하 고 상대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기가 싫어서 하는 억지이고 자포자 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심기는 일전하고 지금까지 완전히 영민을 경멸 하고 원수처럼 미워할 수 있었다.


    “너같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좀 봐주었더니 기어오르며 기고만장해있어. 자 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


    그렇게 저주하고 있으니 자연히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원래의 심정으로 되돌아갔다. 백장미처럼 부드러웠던 처녀의 마음을 실로 야차


    (夜叉)처럼 강한 것이었다.


    “영민은 여자의 뒤를 따라서 도쿄까지 갔다는 소문이야.” 어머니가 소문을 전하여도,


    “나는 천하태평이예요. 평민들이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지요. 이쪽과는 신분이 다르니까.”


    실은 자작부인도 이로써 겨우 안심하게 된 것이다. 딸이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어찌할까 그것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렇게 깨끗하게 말을 들으니까, 지금까지의 마음 고생도 날아가 버리고 오랜만에 기분이 편안해 졌다. 얌전한 딸의 마음 어느 구석에 그런 강한 체념의 기백이 숨어있었는지 불 가사의하기까지 했다.


    “민망할 정도로 허리를 굽히고 이쪽의 체면을 다 버린 것이 분해서 못 견디겠 다.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너무도 자존심을 손상시켰다고 생각해.” “어머니 때문이예요. 어머니 쪽이 열심이었어요. 나는 끌려 다닌 것 이예요.


    그렇게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분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을 어미 탓으로 돌리고 교활하구나.” 라고 했지만 딸이 말한 것이 진짜이고, 또 옳은 것인지도 몰랐다. ─ 자기 의지 보다도 다른 사람의 의지로 움직이고 충동을 받은 애정이었으므로 지금의 분노와 증오가 이렇게 심함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한때의 악몽이었다고 생각하면 돼.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터이니까.” “기껏 경멸하고 미워하며 본때를 보여 주는 거예요 ─ 그저 애교부린 셈치고 잠시 평민을 대한데 불과해요.”


    미련 없이 말을 해치우는 모녀의 마음은 맑고 매우 명랑했다.


    경멸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일까 ─ 라고 느끼면서 마음의 큰 변화에 참 말로 놀라고 있었다.


    물론 진짜 마음 바닥 깊은 곳은 모녀라 할지라도 알지 못하고 신만이 알 수 있 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소희가 표변하는 모양을 눈앞에 보고 혼자 기뻐하는 것은 최철이었다.


    나도 이것으로 겨우 안심하게 되었어요. 어울리지 않는 곳까지 따라간 아가씨의 만용에는 아찔했어요.”


    과연 뒤에서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는 듯이 아첨하는 말투였다.


    “참, 안됐어요.”


    소희의 무관심을 참지 못하고 더욱더 얄팍한 소리를 낸다.


    “영민이도 영민으로 무례한 놈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건방 진 태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기 처지도 모르는 아니꼬운 놈입니다.” “당신 친구지요. 나쁘게 말할 것은 없지 않아요.” 자기도취로 말한 것이 소희의 예리한 한마디로 최철은 쩔쩔매는 형편이었다.


    “아닙니다. 건방진 녀석입니다. 따님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상해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당신 친구의 일을 내 앞에서 그렇게 나 쁘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따님의 교제 상대권 안에 영민을 유인한 것이 저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책임 을 느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더 말할 것 없어요. 지나친 참견이지요.” 이 말을 듣고 최철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뚝 말을 끊었다.


    “……저 저는 따님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따님에 비하면 영민은 같은 사람, 축에도 못들 사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제 그만.”


    냉정하게 밀치니 최철은 가슴을 찔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희의 표정하나, 말 한마디에 남몰래 기뻐하기도 우울해지기도 하는 것이 요즈음의 최철이었다.


    마음의 밑바닥에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할 비밀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 했는지 소희에 대한 짝사랑이 그것이었다. 부인의 부탁으로 할 수 없이 영민을 추천하고 되어가는 상황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한순간 도 느긋이 마음을 쉬게 할 틈이 없었다. 다행히 영민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을 알고 내심 기뻐했지만 영민이 대신에 자신을 세우지 못하는데 끊임없는 괴로움이 있었다. 영민에 대한 소희의 분노와 증오를 불 보듯이 간파할 수 있어도, 그렇다 고 해서 당장에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없고 몸을 돌려서 잠 입할 마음의 틈을 소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분위기를 타고 자 기도 모르게 말이 많아지고 넌지시 의향을 떠보아도 어느 사이엔가 밀려나고 말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사람은 김성준 뿐이었다.


    “어때, 잘될 것 같은가. ─ 분에 넘치는 야망이라는 것이야. 어찌했던 잘해 보 는 것이 좋을 거야.”


    라는 말을 듣고는 싸늘하게 괴로운 얼굴로 변하는 것이었다.


    특히 영민에 대한 마음을 청산한 소희는 단정하게 몸을 굳혀 더욱 접근하기 어 렵게 되었다. 거리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하여도 그것에 응하지 않고 늘 쌀쌀히 거절당했다.


    하루는 최철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왔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무엇이나 담대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해도 좋은 것으로 생 각했다.


    언덕 위의 불빛을 보고 달려 올라가 마음대로 현관에 들어섰다.


    부인은 구관에 있는 듯, 소희는 혼자서 악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영민이 녀석 여자에 열중하여 드디어 먼 도쿄에 가버렸어. 행복의 파랑새는 먼데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어. 바보 같은 녀석.” 중얼거리고 있다. 그 경솔한 태도에 소희는 정색을 하고 돌아보았다.


    “영민과 나와 어떻게 다릅니까. 요만큼도 부족한 점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놈 만이 행운을 차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나 나도……” “무얼 이야기할 생각이예요. 단정치 못한 모양새로” 엄하게 큰소리를 듣고 뜨끔했지만 용기를 내서 그 여자 옆으로 달려갔다.


    “나 나도 영민이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영민이가 먼 곳에 가서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도 쓸데없이 먼데서만 방랑하고 있어요. 더 가까운 곳에서 찾아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바로 눈앞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파랑새는 언제 나……”


    “그 방자한 태도는 무엇이야. 실례야. 도대체 이 집을 무어라고 생각하고 그런 건방진 말을.”


    “당신은 언제나 차가워요. 사람을 깔보면서 옳게 바라보지도 않아요. 영민에게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들면서 나에게만 고통을 주라는 법은 없어요. 나도……” 가까이 가려던 생각이었으나 정신을 차려 뒤로 물러났다. 호되게 뺨따귀를 맞은 것이다. 소희는 심히 노하여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등이 당긴다.


    “고용인 신세에 사람을 능멸하려고 해. 나가 주세요, 빨리 나가 주세요” “…………”


    “더 일이 없어, 이 집에서 나가 줘요. 뭘 그렇게 멍청하게 있어. 일없다니 까.”


    최철은 술도 대번에 깬 기분으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치자 갈 피를 못 잡고 있었다. 무분별과 실수를 부끄러워하면서 생각 보다 완강한 처녀의 분노에 놀라고 있었다. 정말 지금까지의 소희는 아니 있다.


    최철의 일 등으로 소희는 집안에 싫증이 나고 주변이 시시하게 생각되었다.


    숙원의 외국 여행을 앞에 두고 생활환경을 바꾸어 보겠다는 욕망이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현재에 대해서는 이미 아무런 매력도 없었고 생활 속에는 신비가 사라 졌다. 신비가 없는 생활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말라 버려서 멋도 없고 극도 로 심심한 생활이었다.


    꿈은 미래에 있다. 몸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해야만 마음에 약 간의 생기가 돈다.


    즐거운 여행을 앞두고 회화 연습을 겸하여 영사관을 방문하는 것이 거의 일과처 럼 되어 있었다. 외국 가정 중에는 색다른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 서먹서먹한 분위기 중에 도리어 일종의 친근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꿈을 찾는 마음의 절절 함에 의한 것이었다. 싫증나는 우리 집에 공기에서 도피하는 것처럼 그 색다른 분위기 중에 뛰어들었다.


    스미스 부인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면서 정성어린 환대를 했다.


    “전번 파티에는 나오시지 않아 모두들 섭섭했어요.” 다정하게 웃으면서 자기 일은 내팽개치고 대해 주는 것도 기뻤다.


    “당신의 한복을 볼 수 없어서 모두 아쉬워했어요. 한복을 입은 여자 분들의 모 습은 참 멋이 있으니까요.”


    “그건 아쉬웠습니다. 다음번에 꼭 입고 오겠습니다.” “꼭 입고 오세요. ─ 우리 엘렌에게도 만들어 주려고 해요. 미국에 입고 가서 모두를 놀라게 해준다며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 것을 보고 잘 연구할 생각 이예 요”


    부인은 소희와 동연배의 딸 엘렌이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소희는 부인보다도 엘렌과 친한 사이였다. 이 집에 가면 대체로 먼저 엘렌양 방을 노크한다. 둘이서 사이좋게 놀고 있는 동안에 어느 사이에 부인이 와서 한 사람이 늘어나는 그런 것이었다. 엘렌양은 오는 봄에 상급학교 진학 때문에 본국에 돌아가게 되어 있었 다. 미국을 돌아 유럽에 가게 되어 있는 소회하고는 거의 같은 일정이므로 마침 좋은 동반자가 되리라는 예상이 둘을 더욱 가까이 만들었다. 같은 꿈, 같은 그리 움을 안고 아마도 이 세상에서는 가장 친한 사이일지 몰랐다. 자매처럼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계획하고 상담하기도 하였다.


    “당신의 옷이라면 내가 만들어 드릴게요. 색과 모양만 말해 주면 딱 맞게 만들 어 드릴 터이니까.”


    “고마워요 ─ 그 대신 당신의 드레스는 내가 만들지요.” 엘렌양은 기뻐했다.


    “─ 실은 당신이 준 사진, 그것을 본국의 오빠에게 보냈더니 아름다운 모습과 의복이라고 하면서 찬미해 왔어요. 나도 이번에 한복을 입고 오라고. 그래서 만 들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요. 그런 모습의 사진을 보냈다니 부끄러워요. 좀더 좋은 사진을 드렸으 면 좋았을걸.”


    “욕심쟁이. ─ 당신 참 미인이예요.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려요. 한복을 입고 미국에 가면 얼마나 예쁠까. 다회에서도 야회에서도 틀림없이 인기가 있을거예 요. 사교계에 치고나가서 한국의 미를 크게 자랑하는 거예요.” “참, 말도 잘하셔. 추켜 주어도 속지 않을 거예요.” “정말이예요. 나 여기 와서 오래 되었지만 당신처럼 예쁜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어요. 무어라고 말하면 좋을까, 결국 동양적인 미 ─ 라기보다 한국 적인 미 ─ 부드럽고 품위가 있는 미, 그것이 당신이예요. 쭉 같은 재를 타고 여 행한다는 것은 지금부터 큰 즐거움의 하나.” 말을 듣고 사양은 하지만 역시 기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소희는 엘렌양이야 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리한 인상이지만 부드러운 적당한 이지미는 소희가 부러워하는 점이었다. 그런 엘렌으로부터 칭찬 을 받는 것은 그것만으로 기쁨이 배가했다. 그 여자와 함께 여행하는 것은 소희 에게야 말로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스미스 부인은 숨은 식물학자로 여가 시간이면 교외에 나가기도 하고, 먼 산에 까지 수집에 나가 수백 종의 신발견의 주인으로 초본과 식물을 표본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남편인 영사와는 다른 취미 생활에 몰두하면서 자랑스러움을 느 끼고 있었다. 표본이 많아지면 모국의 학계에 보내서 스미스 부인의 이름이 붙은 여러 개의 신종을 발표하고 있었다.


    소희에게도 이따금씩 수집한 표본을 보이면서 자랑스러운 듯이 분류하고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이번에 새로 발표한 신종이에요.” 부인은 목본과 표본을 한 개 골라내어 뉴욕에서 최근에 막 도착했다는 얇고 큰 식물잡지를 펴는 것이었다.


    “동백의 일종이지만 보통 것과는 달라서 잎도 꽃도 작고 향기가 아주 강해요.


    비슷한 것으로 종류는 많지만 그 어느 것과도 조금 달라요. 미국에 가서 감정을 받아도 결국 신종으로 정해졌어요. 자 이걸 봐요.” 하며 손가락으로 지적한 잡지 한 군데에 신종 스미스이아 슈도카메리아라는 원어 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는 것이었다. 어떠냐며 자랑스러운 듯 부인이 웃고 있었 다.


    “오대산 산기슭에서 발견한 건데 일면에 아름답게 피어 있는 숲의 아름다움에 얼마간은 그저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지요. 채집 상자 안에 표품을 많이 따 넣었 었는데 긴 여행으로 완전히 말라서 귀중한 꽃도 대부 분 떨어져 버렸어요. 아까 웠어요.”


    엘렌양은 어머니의 좋은 조수였다. 산동백의 별종의 표본을 여러 장 꺼내어 비 교 대조하면서 차이점을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꽃은 작고 진홍색이며 아주 귀여워요. 가지도 많아서 그 부근을 향기로 가득 차게 하지요. 씨는 검게 빛나는 작은 알갱이. 손가락으로 다치면 확 산 냄새가 나요.”


    설명을 들으면서 소희는 문득 어렸을 때에 들은 민요 중에서 읽은 적이 있는 저 귀에 익은 산동백의 일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물론 부인의 연구는 그런 상식의 경 지를 훨씬 넘어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손쉽게 말하면 당신처럼 예쁜 꽃이예요.” 부인은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이 말을 빠르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본국에 스미스이아 슈도카메리아를 보내고 이번에 또 당신을 보내게 되 면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자랑을 세계적으로 발표한다는 것이 돼요. 내가 가장 영광으로 여기는 바이지요.”


    무슨 겉치레 말일까 생각하면서도 고의가 아닌 부인의 태도에 호감이 가 그래도 기쁜 기분이었다.


    모녀가 각별히 자기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소희가 때때로 영화에 초대할 때에 엘렌양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기분 좋게 응하여 주는 것에서도 알았다.


    “어디선지 잊었지만 당신의 트러블 들었어요.” 어느 날 밤, 함께 거리로 가는 도중 엘렌양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영민과 의 일을 이야기하는 줄 알고 소희는 간단히, “아아, 그 일 ─ 이미 잊어버렸어요.” “그러는 것이 좋아요. 하찮은 일에 매달리는 것은 좋지 않아요. 당신의 인생은 미인이니까 앞으로 더욱더 훌륭한 꿈이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의 인생은 지금부 터라구요.”


    소희도 동감이란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은 오랜 옛날 일인 듯이 그것을 회 상하고 있었다.


    산다화(山茶花)


    같은 계절이면서도 도쿄는 서울보다 훨씬 따뜻하였다. 눈이 내릴 듯이 흐릿한 날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부드럽게 따뜻한 산다화가 그런 향기에 알맞으며 거리 의 화원을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산다화가 꽃혀 있는 방에서 꽃을 바라보며 요코는 잠자리에 들어갔다. 외숙 다 키카와에게 이끌려서 도쿄에 간 그날부터 어딘지 모르게 피로를 느껴 계속 자리 에 누워 있었다. 여행의 피로에서 온 가벼운 감기 같은 것일 것이라고만 생각하 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쇠약해졌으며 편도선까지도 부어서 몸이 굳어 일어날 기력도 없었다. 숙모인 치요코(千代子[천대자])는 걱정이 되어서, “여보, 당신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은 아니예요.” 하고 넌지시 남편을 탓했다. 고집을 부려서 무리하게 요코를 데려 온 것을 문책 하는 것이었다.


    “따뜻하니까 몸에 좋을 것 같아서 생각났던 것이야. 저쪽 겨울은 무척추워.” 다키카와도 말을 들으니 막상 걱정이 되어서 말소리도 작아졌다.


    “좋다고 생각한 것이 저렇게 나쁘게 되면 하는 수 없지요 ─ 그냥 피곤이나 감 기는 아닌 것 같아요. 사랑스러운 것은 좋은데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예 요.”


    “무어, 당신. 곧 일어날 거야.”


    “태평스런 말을 할 수 없어요. 빨리 손을 써야지. 신체의 일처럼 알 수없는 건 없으니까요.”


    치요코도 물론 남편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요코가 좋았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 런 만큼 누구보다도 마음에 걸리고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요코의 어머 니 히사코에게는 어떤 편지를 써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의사를 부르자고 해도 걱정 없다고만 하며 본인이 듣지 않을 기색이고 무엇인 가 손을 쓴다고 해도 경과를 보고 있을 밖에는 없을 거야.” 라고 말하면서도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몰래 혼자 요코방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숙모는 여간 걱정하는 것이 아니야. 빨리 일어나도록 해야지. ─ 일어나면 아 타미(熱海[열해])나 하코네(箱根[상근])에 데리고 갈 거야. 모두 함께 간다.” “걱정 마세요, 저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해요. 이 방에서 언제까지나 이렇게 누 워 있겠어요.”


    요코는 외숙 앞에서 왠지 모르게 비꼬아 보고 싶어져서 성난 것도 아니고, 질투 도 아니고, 가볍게 상대방의 기분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요코는 도쿄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 모르지.” 외숙의 미안한 듯한 부드러운 소리를 들으면 요코는 그렇다든가, 그렇지 않다든 가 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도코노마(床の間[상の간])에 놓인 산다화를 응시한다. 그 조용한 자태가 내심 몹시 후회하고 있다는 인상을 외숙에게 주는 것이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요코에게는 남모를 기쁨이었다. 외숙이 어머니나 저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렇게 앞뒤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데려오고 지금 겨 우 잘못을 깨닫게 된 듯한 부드러운 표정이 기뻤다. 발라맞추는 기분일지도 모른 다. 아무에게도 좋으니 많이 발라 맞추어 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의 줄이 가느다 란 소리를 내게 당겨져 있었다.


    “나빴었다. 내 마음대로 일을 해치워서.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거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외삼촌. 가만히 누워서 무엇인가 생각에 몰두하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해요.”


    빨간 꽃잎, 짙은 남색의 잎이 빛나는 산다화의 인상이 방 가득히 퍼져있었다.


    그 신선한 빛 중에서 요코는 감상에 젖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큰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자기 감정을 과장하고 치장하는 것이 무언지 모르게 즐거웠다.


    “안돼 안돼, 그런 약한 소리를 하면 . 생각에 몰두하는 것은 몸에 나빠. ─ 마 치 유리 같지 않은가. 약하고 가늘고 위험해서.” 외숙은 기운을 차리도록 하라는 말을 하다가, 문득 소매 속에서 요코의 가늘고 흰 팔을 보고는,


    “아니 그 가는 팔은. 유리가 아니고 아스파라거스다. 어느 사이에 그렇게 쇠약 해졌으니. 무서울 정도로 말랐어. 안되겠다. 원기를 내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사실 놀란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저렇게 말라 있었던가. 저런 정도까지였다면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심상치 않다는 공포감에 질리면서 처음으로 자기의 경 솔함을 깨닫고 책임에 떨었다.


    그리고 요코의 겨드랑에 끼어 있던 체온계를 뽑아서 빨간 선 위에 올라간 수은 주를 들여다보면서,


    “8도 6부. 점점 올라가기만 하지 않느냐. 이래선 안돼. 의사를 불러야지. 싫다 고 해서는 안돼. 무리해서는 안돼.” 체온계를 놓고 당황하여 방에서 뛰어나가는 것이었다.


    외숙의 그런 모양을 보고 요코는 처음으로, 그럼 또 병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차 차 몸의 열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다키카와가가 있는 교외를 달리는 전차 중에서 영민은 오늘도 또 하나이와 만나 고 말았다. 갈아타고 구석에 있는 자리에 앉았을 때 앙ㅍ에 와 선 것이 하나이였 다. 저쪽에서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듯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위를 본 영민이,


    “뭐야, 또 만났구나.”


    하고 중얼거리니 하나이도 처음으로 알아보고, “아, 놀랐다.”


    하며 어깨를 떨었다.


    “또 함께 인가.”


    더럽게 재미없다는 듯이 눈을 돌렸다.


    “내가 네 뒤를 쫒고 있는지 네가 내 뒤를 쫒고 있는지 도대체 어느 쪽이냐. 빌 어먹을.”


    하나이가 중얼거리니까 영민도 영민대로 서로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누가 누구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야. 우리 둘은 각각의 의지와 발로 제 마음 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불과해. 이상하게 그게 일치해 버린다. 네 시간이 내 시간 이고 내가 탄 전차 중에 기적같이 언제나 네가 타고 있다는 전말이다. 완전히 엉 터리없는 일이다. 나도 이 우연을 증오해.” “내가 미워하는 것은 물론 지금은 네가 아니고 이 우연이다. 매일 매일 그것이 다. 그리고 오늘도 내가 탄 이 전차 안에 문득 네가 있어. 무어라고 할 중첩되는 해학인가. 사람을 희롱만 하고 있으니 이상한 운명이 어처구니 없다고 할 수밖에 없어.”


    “자, 앉게나.”


    마침 옆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영민은 서 있는 하나이를 앉으라고 권했다.


    “매일 매일 정해진 일과다. 너도 피곤할거야. 앉는 편이 득이다. 전차가 오래 걸리니까.”


    말하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싶을 만큼 뜻 모를 수상함이 솟아오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요즈음 며칠간의 우연이 연속이 비통한 경계를 넘어서 지금은 이미 한 줄기의 유머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우연의 일치는 두 사람의 출발의 시점에서 시작되어 있다. 두 사람 모 두 그렇게 될줄 모르고 각각 어떤 기분을 안고 진눈깨비가 내리는 밤에 따로따로 서울을 떠났을 터인데, 기차 안에서 생각지도 않게 만났을 때에는 둘 다 깜작 놀 라 버렸다. 다 아는 비밀을 품고 기차에서 기선으로 , 다시 기차라는 식으로 옆 자리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여행을 계속한 것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다음날 요코 의 거처를 찾아서 교외 전차를 탔을 때 거기서도 또 둘은 만난 것이다.


    모르는 척하고 찾아낸 것이 다키카와가였던 것이니, 이미 그 이상 서로 비밀을 싸 감출 도리는 없었고 어느 쪽이라고 할 것 없이 싱글벙글 하였지만 그 후의 결 과도 두 사람에게는 같았고, 다키카와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완고히 집안에 들어 오지 못하게 했다.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한 모양으로 어슬렁어슬 렁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또 같은 전차 안에서 두 사람은 이번에는 끈질기게 서로 침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매일 찾아가고 둘 다 나날의 계획을 조금씩 바꾼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같은 시간에 같은 전차를 계속 타게 되고 다키카와가에서 얻은 성과 도 같은 실패의 반복이었다. 아직도 요코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고 실패의 고 배를 계속 마시고 있었다.


    요코를 두 사람에게 만나게 하면 고생해서 도쿄까지 끌어온 효과가 없어 진다는 생각을 굳힌 다키카와는 절대 두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오게 하지 않는다고 결의 하고 있었다.


    “요코는 여기 없어.”


    라고도 하고,


    “온천에 양생하러 갔어.”


    라고 거절하기도 하면서 굳은 요새는 절대 함락하지 않는다며 금성철벽(金城鐵 壁)의 견고함을 자신했다.


    다른 방도가 없는 두 사람은 같은 일과를 반복하면서 지금은 상당히 힘이 빠져 있었다.


    “백번 찾아가는 것은 좋으나 어찌 보면 적의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는 것 같 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 적이 아니고 다키카와야말로 공동의 강적이었던 것이다.


    얄궂게 되었다.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고 지금은 다만 공동의 적 에 대한 작전을 협의하고 실패를 탄식하는 두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함락시켜야 해. 덩치 큰 두 남자가 결탁해 가지고도 패배한 다면 치욕의 극치이다.”


    “저 영감 대단한 고집쟁이여서 젓가락에도 몽둥이에도 걸리지 않아” “그러는 동안에 항복할 것이 뻔해. 우리들의 이만큼의 성의가 통하지 않을리가 없어.”


    달리는 전차 안에서 적, 동지는 참말로 평화롭게 웃고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는 사이좋은 자기편 동지처럼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결과도 전날의 결과의 반복이었다.


    현관에 나온 다키카와는 두 사람의 사이에 동요하기는커녕 그 집요함에 도리어 성을 내버렸다.


    특히 그날은 요코의 병 때문에 걱정하고 있던 그때여서 불안하던 기분에 마침내 노기가 발동하였던 것이다.


    “너희들은 참으로 집요하구나. 요코를 만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영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개하고 싶은 것은 도리어 자기들 쪽이었다.


    “그것을 위해 멀리 해협을 건너 왔어요. 만나면 무엇이 나쁘다는 것입니까. 당 신이 중간에 나설 필요는 없어요. 요코씨에게 그렇게 전해 주기만 하면 돼요.” “내가 전 책임을 지고 데려온 요코야. 멋대로 하는 짓은 허락할 수 없어. 너희 들을 만나면 다시 번민 속에 끌려들어가서 괴로워할 뿐일 것이야. 저렇게 앓고 쇠약해져서 누워 있는 것을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끈질기게 와 가지고 한번 더 괴롭히려고 하는 건가. 정말 부끄러움도 모르는 녀석들이군.” “당신하고는 말이 안돼요. 쓸데없는 일을 해서 도리어 그 여자에게 고통을 주 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요. 무엇이든지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우리들이 만나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래도 모르는가. 그 애가 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모르는가.” 다키카와는 드디어 발로 마루바닥을 쾅쾅 울리면서 큰소리로 꾸짖었다.


    “왜 병이 도졌다고 생각하는가. 얼간이들, 썩 물러가. 빨리 없어져.” “벼 병에 걸렸습니까.”


    병이라는 말을 듣고 하나이 등은 놀라서 급히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군. 너무 조용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언제부터 어디가 아픈 것입니까.” “아무래도 좋아. 시끄러우니까 빨리 없어져 버려.” “안되지요.”


    그렇게 되면 영민에게는 하나 더 고집을 부릴 이유가 생긴 것이다.


    “병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이대로 얌전히 물러설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렇다 고 왜 빨리 말해 주지 않았어요. 요코는 당신에게만 중요한 사람이 아니예요. 누 구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어요.” “제멋대로 구는 놈이군.”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만나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하나이는 더 쓸 수단이 없다고 보고 빌기 시작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정말로 면목도 없습니다.” “조만간 또다시 올 우리들입니다.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버티지 못할 것입니 다.”


    “아니야, 최후까지 너희들과 싸우겠다. 나도 지기는 싫다. 자, 이젠 나가달라 고.”


    다키카와는 보통 완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두 친구는 거의 내쫓기듯이 콘크리트 바닥에서 추방되었다. 뒤에서 유리문이 드르륵하며 닫혔다.


    “별난 놈이다. 우리의 완패인가.”


    “창피하게 다시 돌아가는 건가.”


    두 사람은 울음이 터질 정도로 괴로운 얼굴이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잠시 마당 앞에 망연히 서 있었다.


    ‘처치 곤란한 놈들이군.”


    불평 실린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키카와가 들어왔을 때, 요코도 잠자리에서 현관 에서 있은 언쟁을 대충 듣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시끄러워요─거의 매일.” “시골서 올라온 별 볼일 없는 녀석들인데 아무리 일러주어도 알아듣질 못하는 구나.”


    “외삼촌.”


    요코는 조용히 불러 놓고,


    “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 외삼촌이 나빠요.” “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확실하게 감으로 알아요. 그 젊은 사람들의 사정을 외삼촌이 그렇게 무턱대고 거절하는 법은 없어요. 며칠이나 걸려서 일부러 왔는데 불쌍하지도 않아요. 저는 만나도 좋다고 생각해요.”


    “무슨 소리야.”


    “두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확실히 알고 있어요. 현관에서 한 말이 분명하게 들 렸거든요. 제가 가만히 있었지만 뛰어나가서 두 사람을 들어오게 하고 싶을 정도 였어요.”


    “그래, 들었느냐.”


    외숙은 고개를 끄덕이고 ─ 그러나 확실한 어조로 “─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해. 양쪽 모두를 위하여 한 일이다. 새삼스레 만나게 하면 점점 더 헝클어져서 네 몸에 해가 될 뿐이다.” “틀려요. 만나지 않으면 도리어 내 병이 재발할거예요.” 이것 또한 발라맞춤이요, 사랑스런 협박이기도 했지만 외숙 입장에서는 들어 넘 길 수 없는 말이었다.


    “억지를 쓰는 것은 좋지 않아. 내가 정당했어. 곧 알게 될 것이야.” 달래는 보지만 요코는 아무리 해도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요. 안돼요, ─ 저 슬퍼서 울 거예요.” 그리고는 이불을 머리까지 획 덮어 버리는 요코였다.


    외숙은 곤란해서,


    “이봐, 요코 정신 차려야해.”


    하며 머리를 긁적이다. 문득,


    “그렇다, 의사가 올 시간이다.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지.” 일어서서 뜻도 없이 그 부근을 어슬렁거렸다.


    잠시 후 의사가 왔다.


    대충 진찰을 끝내고 자세를 고친 다음, “보통 감기 같지는 않습니다. 요즈음 돌아가고 있지만요.” 도구를 챙기면서,


    “편도선이 부어 있고, 무엇보다도 심히 쇠약해 있습니다.” “얼마간 심한 병을 치룬 후라서요.” 외숙은 무심히 말실수를 하고,


    “어떤 병을 앓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는 갑자기 대답이 궁해졌다.


    “……그렇습니다. 잘못하여 병 속의 독을 마신 것입니다.” “이거, 안되겠어.”


    의사는 침착하면서도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이거, 안되겠어.”


    의사는 침착하면서도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해독은 곧 잘 되었습니까.”


    “겨우 생명은 구하였습니다만 심히 약해져서요. 아직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이런 병이 생겼습니다.”


    “외삼촌, 말씀 그만 하세요. 부탁입니다.” 요코는 듣기가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숙이고 말을 멈추었다.


    “앞으로 하루 이틀 경과를 보기는 하겠습니다만, 이 정도라면 혹시 입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네, 지금은 좀 말할 수 없지만 내일쯤이면 증상이 확실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오늘밤 열이 또 올라갈 것입니다만 너무 걱정 마시도록.” 의사는 집을 나가면서 다키카와 부처에게 세세한 간호 상의 주의를 하는 것이었 다.


    피와 피


    다음날 다시 한 번의 진찰로서 요코는 할 수 없이 입원하게 되었다.


    가을 이래 계속 병을 앓고 있던 형편으로 요코는 싫으면서 거의 끌려가는 꼴이 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면목이 없었고 병원이 쓸쓸한 데는 넌더리가 났었다.


    “아무도 좋아서 입원하는 사람은 없어.” 집에서는 대단히 먼 시내 한가운데 있는 병원이어서 외숙은 늘 옆에 붙어서 간 호하도록 하였다.


    “괜히 입원을 권한 것은 아니다.”


    다키카와가 혼자 있을 때 의사는 그에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 ─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병입니다.” “어떤 증상인지.”


    “패혈증인 것 같습니다.”


    “그건 또.”


    “한주일은 걸릴 것입니다. 걱정할 것은 없어요. 열심히 겨루어 보겠습니다.” 말을 안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라고 다키카와는 생각하였다. 병명을 들으니 더 욱 걱정이 되고 겁이 나서 밤에도 안심하고 잘 수가 없었다.


    “응, 요코야 쓸쓸하지.”


    “아무렇지도 안해요. 익숙해져 있으니까.” “서울의 오빠를 불러 줄까.”


    요코를 위로할 심산도 있었지만 자기의 걱정을 어느 정도라도 줄여 보자는 심산 도 있었다. 뭔지 모르게 위험스러운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병이 그렇게 심하게 될 것 같아요.” 요코가 민감하게 언외의 뜻을 알아차린 데 곤혹을 느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 분주한 편이 힘이 될 듯싶어서 그런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 두 사람을 부르는 것이 어때요.” “뭐야, 아직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었느냐. 곤란해.” “오빠도 물론 부르고요.”


    “요코, 욕심쟁이.”


    외숙은 즉시 넌지시 마키에게 전보를 쳐 놓았다.


    그래도 마음이 급했던지 마키는 이틀 만에 뛰어왔다.


    요코의 상태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남모르게 외숙을 문책하고 싶은 기분 도 있었다.


    마침 링거주사를 놓고 있을 때에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으므로 동생의 극심하게 수척한 몸을 보고서는 가슴이 조이는 듯한 느낌이 일어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정맥이 파랗게 투시되는 가는 팔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지은 것이었다.


    “야, 너 다시 앓으려고 도쿄에 온 것은 아니지.” 마키의 말에 외숙은 책임을 느끼면서,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좀더 조용히 집에서 누워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덤비면서 여행 같은 것을 하 는 것이 아니었다.”


    동생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외숙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용서해 주렴. 틀림없이 곧 좋아질 것이다.” “어머니는 걱정되어서 데리고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몸이 이런 상태여서야 …….”


    “곧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외숙에게 미안하다고 느낀 요코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없을 때 마키는 동생에게, “영민들을 만났느냐.”


    하고 물었다.


    “아니요, 아직. 둘이서 집으로 매일 찾아왔는데 외삼촌이 막무가내로 만나게 해주지 않았어요. 얼마나 불쌍한지.” “안 만난다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이까지 왔고 다 고스란히 모이게 되면 안성맞춤이다. 이때 모든 것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좋다.” 영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몇 번이고 찾아간 효과가 겨우 나타나 병원에서 요코를 만나게 된 것이다.


    “마키군, 너까지 와서 겨우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얄궂은 일이다. 네 외삼촌은 천하제일의 완고옹이야.”


    “너희들이 열심인 데는 감복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미안하게 생각한다. ─ 요코는 또 병이 들었다. 인생은 도망의 연속이다. 언제 앞이 보일지 아직은 암흑 속이다.”


    마키는 영민에게도 하나이게도 지금은 대단히 미안하다는 기분이 강했다. 두 사 람을 앞에 놓고 혼자 고개를 숙였다.


    요코의 용태는 악화할 뿐이어서 영민도 하나이도 지금은 열정의 대상으로 보다 도 병에 대한 걱정이 커져 가고 있었다.


    대상에 대한 감정의 내용이 달라지니 서로간의 기분의 자세도 자연히 달라져서 두 사람은 이견 사이가 좋은 친구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쿄에 온 이래 뜻하 지 않게도 이상한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키카와에 대해 공동전선을 펴면서 부터 여지없이 동지가 되었고, 지금 또 요코의 병 때문에 서로 적성을 나타낼 짬 이 없었던 것이다. 병실에서는 마키와 셋이 만나면 아주 평화스럽고 친한 사이였 다.


    매일 두 사람이 꽃을 가져다가 요코의 베갯머리를 장식한다. 요코는 두 사람이 함께 붙어 있는 상황 하에서는 누구와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 알지 못하고 오직 아무 말 없이 날마다 변하는 두 사람의 꽃의 색을 비교하거나 향기를 비교 하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꽃을 응시하는 눈에 빨갛게 열이 나고 느 리게 빛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꽃그늘에서 시시각각으로 악화되고 쇠약해질 따름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고열로 심하게 신음한 다음 날, 심한 쇠약으로 의사도 방법이 없어 마키와 상담 을 하였다.


    “링거나 강심제만으로는 당할 수가 없는데요.” “적당한 방법이 있다면 따라야지요.” “어쨌든 원기를 더해 주지 않으면 병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뭐든 말씀하시는 대로 합시다.”


    의사는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수혈보다 더 좋은 방법은 좀 없는데요.” “수혈입니까.”


    의학의 지식이 부족한 마키는 앵무새처럼 되받아 반복하고는, “그럼 부탁 합니다.”


    하고 간단히 결정하고,


    “한 시각이라도 빨리. ─ 지금 어떻습니까.” 그 자리에서 실행 하게 되었다.


    영민들도 다키카와도 한자리에 모여 있던 때였으므로 모두 있는 그 자리에서 즉 시 시행하는 것은 그만큼 여러 사람에게 마음 든든한 일이었지만 “헌혈자를 찾아야만.”


    이라는 의사의 말에 마키는 갑자기 당황해지고 말았다.


    “아무라도 좋지요.”


    영민이가 나서자.”


    “좋기는 좋은데요.”


    “그럼 제 피를 뽑아 주세요.”


    “나도 좋아.”


    이번에는 하나이가 영민을 밀어치우듯이 말했다.


    “ ─ 너무 많아서 곤란할 정도로 피가 있으니까 많이 뽑아 주세요” “혈액형이 까다롭습니다.”


    “검사해 주세요.”


    두 젊은이들은 경쟁이라도 하다시피 자기 먼저라고 힘을 냈다.


    “생각은 감사하지만 너희들을 괴롭힐 것까지는 없어.” 마키는 처음으로 수혈의 절차를 알아차리고, “ ─ 나도 외삼촌도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어느쪽이든 혈액형이 맞겠지.


    맞지 않을 리가 없어.”


    의사는 유쾌한 듯이 웃으면서,


    “4,5백 그램 정도 뽑으면 쑥 혈색이 나빠지며 비틀비틀하게 됩니다. 자, 누가 제일 건강하고 혈액형이 맞을까.”


    농담으로 말하고 간호부에게 분부하여 세세한 준비를 시켰다.


    엄숙한 의식에라도 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모두들 의사의 손만을 응시하면서 긴장해 있었다.


    의사는 태연히, 냉정히, 그런데도 손놀림은 섬세하였다. 생명의 신비를 취급하 고 있다는 명예에서이겠지만 엄숙한 미소와 같은 것이 늘 입언저리에 떠돌았다.


    오비엑트 글라스에 A형, B형의 표준 혈청을 떨어뜨리고 요코의 귀 뿌리에서 취 한 혈구를 그 두 쪽에 섞어서 A형에 대한 반응으로 쉽게 B형이라고 단정할 수 있 었다.


    “B형이라, 대략 그렇게 예측은 했었지만.” 의사의 자신 있는 듯한 말투였다.


    “B형의 수혈자는 O형 및 B형인 사람으로부터 수혈을 받는 것이 득 ─ 입니다.


    그러므로 A형이나 AB형인 사람으로부터는 안됩니다. 자 여러분 중에서 O형이나 B 형인 사람을 골라내면 됩니다.”


    B형인 요코의 혈관 속에 4인 중 누군가의 같은 형의 혈액을 수혈하려는 것이었 다.


    대체 누가 같은 형의 소유자일까. 각각 흥미를 가지고 긴장한 가운데 그 작은 운명의 선언을 기다리면서 과학의 방법을 응시하고 있었다.


    따로따로 설치한 오비엑트 글라스 위에서 마키의 혈구는 B형에서 응집하여 A형 임이 밝혀졌다.


    다키카와는 A, B 모두와 응집하여 A B형이었다.


    ─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집안사람들의 피야말로 같은 형이어야 하고 잘 맞아 야 할 터인데도 이렇게도 지리멸렬한 것은 웬일일까.


    마키는 실망하고 외숙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 같아야 할 피가 과학의 분석 앞에서는 간격이 있고 오차가 있는 오빠 동생이 라고 해도 타인인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어떤 의미인가.


    “미안하지만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마키는 영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나이는 제일 먼저 의사 앞에 나갔으나 마키와 마찬가지로 A형이었다.


    남은 것은 영민 뿐 이었다.


    의사는 이 최후의 한 사람에게 흥미와 긴장을 표하고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응 시했다.


    ……물론 하나의 우연이고 그 의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언지 모르게 준비되어 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실내의 놀람과 기쁨은 컸다.


    혈액은 틀림이 없는 것, A에서 응집하고 B에서는 신선한 액상을 유지한 채로 유 동하였다.


    “틀림없이 B형이다. A형도 O형도 아닌 같은 B형이다.” 의사가 개가를 올린 때에는 영민은 얼굴을 붉히며 기뻐했다.


    “요코의 피 속에 내 피가 섞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몸을 구하는 것이 다.”


    은밀한 승리의 기쁨이었다. 하나이 등 세 사람과 경쟁해서 최후의 한사람으로 선택된 것이다. 보통의 암호로서는 너무도 이상하다. 이 결과의 배후에 무언가 신비한 의지를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 영민은 글라스 위의 신비를 앞에 놓 고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


    “다행이다. 아무도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다른 데서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의사도 겨우 안심이 되어 서둘러 주사기를 꺼내어 수혈은 곧 시작되었다.


    “걱정 없습니까.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아요.” 강심제를 맞고 흰 팔에 파랗게 솟아오른 정맥에 바늘이 꽂혔다. 굵은 유리관 속 에 잠시 동안에 이백 그램의 검붉은 피가 흡입되었다.


    그것은 그대로 온기가 있는 동안에 요코의 정맥 속으로 옮겨졌다.


    영민은 핏기가 쑥 빠지며 얼굴이 파랗게 변하는 것을 느꼈지만 자기 몸 속의 생 명력이 같은 양 그대로 요코의 몸속으로 심어진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원기가 솟아났다.


    “잇따라서 조금만 더”


    한꺼번에 양이 과다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요코의 몸 상태를 고려하여 의사는 결 심하고 수혈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다른 주사기로 이백 그램의 피를 더 채취하니 영민은 비틀하면서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의자에서 녹초가 되었다.


    “고맙습니다.”


    마키는 누이동생의 일보다도 지금은 영민이가 마음에 걸려 가까이 가서 가지고 온 포도주를 권했다.


    한 번에 한 글라스를 마셔 버리니 엷게 핏기가 올랐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요코를 돌아 보니 그쪽에서는 포도주 이상의 효과가 있는 듯 생기있는 눈을 반 짝이고 있었다. 딴사람의 생명을 나누어 받고 조금 열이 있음에 틀림이 없이 열 기가 서린 얼굴이었다.


    “덕택으로 살았다.”


    마키가 여러 번 말하고 있을 때 다키카와도 다가와서, “무어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 대단히 감사합니다.” 감사와 미안한 감이 섞인 감정이어서 다키카와는 사실상 당혹해 하고 있었다.


    풀리기 시작한 완고한 마음이 겨우 영민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코는 다음날부터 달라 보일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마치 한 개의 위험한 경계선을 완전히 넘어 버린 듯한 감이 있었다.


    의사도 자기의 공로인 듯이 기뻐하여 병실의 공기는 밝아지기 시작 했다.


    새로 꽂힌 꽃 아래서 영민은 처음으로 요코와의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 다.


    “드디어 둘만이 되었네요.”


    오랫동안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요코의 소리였다.


    마키는 잠시 자리를 떠나 있었고, 하나이는 수혈 이후 무엇을 꺼리는 것처럼 얼 굴을 내미는 일이 훨씬 적어졌다.


    지금은 정말로 둘뿐이었다.


    “정말로 꿈 같아요 ─ 덕택으로 이렇게 원기가 있어요.” “하나의 우연이지요. 단순한 우연을 나는 더없는 자랑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 니다.”


    영민의 말속에는 명백히 하나이에 대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과 같은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하나이이고 다키카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공동전선 을 펴온 하나이였다.


    “그 우연 같은 거 아무래도 좋아요. 나는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 예요. 그 우연을 지나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것 ─ 그것이 흡사 꿈같아요.” 영민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자, 요코는 조금 말수가 많아졌다.


    “물론 우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정해 져 있었지만 우연히 그것을 마침내 또렷하게 해준 거예요 ─ 하나의 계기가 된거 예요.”


    “…………”


    “알고 있어요. 하나이씨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 그러나 내 입장에 서 보면 지금도 처음도 마찬가지예요.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그대로 감정의 흔들 림이 없거든요.”


    “나는 더 욕심쟁인 줄 알고 있었는데 ─.” 왜 이렇게도 표현력이 없을까, 라며 영민은 자기가 부끄럼장이임을 속상해했다.


    태양 아래서는 전혀 표정을 잃어버리는 동양인의 비애를 남모르게 중얼거리고 있 는데 다키카와가 불시에 들어왔다. 기쁜 듯한, 분 한 듯한 묘한 감정으로 다키카 와를 응시하였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다. 나는 이미 쓸데없는 놈인 것 같구나.” 온화한 미소에 영민도 미소로 응답하고, “천만의 말씀. 저야말로 앞으로 여러 가지 수고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완고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깊은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말하는 방법이 묘할지 모르나 당신의 그 뜨거운 성의를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었 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요코의 결심이 시종일관 굳은 것이었으므 로 나같은 것이 더 이상 늙은이의 수치를 노출시킬 것도 아니다. 언젠가 불찬성 이라든가 반대라든가 말한 것은 그건 내가 성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요코에 대한 사랑도 당신의 그것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이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너무 제 맘대로 말씀드려서.” “이미 피의 결혼을 마친 두 사람이다. 이 이상은 다만 행복이 영원하기만을 기 도한다. 사랑에는 관념도 구분도 없다. 그것들을 넘어서 두 사람사이의 영감이라 고 할까, 신비라고 할까, 그런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린다 ─ 사실은 나도 지 금에야 그것은 깨달았지만.”


    “외삼촌, 이번에 또 서울에 오세요, 네.” 다키카와는 요코에게 크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봄은 푸르게


    그로부터 수일 후, 도쿄를 떠난 시모노세키(下關[하관])행 급행안에 마키와 하 나이가 있었다.


    같은 차 같은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지금은 사이좋은 2인객이었다.


    동생의 회복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빨라 머지않아 퇴원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일 체를 외숙과 영민에게 맡겨 버리고, 마키는 예정을 조속히 바꾸어 하나이이와 일 정을 맞추었다. 하나이를 위로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쿄에서 말하고 또 말한 것을 기차 안에서도 되풀이하려는 마키의 마음씀이었 다.


    “……네게는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 이번만은 모든 것을 요코의 의지에 맡겨 주게나. 그 밖에 길은 없구나.”


    “이번만. 그런 건 없다. 한 번으로, 그리고 이것이 최후다.” “그래, 그 한번을 부탁하고 싶다.” “부탁이고 나발이고 있는가.”


    하나이는 역에서 산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몇 잔을 연거푸 마셨으므로 관자 놀이 부근이 벌써 연하게 붉어져 있다.


    “한잔 어때.”


    마키도 잔을 받고 조용히 마시면서,


    “발자크인가 누군가가 망각의 필요를 주장한 것 같은데, 나는 단념해버리는 것 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다. 큰 단념 없이는 인생을 살아나갈 수 없어라고. 슬픈 말이지만 최후의 진리이다.”


    “말하는 것만큼 멋없다. 그런 것 누워 떡먹기다, 단념하는 것 정도는.” 술잔으로는 만족 못하고 술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나팔을 불 듯 마시면서, “아무리 해도 인생은 헤어지지 않으면 안돼. 누구나 모두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으니까. 어딘가에서 조만간 헤어지도록 되어 있어. 나는 나의 길은 가려고 한 다.”


    “그렇게 이해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나. 네 훌륭한 태도에는 머리가 숙여질 뿐 이다.”


    “그런 일 이젠 아무래도 좋아. 끈덕진 것은 네 쪽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 하고 있다고 보나.”


    하나이는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 병을 무심코 들어 올리고는 조용히 바라보았 다.


    “위스키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어. 이 위스키, 왜 이렇게 싱거운가, 시비를 하 고 싶어졌다. 위스키는 좀더 독하지 않으면 안돼. 독하지 않은 것은 위스키가 아 니야. 먼지 냄새가 확 나고 목 가득히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면 안돼. 나는 위스 키의 맛을 잘 안다. 아무리 해도 나를 속일 수는 없어.” 말하면서 병을 기울였다.


    “그렇게 마셔도 되는가. 무리하지 말아, 너.” 마키는 놀라서 병을 빼앗는 것이었으나 이미 병 속에는 한 방울의 위스키도 남 아 있지 않았다.


    거의 같은 시간에 병실에는 영민이가 함께 있었다.


    마키와 하나이가 한 조가 된 것처럼 두 사람은 거의 붙어 있다시피다.


    요코는 침대에서 일어나 영민의 어깨에 기대어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유아처럼 뒤뚱거리는 걸음이었다. 앞으로 수일간으로 다가온 퇴원 날짜를 기다 리고 있었다.


    영민은 시험 삼아 요코로부터 떨어져 벽 부근에 서서 이리 온, 이리 온을 한다.


    요코는 열심히 불안한 걸음걸이로 걸어와서 영민의 손을 붙잡는다. 작은 감격과 흥분의 소리가 일시에 일어난다.


    “결국 잡았어요. 이젠 놔주지 않아요.” 영민도 요코의 손을 꼭 잡고 그 여자를 도와서 침대 쪽으로 돌아간다.


    “나도 더 이상 우물쭈물하지 않을 생각이요. 자, 이처럼 확실히 꽉 잡고 있으 니까.”


    요코는 손 위에 얼굴을 얹고,


    “슬픈 일이 하나 있어요.”


    “무엇.”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왜 더 빨리 이렇게 되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


    “그건 욕심쟁이라는 거죠. 무어라도 좋아요, 이렇게 된 것만, 이것만으로 이미 나는 정신없이 기쁘지요.”


    “그래두 처음부터 결론은 내려져 있던 거죠. 더 빨리 결론과 마찬가지로 되면 좋은데 쓸데없는 옆길에 들어서기도 하고 방랑하기도 하고 해서 시시해요.” “쓸데없는 옆길에 들어가고 방랑을 하고 하는 것이 인생이죠. ─ 라고 생각하 면 좋지요. 어떤 일이든지 간단히 되는 것은 없어요.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겨우 하나의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세상에 흔한 일이니까요.” “그럴까요. 저는 욕심쟁이.”


    “그렇구 말구요. 큰 욕심쟁이.”


    간지럼을 당하고 요코는 상체를 비틀며 시트 위에 픽 쓰러졌다.


    퇴원하는 날, 다키카와는 상이라고 하면서, “온천에 가자.”


    하고 나와 일가가 함께 오랜만에 행락에 나섰다.


    따뜻한 남쪽 공기 속에서 요코는 무럭무럭 회복해서 사람이 달라질 정도로 풍족


    한 혈색을 되찾았다.


    “앓고 나서 도리어 뚱뚱해지가 시작했어, 요코야.” 숙모 치요코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세를 졌습니다, 숙모님. 매우 신경을 많이 쓰시게 해서. 정말 이번에 외삼 촌과 함께 서울에 오시지 않으면 저 은혜를 갚을 도리가 없겠어요.” “응, 가구 말구. 두 사람이 집을 가지게 되면 꼭 갈께.” 온천지에서 돌아왔을 때, 요코는 팔팔해서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동경하고만 있던 도쿄를 처음으로 유유히 구석구석까지 볼 수 있었다.


    “꼭 새해를 함께.”


    라고 하는 외숙의 말을 받아들여 정초까지 있기로 했다.


    영민의 입장으로서도 아직 상처가 생생한 고전장에 가기보다는 넓디넓은 대도시 그늘에서 좀더 느긋한 날을 보내고 싶었으며, 요코도 원래 같은 마음이어서 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꺼릴 것 없이 태평하게 뛰어 돌아다녔다. 서울에 돌아와서 버젓한 식을 올릴 때까지의 날을 될 수 있는 대로 길게 숨기며 즐기려는 생각도 있었다.


    2월도 다 지나가려는 어느 날, 시마 교수로부터 생각지 않은 편지를 받지 않았 다면 두 사람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마음 놓고 언제까지나 모든 것을 잊고 있었음 에 틀림없었다.


    친전이라고 쓴 좀 두툼한 봉투를 공손히 열면서 과연 영민은 입가에 미소를 떠 올렸다.


    “뭐예요.”


    요코는 답답해하며 바싹 옆으로 다가온다.


    “뜻밖의 일을 말해 왔어요.”


    “좋은 일, 나쁜 일?”


    “나쁜 일은 아니예요.”


    “좋았어요. 빨리 말해요. 뭐예요,” 라고 말하고는 벌써 얼굴을 직접 가지고 와서 펴놓은 서면을 쏘아보고 있었다.


    “일자리를 주선해 왔어요.”


    “아아, 감사해.”


    “이제 새삼스럽게 일자리 같은 거 갖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S전문 아니예요. 갖고 싶다 안 갖고 싶다 라지만 사치예요. 아아, 기뻐요.” 요코는 편지를 거의 독점하고 열심히 읽어 내려갔다.


    ─ 너에게는 여러 가지로 미안했다. 마음으로는 진력을 다했는데 역부족으로 그런 졸렬한 과거를 가져온 것은 아직도 내가 비겁했던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젠가도 말한 것처럼 인생은 긴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이 아니다. 아직 남은 날은 길고 기회는 몇 번이고 달려온다. 나는 최후까지 너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학문에 대한 신념과 주의는 네가 이미 알 고 있는 대로이다. 학부로 복귀할 적당한 기회가 발견될 때까지 시간 보내기 로 잠깐 직업을 가지는 것이 어떨까. 다행히 S전문 문과 교실에 교수 자리가 비어 있다고 하기에 내가 직접 찾아가서 너를 추천하여 승낙을 받았다. 쉽게 된 것은 아니다. 곤란한 절충을 거듭한 끝에 겨우 동의를 얻었다. 작지만 내 고생을 생각하여 네 뜻에 맞던 안 맞던 잠시 가 주기 바란다. 상담할 일도 있 으니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기 바란다. 그곳에서의 요코씨와의 일 성공하기를 함께 기도 한다 ─


    라는 뜻의 편지였다.


    “무어라 친절한 헤아림일까요. 이런 선생님을 가진 당신도 행복해요.” 요코는 편지에서 얼굴을 들고 눈시울을 적실 정도였다.


    “정말. ─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공부 많이 해서 은혜를 갚을 거예요.” “당신 해주시지요.”


    “응, 그저 만연하게 공부하는 것도 긴장이 안되니까.” “아아, 기뻐.”


    요코는 편지를 가지고 외숙의 방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영민들은 낯이 익어가기 시작한 도쿄를 뒤로하였다.


    외숙들의 격려의 말을 기쁘게 들으며 용기백배한 두 사람이었다.


    긴 기차 여행 끝에 연락선이 왔다.


    육지 여행에 피곤해진 두 사람에게 바다는 무어라고 할 수 없는 신선한 것이었 다.


    한번 당황해서 건넌 해협을 오늘은 충족한, 여유 있는 기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었다.


    비꼬였던 것을 푸는 생각이 들며 다만 그것만으로도 상쾌했다.


    항구를 떠나서 수 시간이 지나니 망망한 앞바다에 이르렀다.


    오전에는 바다가 조용했고 넓기만 한 감청색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무한한 파란 것 위에 눈을 돌리니 얼굴이 함께 보라색으로 물들 것 같았다. 선미 에서 부서지는 물결의 조각들이 조개껍데기처럼 희게 흩어졌다.


    “지도를 보면 그렇게 좁은 해협인데 이렇게 넓어요.” 요코는 넓은 바다가 파래서 피곤해졌다는 모양이었다.


    “뭐라고요, 배가 느린 거예요. 더 빨리 달리면 순간에 가버릴 수 있어요. 눈을 감고 느긋이 누워 있어 봐요. 깨면 거기가 해안일거예요 ─ 해협은 역시 좁아요.


    하늘 높이서 내려다보면 틀림없이 띠 정도의 폭밖에 안될 것이 틀림없어요. 마치 지도에서 보듯이.”


    “이상해요. 좁게도 생각되고, 넓게도 생각되니.” “어느쪽이든 사람의 생각 하나에 달려 있어요 ─ 넓을 것이라고만 생각하니까 형편에 맞지 않는 착오가 다가오죠. 당장에 우리를 방해한 것이 이 해협이었어 요. 불손한 해협이었어요. 그러나 좁다고 생각하고 경멸했어요. 우리는 지금 이 렇게 둘이서 이것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알았어요. 마침내 우리가 해협을 정복한 것이지요. 아아, 유쾌했어요.” “시 한 구 없을까요. 이 상쾌한 기분.” “정말 노래라도 부르고 싶어요.”


    “이런 건 어떨까요 ─ ‘우리 오늘 맑아서 돌아가는 바다 위’.” “‘우리 오늘 맑아서 돌아가는 바다 위 ─ 그렇군요. ‘우리 오늘 맑아서 돌아 가는 바다 위’ ─ 그렇군요. ‘우리 오늘 맑아서 돌아가는 바다 위’ ─ 어머, 언젠가 하나이씨가 부른 시구예요. 작년여름, 한강에서. 봐요, 불렀지요.” “그런가요. 아아, 하나이군의 것이든 누구의 것이든 좋아요. 젖어서와 맑아서 는 대단히 다른 것이니까. 오늘은 맑으니까 말이지요. 이렇게 파랗게 맑아.” 다음날 아침 영민들의 배가 부산 부두에 옆으로 닿았을 때에 벌써 해협을 되돌 아갈 다른 연락선이 출범 준비를 끝마치고 부두의 안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실에 타려고 하는 선객들이 삼삼오오 부두에 모여 서 있었다. 그 중에 외국인 남자와 맑고 귀여운 한복차림의 여자, 사람들의 눈을 끄는 귀여운 두 사람의 한 쌍이 있었다.


    스미스 영사의 딸 엘렌과 소희였다.


    외국 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은 요코하마 출범의 아메리카 항로에 늦지 않도록 전날 서울을 떠난 것이었다. 모두 어머니와 함께 왔으나 먼저 둘이서 선착장에 와 본 것이었다.


    “바다가 처음이어서 무언가 무서워요.” 소희가 나약한 소리를 하니까 바다에 익숙해 있는 엘렌양은 질책 하듯이, “이런 좁은 해협 아무것도 아니예요. 시골뜨기같이 겁내지 말고 마음을 크게 가져요. 며칠이고 며칠이고 갈 태평양이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 그런 곳에서도 배멀미하지 않아요.” “여기 올 때는 조금은 괴로웠지만 이번에는 멀미 안할 생각이예요.” “강심장 같은 말만 하네요.”


    “정말 걱정 없어요.”


    자신이 있는 듯이 단언하고,


    “스미스이아 슈도카메리아양. 정신 차려요. 지금부터 대단히 큰 곳에 가려고 하는 것 아니예요.”


    서로 킬킬거리면 초콜릿의 은박지를 벗기면서 비교적 원기 있는 두 사람이었다.


    선실을 나와 많은 사람에 섞여 트랩을 내려선 영민들은 수십 미터 앞의 화려한 색채를 알아차리고 문득 피곤한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요코는 무심코 인파 중에 우뚝 서서 정직하게 탄성을 쏟았다.


    “미국 처녀다. 틀림없이.”


    영민과는 다른 방향을 보며 요코는,


    “나는 이쪽의 한복을 입은 사람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참으로 아름다운 옷이 예요.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처음이예요.” “그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단연코 아름다워요. 나도 한번 저런 옷을 입어보고 싶어요.” “쉬운 일이예요. 서울에 돌아가면 빨리 한 벌 주문할까요.” 하고 말하며 걷기 시작한 영민이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서버리고 말았다.


    “뭐야, 소희가 아닌가.”


    “네.”


    요코도 짧게 소리치고 새삼스럽게 눈앞의 소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놀랐어요. 언젠가 말이 있던 옛말속의 자작의 딸이라니.” “참으로.”


    “정말, 옛말에 나오는 영아처럼 아름다워요. 백장미 같아요. ─ 어디가는 걸까 요. 둘이서 함께.”


    “외국에 가는 거예요, 틀림없이. ─ 자, 우리를 보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요.


    아, 좋았어요. 들키지 않았어요.”


    “아름다운 사람이예요. 당신 그래도 후회 안 해요.” “무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바보같이.” 영민은 거친 숨을 쉬었으나 문득 치밀어 올라오는 웃음에 요코와 얼굴을 마주치 고 킬킬거렸다. 요코에게 처음으로 바보라고 한 소홀함이 어쩐지 우스웠다.


    소희는 영민들을 보지 못한 채 이렇게 두 사람은 자연히 이별하게 된 것이다.


    신록을 맞이한 일요일.


    이미 직장을 가진 영민에게 일요일은 가장 즐거운 날이 되었다.


    요코는 오랫동안 바라고 있던 새로 만든 한복을 입고 ─ 오늘은 두 사람 모두 희희낙락하며 기뻐했다.


    식을 올린 지 한달, 적은 새둥지 같은 작은 집을 가지고 즐거운 꿈에 젖어 있는 요즈음의 내외였다.


    “오늘은 나 오직 홀로 그 새로운 모습을 응시하고 있고 싶어요. 어디가면 좋을 까요.”


    영민은 잠시 생각하고,


    “그렇다. 비원에 갑시다.”


    마침 그곳에 근무하고 있는 한 사람의 친구에게 연락을 부탁하여 두 사람은 간 단히 그곳에 들어갈 허락을 받았다.


    왕가 일족의 유원(遊園)이었던 사방 십리가 넘는 원내의 작은 축도였다. 홍진의 속세를 떠난 이 별천지에는 푸른 계절이 제전(祭典)처럼 펼쳐져 있었다. 수목도, 계류도, 오솔길도 오래되고 단아하지만 새로웠다. 궁인들이 달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고 하는 육각정을 지나 산속의 오솔길을 헤치며 들어가니 풀의 무더움에 섞여 꿀 냄새를 피우는 꽃향기가 은은히 흘러왔다.


    “……나 아까부터 계속 묘한 착각을 하고 있는데 ─ 마치 집의 여동생과 함께 걷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 불시에 돌아보면 당신이예요.” “옷 때문일까요.”


    “그런 것 같아요. 옷이 달라진 것만으로 사람마저 달라진 느낌이 들어요. 묘하 단 말 이예요.”


    전혀 처음 보는 것인 듯, 몇 번이고 요코를 보았다. 이상한 발견이라도 한 것 같은 눈 표정이었다.


    “─ 요컨대 우리들은 서로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어요. 혈액형도 같았고, 지금 신체의 모습도 같아요. 다른 것은 다만 단체뿐이예요. 전통만이 달랐어요.” “그런 어려운 말은 그만해요 ─.”


    요코는 가로막았다.


    “어때요, 내 옷 소희처럼 고와요.” “묻지 않도록 될 일이죠 ─ 당신은 완전해요. 무엇을 가져와도 바꿀 수는 없어 요. 사람이 오랜 시간을 두고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은 완전 이외의 아무것도 아 닌 거예요.”


    라고 말하며 영민은 나무 그늘의 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하루는 사람 사는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서 나 혼자 그 완전을 확인해 보 려고 해요”


    양치의 잎에 미풍이 불어 가고, 작은새가 단풍나무 끝에서 지저귀었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는 고원(古園)의 오후의 정적은 끊임없는 애정의 말을 나누는 두 사람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국민신보 1940년 1월 7일, 원제는 『綠の塔』 ─ 정창희(鄭昌熙)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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