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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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날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15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 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 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 시는 앞집 마마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학교(東光 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십전 , 둘째 번에 오십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치 않은 일이 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십 전짜리 백동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 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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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청산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13
연애의 청산[淸算] (1회) 1 김형식의 출옥할 날은 가까워 온다. 고려 공산당 청년회 사건으로 평양 복 심 판결에서 삼년 징역을 받을 때엔 아모리 각오한 노릇이로되 눈앞이 캄캄 하였다. 스물 한 살이면 한창 좋은 인생의 봄철이 아닌가. 빛나는 이 청춘 의 한 토막을 이 세상 지옥에서 썩고 배겨낼까. 삼 년이면 일천 구십 오일! 이 숱한 날짜가 과연 지나갈 것인가? 이 아득한 시간의 바닷속에 떠올라보 지 못하고 아주 잠으러 버리지나 않을까. 그러나! 쇠창살 너머로도 해는 뜨고 졌다. 까마득하던 삼 년도 지나는 갔 다. 인제 이레만 더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하면 갈데없이 만기의 날이 닥쳐 오고야 만다. 그까짓 삼 년쯤이야! 그는 코웃음을 치게 되었다. 출옥을 하 면! 그의 몸과 맘은 벌써 자유로운 세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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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부자 | 백신애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11
하나 남았던 그의 어머니마저 죽어버리자 그대로 먹고 살만하던 살림이 구 멍 뚫린 독 속에 부은 물같이 솔솔솔 어느 구멍을 막아야 될지 분별할 틈도 없이 모조리 빠져 달아나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어찌된 심판인지 경춘(敬 春)이라는 뚜렷한 본 이름이 있으면서도 ‘택부자’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 한 것이다. 이왕 별명을 가지는 판이면 같은 값에 ‘꼴조동이’, ‘생멸치’, ‘뺑 보’라는 등 그리 아름답지 못하고 빈상(貧相)인 별명보다는 귀에도 거슬리 지 않게 들리고 점잖스럽고 그 위에 복스러운 부자라는 두자까지 붙어 ‘택 부자’라고 별명을 가지는 편이 그리 해롭지는 않을 것이건만 웬일인지 불 리우는 그 자체인 경춘이는 몹시 듣기 싫어하였다. 동리에서 그래도 학교나 꽤 다니던 젊은 아이들도 ‘택부자’라면 성을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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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비 | 김유정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8
음산한 검은 구름이 하늘에 뭉게뭉게 모여드는 것이 금시라도 비 한 줄기 할 듯하면서도 여전히 짓궂은 햇발은 겹겹 산속에 묻힌 외진 마을을 통째로 자실 듯이 달구고 있었다. 이 따금 생각나는 듯 산매들린 바람은 논밭간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미쳐 날뛰었다. 뫼 밖으로 농군들을 멀리 품앗이로 내보낸 안말의 공기는 쓸쓸하였다. 다만 맷맷한 미루나 무숲에서 거칠어 가는 농촌을 읊는 듯 매미의 애끊는 노래……. 매―음! 매―음! 춘호는 자기 집―---올봄에 오 원을 주고 사서 든 묵삭은 오막살이집―---방 문턱에 걸터 앉아서 바른 주먹으로 턱을 괴고는 봉당에서 저녁으로 때울 감자를 씻고 있는 아내를 묵묵 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사날 밤이나 눈을 안 붙이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농사에 고리삭 은 그의 얼굴은 더욱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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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웃음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6
1 여름 밤 새벽, 삶고 찌는 듯하던 더위도 인제야 잠깐 물러갔다. 질식한 듯 싶던 바람이 갑자기 생기를 얻은 것이 슬슬 들자, 그 축축하고 눅눅한 입김 에 흔들리어 새하얀 달빛이 흩어졌다. 그 흰 가루는 마치 눈보라 모양으로 입때껏 부글부글 괴어 오르던 땀을 싸늘하게 식히는 듯하였다. 더위에 헐떡이는 것같이, 훨씬 열린 경화의 방 미닫이는 아직도 닫히지 않 았다. 병일이와 단둘이 자는 꼴을, 어둠으로 가리우노라고 전등불은 꺼두었 건만 그 대신 속 없는 달빛이 기어들어 올 줄은 몰랐다. 연옥색 망사모기장 으로 걸어 놓으매 밝고 흰 광선은 푸르게 변하여, 햇발에 비친 바닷속도 이 러할 듯. 그렇다면 젊은 사내와 계집의 손길, 발길에 채이고 밀리어, 여기 불룩불룩, 저기 꾸김꾸김한 모시 겹이불은 굼실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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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편지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4
寫眞[사진]과 便紙[편지] 오늘도 또 보았다.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어떤 해수욕장 ― 어제도 그저께도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망연히 앉아 있는 여인 ― 나이는 스물 대여섯,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처녀는 아니 요 인처인 듯한 여인 ― 해수욕장에 왔으면 당연히 물에 들어가 놀아야 할 터인데, 그러지도 않고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바다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여인 ― 이 여인에 대하여 호기심을 일으킨 L군은 자기도 일없이 그 여인의 앞을 수없이 왕래하였다. “참 명랑한 일기올시다.” 드디어 말을 걸어 보았다. “네, 참 좋은 일기올시다.” 붉은 입술 아래서 나부끼는 여인의 이빨 ― 그것은 하얗다기보다 오히려 투명되는 듯한 이빨이었다. “해수욕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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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처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2
1 "그것이 어째 없을까?" 아내가 장문을 열고 무엇을 찾더니 입안말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없어?" 나는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책장만 뒤적뒤적하다가 물어 보았다.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았는데……." "……" 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 하려는 것을 앎이라. 오늘 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 다. 이 2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는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할 줄 알아 기구(器具)와 의복을 전당국 창고(典當局倉庫) 에 들이밀거나 고물상 한구석에 세워 두고 돈을 얻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가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 는 것도 아침거리를 장만하려 함이라.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 폈던 책을 덮으며 후― 한숨을 내쉬었다. 봄은 벌써 반이나 지났건마는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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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0
시집 온 지 한 달 남짓한, 금년에 열 다섯 살밖에 안 된 순이는 잠이 어릿어릿한 가운데도 숨길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큰 바위로 내리누르는 듯이 가슴이 답답하다. 바위나 같으면 싸늘한 맛이나 있으련마는, 순이의 비둘기 같은 연약한 가슴에 얹힌 것은 마치 장마지는 여름날과 같이 눅눅하고 축축하고 무더운데다가 천 근의 무게를 더한 것 같다. 그는 복날 개와 같이 헐떡이었다. 그러자 허리와 엉치가 뻐개 내는 듯, 쪼개 내는 듯, 갈기갈기 찢는 것같이, 산산히 바수는 것같이 욱신거리고 쓰라리고 쑤시고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쇠막대 같은 것이 오장육부를 한편으로 치우치며 가슴까 지 치받쳐올라 콱콱 뻗지를 때엔 순이는 입을 딱딱 벌리며 몸을 위로 추스른다. 이렇듯 아프니 적이나 하면 잠이 깨련만 온종일 물 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