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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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염 소타나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7. 22:45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십 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떠한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뿐은 있다―---이만치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白性洙)를 혹은 알벨트라 생각 하여도 좋을 것이요 짐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胡某)나 기무라모(木村某) 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삼아 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로써,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 “기회(찬스)라 하는 것이 사람을 망하게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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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리디아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7. 19:30
벌써 360여 년 전. 무대는 그때의 남유럽의 미술의 중심지라 할 T시. 3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혁혁히 빛나는 대화가 벤트론이 죽은 뒤에 한 달이라는 날짜가 지났습니다. 50년이라는 세월을 같이 즐기다가 갑자기 그 지아비를 잃어버린 늙은 미망인은 쓸쓸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해는 밝게 빛납니다. 바람도 알맞추 솔솔 붑니다. 사람들은 거리거리를 빼 곡이 차서 오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미망인에게는 성가시고 시끄럽게만 보였습니다. 너희들은 무엇이 기꺼우냐. 너희들은 너희들이 난 곳을 말대(末代)까지 자랑할 만한 위대한 생명 하나가 한 달 전에 문득 없어진 것을 모르느냐. 너희들은 무엇이 기꺼우냐. 석 달 동안을 참고 참아왔지만, 미망인은 시끄럽고 ‘있으면 있을수록 없는 남편의 생각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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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7. 18:21
“흰 구두를 지어야겠는데…….” 며칠 전에 K양이 자기의 숭배자들 가운데 싸여 앉아서 혼잣말 같이 이렇게 말할 때에 수철이는 그 수수께끼를 알아챘다. 그리고 변소에 가는 체하고 나와서 몰래 K양의 해져가는 누런 구두를 들고 겨냥을 해두었다. 그런 뒤에 손을 빨리 쓰느라고 자기는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한다고 하고 그 집을 나서서, 그길로 바로(이 도회에서도 제일류로 꼽는) S양화점에 가서 여자의 흰 구두 한 켤레를 맞추었다. 그리하여 오늘이 그 구두를 찾을 기한 날이었다. 조반을 먹은 뒤에 주인집을 나서서(이발소에 들러서 면도나 할까 하였으 나)시간이 바빠서 달음박질하다시피 구둣방까지 갔다. 구두는 벌써 되어 있었다. 끝이 뾰족하고 뒤가 드높으며 그 구두 허리의 곡선이라든지 뒤축의 높이라든지 어디 내놓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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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46
“최성구 씨에게는 약혼한 처녀가 있으며…….” “최성구 씨는 혼인 문제 때문에 약혼자의 고향인 T군으로 내려갔으니 …….” 이러한 편지를 처음으로 받았을 때는 정희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성구와 근 일 년을 교제(라 할까?)를 하는 동안에 정희는 성구에게서 그댓 이야기 는 듣지는 못한 - 뿐만 아니라 정희에게는 어떠한 여자와 혼약을 한 사내가 근 일 년이나 다른 여자(정희 자기)와 교제를 하면서 한번도 혼약한 여자를 찾아가 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믿지 못할 일이었다. 만약 그 편지에 있는 말 이 사실이라 하면, 성구는 그 근 일 년 동안에(설혹 찾아는 못 갔다 할지라 도)한마디의 한숨이라도 지었을 것이었다. 근심과 비련의 눈물이라도 지었 을 것이었다. 극도로 이기적으로 - 자기와 성구의 사이의 사랑이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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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끼의 간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45
토끼의 간(肝) 월전(月前)에는 왕(百濟王―義慈)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 하여 이 나라(新羅)의 사십여 성을 빼앗았다. 그 놀란 가슴이 내려앉기도 전에, 팔월에 들면서 백제는 또 장군 윤충(允忠)을 시켜서 신라의 대야성 (大耶城)을 쳐들어 온다는 놀라운 소식이 계림(鷄林)의 천지를 또다시 들썩 하게 하였다. 이 소식이 들어오자 꼬리를 이어서 따라 들어오는 소식은 가로되, “대야성은 함락되었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金品釋) 이하는 모두 죽었 다.”하는 놀랍고도 참담한 소식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그 상보(詳報)가 이르렀다. 그 상보에 의지하건대, 대야성이 백제 장군 윤충의 군사에게 포위되자, 대야성 성내에서는 반역자 의 분란이 일어났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막하에 점일(點日)이라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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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편지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4
寫眞[사진]과 便紙[편지] 오늘도 또 보았다.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어떤 해수욕장 ― 어제도 그저께도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망연히 앉아 있는 여인 ― 나이는 스물 대여섯,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처녀는 아니 요 인처인 듯한 여인 ― 해수욕장에 왔으면 당연히 물에 들어가 놀아야 할 터인데, 그러지도 않고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바다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여인 ― 이 여인에 대하여 호기심을 일으킨 L군은 자기도 일없이 그 여인의 앞을 수없이 왕래하였다. “참 명랑한 일기올시다.” 드디어 말을 걸어 보았다. “네, 참 좋은 일기올시다.” 붉은 입술 아래서 나부끼는 여인의 이빨 ― 그것은 하얗다기보다 오히려 투명되는 듯한 이빨이었다. “해수욕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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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따라기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48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 할 위엄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고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런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나는, 잠시도 멎지 않고 푸른 물을 황해로 부어 내리는 대동강을 향한, 모란봉 기슭 새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뒹굴고 있었다. * 이날은 삼월 삼질,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물 위에는, 결결이 반짝이는 물결을 푸른 놀잇배들이 타고 넘으며, 거기서는 봄향기에 취한 형형색색의 선율이, 우단보다도 부드러운 봄공기를 흔들면서 날아온다. 그러고 거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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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 김동인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0:37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 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농공상의 제2위에 드는) 농민이었었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었다. 이전 선비의 엄한 규율은 농민으로 떨어지자부터 없어졌다 하나, 그러나 어딘지는 모르지만 딴 농민보 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그의 집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자라난 복녀는 물 론 다른 집 처녀들과 같이 여름에는 벌거벗고 개울에서 멱감고, 바짓바람으로 동리를 돌아 다니는 것을 예사로 알기는 알았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 에 대한 저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열다섯 살 나는 해에 동리 홀아비에게 팔십 원에 팔려서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