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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흙과 흰 얼굴 | 정인택
    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7. 17:33

    1


    보슬비인 줄만 알았더니 역 밖에 내려서서 보니 제법 굵은 빗방울이 장마 때 모양으로 주룩주룩 쏟아졌다.


    “많이 오는군요?”


    안내역으로 만척(滿拓) 출장소에서 보내준 김군이 앞서 대합실 처마 밑으 로 뛰어들며 당황해 하는 목소리다.


    철수도 부산하게 뒤를 따라 껑충 뛰면서, “글쎄요……….”


    우장을 꺼낼 생각은 채 못 하고 손수건으로 수선스럽게 어깨를 털고 얼굴 을 닦고나서,


    “탈 게 있을까요?”


    겨우 숨을 돌리고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김군을 쳐다보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걱정인 양이다.


    그러나 채 김군이 무엇이라 대답하기 전에 웬 시커먼 만주 사람이 그들 앞 으로 달음질 쳐 오며 고함을 지른다. 손짓하는 꼴이 그들을 부르는 모양이 었다. 말은 못 알아들었으나 철수는 직감으로 그것이 마차꾼인 줄 깨달았 다.


    “타래지 않습니까?”


    “네, 됐습니다. 농촌에 가는 마찬가봅니다.” 김군도 덩달아 무엇이라 두어 마디 만주말로 고함을 치고나서 무척 반가운 낯으로


    “타시지요.”


    하고는 질척거리는 길을, 골라 디딜 여유도 없이 역앞 마을 거리를 향하여 내닫는다. 철수도 비를 무릅쓰고 처마 밑에서 뛰쳐나왔다.


    역앞 마을이라야 한 2,30호 될까말까했다. 대개가 흙으로 만든 너절한 객 주집 아니면 음식점인데다 그것이 비에 젖어 처량하기 짝이 없는 주위의 풍 경이다. 길거리에는 그저 수없는 돼지떼와 만주 토견이 제 세상인 듯이 우 쭐거리고 쏘다닌다.


    ‘── 혼자 왔드라면 혼날 뻔했군!’ 철수는 달음질 치면서 맘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에 내려서기만 하면 조선 사람이 눈에 띈다고 하얼빈에선 듣고 왔는데 길거리엔 온통 남루하게 차린 만주 사람들뿐이다. 말을 한마디도 모르고 더구나 만주시골에 처음 발을 디 디는 철수는 공연히 고독하고, 공연히 불안했다. 의지할 곳이라곤 김군밖에 없었다.


    ‘── 마차라두 얻어 탔으니 망정이지 그나마두 없었단……’ 혼자 왔으면 그 마차나마 잡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금방 김군이 다시 없이 고마운 사람같이 철수에게는 여겨졌다.


    그들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마차꾼은 자리 밑에서 시퍼런 빛깔의 우산 두 개를 꺼내어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연해 손짓을 하면서 수다스럽게 무엇인 지 떠들어댄다. 철수는 그쪽은 보지도 않고 우선 우산을 펴서 받았다.


    제법 큰 우산이었다. 아직 헐지는 않았으나 무척 오랜 우산인 듯싶었다.


    쇠로 만든 굵다란 대 때문에 무게도 꽤 나간다. 그것을 받아들고, 이윽고 철수는 너털웃음을 치기 시작했다. 중국 병정과 우산 ── 만주 마차꾼과 우산 ── 그것이 전연 다른 사실인 것 같지 않아서 철수는 웃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김군도 우산을 펴서 받고, 어이가 없는 듯이 철수를 돌아본다.


    “하하하하, 우산을 둘씩 준비해가지구 댕기는 게 공연히 우습군요. 하하하 하 이 사람들은 늘 이렇게 우산을 가지구 댕깁니까?” “그런 게지요, 하하…… 좀 기다리라는군요. 또 탈 사람이 있대나요.” “기다려야죠. 별수 있습니까?”


    비는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철수와 김군은 우산을 받은 채 레인코트를 무릎 위에 펴고 말없이 빗발만 바라보며 그렇게 20 분 가까이 기다렸다.


    이윽고 마차꾼은 어린 학생 둘과 조선 농군 한 사람을 데리고 달려왔다.


    그러고는 이 학생들이 밥 먹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늦었다고 싱글싱글 웃고 나서 겨우 채찍을 들어 말을 몰기 시작했다.


    “여기서 농촌까지 몇 시간이나 걸립니까?” “아마 두 시간은 걸릴걸요.”


    두 시간 ── 역에서 농촌까지 12 킬로라니까 두 시간이나 걸린다면 사람 보다 별로 빠를 것이 없다. 그렇게 듣고 보니 빼빼 마른 자그마한 두 마리 의 만주 말은 기를 쓰고 그들이 탄 마차를 끌고 있는 모양이나 이리 뒤치락 저리 뒤치락 더구나 비가 와서 이리 철썩 저리 철썩, 흔들고 까불기만 했지 그 속력이란 참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얻어 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도 못했던들 꼼짝 수없이 이 길을 걷는 외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앞에 탄 두 학생은 농촌에서 나온 학생들이었다. S 까지 채소 사러나왔던 길이라 했다. 둘이 다 6학년이란다. 그들은 철수의 물음에는 수줍은 듯이 대답하고나서, 저희들끼리 무엇인지 킬킬거리다가는 능란한 만주말로 마차 꾼을 놀리고는 좋아라고 너털대는 것이다. 말씨에나 행동에나 표정에나 조 금도 어둔 빛이 없다. 그것이 장차 찾으려는 H 농촌의 안정됨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아 철수는 무척 반가웠다.


    농군인 듯한 조선 옷을 입은 사람은 경상도에서 왔다는 것이다. 셋째 부락 에 자기 형님이 와 계셔서 만나러 간다고 그는 말끝을 잘 맺지 않는다. 아 직 삼십은 못 돼 보이는 얌전한 청년이었다. 그는 물음에 대답하는 외엔 종 시 말이 없었다.


    마차는 어느 틈에 역앞 마을을 빠져나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북 만 벌판, 수없이 깔린 밭이랑, 밭이랑 ── 그 사이에 한가닥 뚫린 H 농촌 에 통한 길을 하염없이 달리고 있었다.


    2


    저쪽 하늘 끝에서 이쪽 하늘 끝까지 철수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늘도 둥글고 지평선도 둥글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군데 군데 선 전선주와 무엇인지 파릇파릇 싹이 돋기 시작한 넓고 넓은 밭뿐이 다.


    항용 쓰는 넓다는 형용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 북만주 6월의 평야를 표현할 수는 없으리만치 참말로 그것은 넓고 클 따름이다.


    그 넓고 큰 평야가 철수 들의 마차가 달리는 그 한가닥 길을 빼놓고는 그 대로 전부가 밭이었다. 이랑 하나가 긴 것은 2킬로나 된다는 이 넓은 평야 ── 밭 가운데다 농막(農幕)을 지어놓고 거기서 묵어가며 밭을 갈고 김을 맨다는 무섭게 넓은 평야 ── 가고 또 가고 그저 단조로운 그 풍경만이 얼 마든지 계속되는 것은 처음 보는 철수에게는 한개의 커다란 놀람이요 슬픔 이었다.


    바닥에 깔린 것은 시커먼 흙이다. 3,4년은 보통이요. 10년까지도 거름 없 이 농사한다는 이 기름진 검은 흙. 반 길을 파도, 한 길을 파도, 풀뿌리 썩 고 나무뿌리 썩은 것이 섞여 시커멓게 변색한 진흙만이 나온다는 이 옥토.


    항용 조선서도 볼 수 있는 잡초들이 여기서는 석자 넉 자씩 무럭무럭 자라 나서 사람조차 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한없이 넓고 기름진 밭을 가는 사람은 누구이고 씨뿌리는 사람은 누구 인고. 암만 둘러보아야 철수는 영 사람의 그림자를 찾지 못하였다. 마치 넓 은 대지가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저 혼자서 이렇게 제풀에 밭이 되고 마 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간 가다 한두 사람씩 기다란 만주 호미로 김을 메고 있기는 하나, 하도 주위가 광막하기 때문에 무슨 허수아비나 그런 것 만들 어 세운 것으로밖에는, 일하는 사람같이 여겨지지가 않는다.


    아침에 씨뿌리고 저녁때 만져보면 커다랗게 부풀었다가 이튿날 새벽엔 벌 써 싹이 돋는다는 이 기름진 평야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마차에 흔들리며 얼마를 가서인지, 철수는 문득 고개를 번쩍 쳐들 었다.


    물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산커녕은 언덕 하나 없는 이 평탄한 들판 한모퉁 이에서 별안간 콸콸콸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 시커먼 흙 벌판 한가운데서, 그리고 산 하나 없고 돌뿌리 하나없고 나 무 한 나무 서지 않은, 그저 넓고 밭 이랑만 수없이 줄지어 있는 이 단조로 움 속에서, 조선의 아담한 산골짜기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것도 졸졸졸 흐 르는 시냇물 소리가 아니라, 제법 폭포수 떨어지듯 콸콸콸 흘러내리는 물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철수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철수는 별안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저게 무슨 물소립니까?”


    당황해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논에 물 대는 소리예요.”


    김군은 아무 표정도 나타내이지 않는다. 늘 듣고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 감 격도 주지를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황량한 벌판을 처음 보고 그 막막한 황야 속에 갖은 고초를 달 게 참아가며 만주 개척이라는 성업에 정진하고 있는 조선 농민들의 생활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철수는 그 물소리를 범연하게 듣고 말 수가 없었다.


    “그럼, 부락이 멀지 않습니까?”


    철수는 금시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여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거진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아마 뵐걸요?” 대답을 듣고나서 철수는 성난 사람같이 입을 꽉 다물고 말이 없다.


    비는 어느 사이에 개이고, 아직 머리 위의 검은 구름은 벗겨지지 않았으나 앞 길엔 엷은 햇볕조차 내리 비치고 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등지고 온 역 쪽 하늘에는 아직도 먹장 같은 구름이 가득 끼었고, 발을 내리치 듯이 비 퍼붓는 양이 신기하도록 뚜렷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미 철수의 맘속에는 그런 것을 신기하게 여길 여유조차 남아 있 지 않았다. 철수는 다만 맘 전체로, 아니 몸 전체로 지금부터 찾아갈 H 농 촌의 모양을 여러 가지로 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가벼운 흥분을 금할 길이 없다. 시험장에나 들어가는 듯한 그러한 일종의 긴장이요 흥분인 것이다.


    ── 그예 왔다! 개척민 부락에를!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조금도 그에게 안도를 느끼게 하지를 않는다. 도리 어 반대로 더욱 자기의 책임을 배가하는 것을 일러줄 따름이었다.


    철수가 남북만 조선인 개척지를 시찰하고 거기서 얻은 견문으로 작품을 써 달라는 조선 이주 협회의 부탁을 받아 경성을 떠난 것이 지금부터 열흘 전 이었다.


    서울서 낳고 서울서 자라서 농촌이 어떤 데고 농민이 무엇인지 까마아득한 철수이기는 했으나, 그러면 그런대로 또 보는 관점이 달라, 다른 무슨 특 이한 것을 붙잡을 수도 있으리라고, 철수는 자기가 나설 계제가 아니라고 처음엔 여러 번 망설이다가 드디어 그것을 응낙했던 것이다.


    이번 철수가 가지고 돌아올 성과 여하에 따라, 그것은 어쩌면 이주 협회의 연중 행사같이 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 있어서, 실로 철수 는 정면으로 요구되는 것 이외의 무형의 압박에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도회밖에는 모르는 철수인데다 만주가 또한 생소한 땅이었다. 한 20여 년 전, 중학생 시절에 수학 여행 갔다온 외엔 철수는 한번도 만주 땅을 밟아보 지 못했고, 만주에 대한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부탁을 받고 나서 출발하기까지의 한 열흘 동안을 철수는 두문불출했다.


    농춘 문제, 개척민 문제, 만주에 대한 벼락 공부를 하느라고다. 그래도 급 히 서둘러 사들인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대여섯 권은 륙색 속에 처넣고 서울 을 출발한 것이다.


    20일 가까이 철수는, 만주에 관한 것과 개척민에 대한 것 외의 것은 책도 읽지 않았고 염두에 두지도 않은 셈이다. 그렇게 그는 이번 여행에 있어 종 시일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 개척민 부락 H 농촌에 지금 철수는 첫걸음을 들여놓으려는 것이다. 그 가 소학생 모양으로 가슴을 졸이고 맘을 도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덜커덕거리던 마차 바퀴 소리가 별안간 멎었다. 경상도에서 왔다는 농군이 내리려는 것이다.


    “저게 부락입니까?”


    철수는 저도 모르게 좁은 마차 위에 벌떡 일어섰다.


    “네, 그게 아마 셋째 부락이지요. 그렇지?” 김군은 대답하다가 앞에 탄 학생들에게 다짐을 한다. 학생들은 앞을 본 채 ‘네’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어기, 저 망루 있는 데가 중앙 부락입니다. 인젠 다 왔습니다. 혼 나셨 죠?”


    철수는 대답 대신 가만히 웃어 보이고 그리고 긴 한숨을 쉬인 후 다시 자 리에 꼬부리고 앉았다.


    마차 바퀴 소리가 없어지니까 주위는 무척 조용하였다. 그 조용함속에서 물소리만이 여전히 똑같은 톤으로 콸콸콸, 아까보다는 훨씬 크게 철수의 귀 에 들려오는 것이다.


    물소리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보았다.


    멀리 나지막한 지붕들이 옹기종기 한데 모여, 밭 가운데 바라보인다. 그것 이 셋째 부락. 그 바른편으로 똑같은 구조의 중앙 부락. 5리, 10리씩 격해 놓고 도합 아홉 개의 부락이 N 하(河) 좌편 일대에 깔려서 이 H 농촌을 구 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소리는 이 N 하의 물을 끌어들이는 용수로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폭이 5


    미터, 길이가 14 킬로 ── 입식(入植)한 지 8년, 이 막막한 벌판에 이러한 굉장한 수로를 파고, 그 물을 이용하여 1,200 정보의 논을 풀기까지의 조선 개척민들의 수고가 얼마나 했을꼬.


    맘 약한 철수는 어느 틈에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고 생 각에 잠겨 있었다.


    중앙 부락이 차차로 가까워오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황무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흰 나무로 만든 아담한 신사(神社)였다. 높은 곳이라고는 약 에 쓸래야 없고 그저 무턱대고 평탄하기만 한 이 고장에서는 이런 황무지 가운데밖에 신사를 세울 곳이 없는 것이다. 신궁이나 신사는 대개 높다란 산이나 언덕 위에 있는 줄로만 알고 있던 철수는, 처음엔 무척 이상하게 생 각하였으나, 그러나 그 넓은 벌판 한가운데 외따로 솟은 하얀 신사는 이 부 락 전체 어느 곳에서든지 바라볼 수 있고 또 그 주위에 추잡한 것이 하나도 없는 만큼 도리어 더 한층 성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윽고 마차는 용수로 둔덕 위의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철수는 얼빠진 사 람같이 그 물줄기만을 뚫어져라고 들여다보고 있다. 북만주의 특징인 누런 흙탕물. 그 흙탕물 흐르는 소리가 이다지도 신기롭고 반가운 것은 무엇 때 문인가. 비래야 오늘 아침 잠깐 쏟아졌을 뿐 오래 가물었는데도 N 하의 수 량이 풍부하여 이 용수로엔 물 마를 때가 없다는 것이다. 언저리가 넘게 물 은 철철 콸콸, 벌판을 꿰뚫고 일직선으로 힘차게 흘러내려간다. 한 10분 가 량, 그 용수로를 거꾸로 치밀어 올라가면 거기가 H 농촌 중앙 부락이었다.


    중앙 부락에 H 농촌연합 사무소가 있는 것이다.


    먼저 흙으로 만든 농가가 몇 집 눈에 띄었다. 수수깡이 울타리가 있고, 울 타리 안에는 채소밭이 있고, 돼지 우리가 있고, 짚더미가 쌓여 있으며 개가 내달아 짖는다. 개가 만주의 토견이요, 지붕이 양초라는 짧은 풀로 이은 지 붕이요, 벽이 이 근처 시커먼 흙으로 만든 벽일 뿐, 조선에서 보는 농가의 풍경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조선에서 보는 농가보다 훨씬 정돈됐고 훨씬 깨끗하고 훨씬 침착한 품조차 엿보였다.


    다음엔 역시 갓 지은 듯한 예배당이 나타났다. 마침 예배가 끝났는지 한쪽 문으로 10여 명의 색시들이 성경책을 옆에 끼고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그 것을 보고 철수는 놀람을 금하지 못한다.


    그것은 도저히 농촌의 풍경이 아니었다. 흰 저고리 검은 짧은 치마에 굽 높은 구두 신은 색시가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순간 철수는 일종의 서운함을 금치 못하였다. 비참한 생활, 음산한 생활, 이 북만주 벌판에서 조선 농민들은 오죽이나 고생들을 하고 있을까 하던, 그리고 꼭 그런 생활만을 예기하고 있던 자기의 예상이 산산이 깨어져 나가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수는 그 서운함을 눈물이 나도록 즐거운 맘으로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통틀어 흙으로 만든 부락. 나무라고는 씨도 볼 수 없는 벌판 가운데에서는 흙을 벽돌 모양으로 네모지게 떠다가 그것으로 담을 쌓고 벽을 바른 것이었 다. 풀뿌리가 섞여 있어서 튼튼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원래가 흙이라 비만 오면 무너져 나간다. 그 예비로 집집마다 이 흙으로 만든 벽돌 ── ‘토피즈’가 마당에 가뜩 쌓여 있었다.


    드디어 마차는 연합회 사무소 문전에 닿았다. 조선 면소 비슷한 그것만은 목조의 건물이었다.


    3


    “숙소가 좀 불편허시겠지만 참어주십시오. 벽지가 돼서 헐 수 없습니다.


    하하하하.”


    이렇게 말하고 연합회 서기가 일어서는 바람에 철수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쳐다보았다. 해는 아직 높았으나 어느덧 6시가 훨씬 넘었다. 얘기에 팔려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또 해가 저렇게 높다라니까 저녁때가 된 줄은 꿈에 도 생각 안 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철수는, 북만에서는 10시까지 훤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고,


    “온,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분주허실 텐데 이렇게 저 때문에…….” 따라 일어서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밖으로 나왔다.


    “길이 질어서…… 여기선 소낙비만 한번 와두 이렇답니다. 조심허세요 …….”


    고무 장화를 신은 서기의 뒤를 따라 철수는 조심조심 골라 디디는것이나 비에 풀린 진흙은 여지없이 발굽까지 푹푹 빠진다. 빠지기만 할 뿐 아니라 한번 신에 달라붙은 흙은 좀체로 떨어지지를 않아 , 한 열 걸음 떼어놓은 사이에 신은 온통 흙투성이고 무게가 천근이었다. 그러나 철수는 오히려 가 벼운 걸음걸이로 찍찍 미끌어지는 길을 활기있게 더듬어갔다.


    “현장엔 낼이나 나가 보시지요.”


    겨우 큰길에 나서 발에 묻은 흙을 탁탁 털면서 서기가 하는 말이다.


    “네, 오늘은 얘기나 더 들려주십시요……. 여기두 여관이 있습니까?” 아까 연합회 사무소에서 듣던 이 부락 건설사를 철수는 속으로 몇번이고 반추(反芻)하면서 아직도 그 감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다.


    “여관이랄 게 있습니까. 그저 손님 오셨을 때 주무실 집을 하나 정해두었 지요. 그러나 정말 누추헌 곳입니다. 하하하.” 건설사의 감격과 아울러 또한 철수의 심금을 흔든 것은 사무소에서 받은 대우였다. 신문에서 보았노라고, 그러지 않아도 금명간에 오실 줄 알고 기 다리고 있었노라고, 그들은 마치 고귀한 빈객이나 맞이하는 듯이 철수를 반 기었다. 조선서 일부러 자기네들 생활을 보러 와주었다는, 그 사실 한 가지 만으로 하잘것없는 자기를 이다지도 반갑게 영접해 준다는 그것에서 철수는 얼마나 그들이 고독하게 지내고 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철수는 이 농촌에서 무엇이고 얻으려고 그렇게만 맘먹은 자기를 부 끄럽게 생각하였다. 수필 재료 하나 얻지 못해도 무관하다. 이 사람들이 뜻 밖에 자기를 이렇게 환영해 주는 그것 한 가지만으로 철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맘을 조금치라도 즐겁게 해줄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철수는 족하다 생각하였다. 그 이상 지금의 철수로서는 그들을 위 하여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처지이다. 순간이기는 하였으나, 철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대로 이 고장에 머물러 이 농민들과 같이 고생해도 좋겠다는 그런 생각까지도 가져 보았던 것이다.


    “여깁니다. 이리루……….”


    그들이 마당에 들어서자 말만한 개가 내달아 짖어댔다. 개짖는 소리와 함 께 일각문이 삐꺽 열리고 수염이 허연 노인이 뛰쳐나왔다. 미리 통지를 했 던 듯싶었다.


    “인제들 내려오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 벽지에 오시느라고 얼마나 고생 을 허셌습니까?”


    “네 ── 아니, 천만에…….”


    철수는 무엇이라 대답할 줄을 모르고 입 안에서 아무렇게나 얼버무리며 노 인의 뒤를 따라 방으로 올라갔다.


    어두컴컴한 방이었다. 벽이고 천장이고 그대로 흙을 바른 채 내버려 두었 기 때문이다. 구들에는 암페라가 장판 대신 깔려 있었다. 장식이라곤 방 구 석에 놓여 있는 남포가 두 개뿐 서편 벽에 뚫린 조그마한 들창이 텅 비인 방안에 몹시 어색했다.


    주인과 서기는 철수와 김군을 방에 남겨놓고 밖으로 나갔다. 철수는 매무 시를 끌러놓고 후끈후끈 하는 암페라 위에 길게 누워보았다. 별안간 잊었던 피로가 엄습했다. 그대로 하루고 이틀이고 눈을 딱 감고 자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철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흐렸던 머릿속이 샘물 같이 맑아진다. 그 찰나 같았으면 철수는 자기 앞에 나타난 아무러한 죄인 이라도 용서할 수 있을 성싶었다.


    일각문이 삐꺽한다. 가만히 발자취 소리가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철수는 무심코 고개를 들고 뜰 쪽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여자였다. 고개를 숙이 고 그는 종종걸음으로 철수가 누워 있는 방문 앞을 지나 맞은편 방으로 들 어가는 것이다. 옆 얼굴이 옥같이 희었다.


    결코 호사스럽게 차린 것이 아니나 어느 모로 보아도 개척민 부락에 있을 성싶은 여성이 아니다. 비단 살결이 희대서 그런 것이 아니라, 행동거지가 모두 도회 여성다웠다. 철수는 잠깐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그 뒷모양을 좇다 가, 그뿐, 다시 문턱을 베개삼고 누우려 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철수는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악 방 안에 들어서려는 여자의 흰 옆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많이 본 여자의 얼굴이다. 익히 아는 여자의 모습이다.


    ── 그러나, 설마…….


    철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을 눈앞에 본 사람 모양으로 눈이 휘둥그 래졌다.


    “저게 누굽니까?”


    억지로 침착하려 하나 목소리가 목에 걸려 잘 나오지를 않았다.


    “글쎄요, 학교 선생님 아녜요?”


    김군도 벌떡 일어나 철수의 시선을 따랐다. 문턱에 가지런히 벗어던진 조 그만 구두밖에는 이미 여자의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두 여선생이 이 집에 하숙허구 있었는데요.” “네에, 그럼…….”


    내가 잘못 본 게라고…… 그렇게 말하려다 철수는 얼른 입을 다물고 다시 머리를 문턱 위에 떨어뜨렸다.


    그인 성싶기도 하다. 아니 틀림없이 그일지도 모른다. 그 옥같이 흰 살결 과, 폭 패인 눈과, 서양 사람같이 날씬한 콧날과, 축 처진 커다란 귀와…… 아무리 순간이기는 하나 이런 그의 특장을 철수로서 잘못 볼 리는 없다. 그 러나 그가 이 북만 개척촌에 와 묻혀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다. 가장 도회적으로 세련받은 그가 이 벌판 한가운데 와서 더구나 국민학 교 선생 노릇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래도, 틀림없이…… 혜옥이다…….


    어지러운 생각의 갈피를 찾지 못하여 쩔쩔매는 철수 머리 위에서 거센 주 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 이거 아무것두 없어서…… 참 부끄럽습니다.” 저녁상이 들어온 것이었다.


    4


    “오늘은‘빼주’나 한잔 허시구 편히 주무시지, 뭘. 하하하. 부락은 낼이 구 모래구 천천히 보시면 되지…….” 아무 때나 악의 없는 너털웃음을 치는 게 버릇인 모양인 연합회 서기는 커 다란 약주잔에 따른 배갈을 연거푸 자꾸 철수에게만 내미는 것이다. 나이는 철수와 어상반해 보였으나, 대륙에서 오래 고초를 격고난 때문인지 철수와 는 반대로 쾌활하고 활달하고 늘 웃는 낯이었다.


    “정말 좀 과헌데요. …… 인젠 …….” “아니 뭘 그러십니까. 주무시면 될걸…… 저희들은 이런 벽지에 처 백혀 사니까, 낙이라군 이것밖에 없습니다. 하하하하. 자아, 한 잔만더…….” “정말 먹을 줄을 몰라요. 그럼 이것으루…….” “아냐, 우리 나온 것만 다 자십시다. 자아, 긴상두 한 잔 드슈.” 김군은 아까부터 벌써 새빨개서 고단한 듯이 벽에 기대인 채 말없이 손만 절레절레 내흔든다.


    김군뿐 아니라, 강권하는 술에 철수도 벌써부터 얼근했다. 공복이요 피로 한 끝인데다 오래간만에 입에 대는 독한 배갈은 순식간에 활짝 그의 몸안에 퍼진 모양이었다.


    철수가 마지막 잔을 비우고 문득 고개를 맞은편 방으로 돌렸을 때, 아까의 그 여자의 커다란 그림자가 창문에 어른 비쳤다 사라진다. 순간 철수의 눈 앞에는 혜옥의 눈물 섞인 얼굴이 굵다랗게 떠올랐다.


    ── 암만해도 혜옥이다…….


    술김도 있어, 철수는 더 그 의문을 그대로 가슴속에 지녀둘 수 없었다. 철 수는 좀 면구스러웠으나 그예 말을 끄집어내고 말았다.


    “저분이 학교 여선생님입니까?”


    “네, 이 댁에 하숙하고 기시답니다.” “오신지 지 오래 되세요?”


    “글쎄, 언제 오셨드라……아마 작년 가을이죠? 쥔님, 마쓰바라 선생님이 오신 게 작년 9월이지?”


    “네.”


    “마쓰바라 선생님요?”


    “네. 어떻게, 아십니까 ? 참 마쓰바라 선생님두 아마 고향이 서울이시래 지.”


    “아뇨. 그저…….”


    철수는 무엇이라 대답할 줄을 몰라서 시선을 한 군데 두지 못한다.


    “아니, 말씀이 났으니 말이지 참 좋은 선생님 만났습니다.대개 이 개척지 에 오는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허면 안 됐지만 출중헌 분은 못 되거든요, 그나마 오래 부지만 해줘두 좋겠는데, 하두 적적하구 교육기관이 만주국으 로 이관된 후엔 보수두 적구, 도회지는 멀구 하니까, 싫증만 나면 달아난단 말예요. 개척지의 이 선생 문제가 정말 큰 문젭니다. 사실 말이지 누가 이 궁벽한 델 오려구 하겠습니까. 그야 개척 국책이 어떤 것인 줄 잘 이해하 구, 정말 개척민 아동들의 교육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선생님이 안 계신 건 아니지만 어디 그런 분이 몇 분 되겠습니까 ? 그저 뜨내기로…….” 연합회 서기는 장난꾼 모양으로 고개를 움추리고 웃고나서 이번엔 약간 목 소리를 낮추어,


    “그건 하여간에 이번엔 저희 부락에 참 훌륭한 선생님이 와 주셨습니다.


    마쓰바라 선생님 말씀예요. 목사님이 소개하길래 오시라 해놓고 보니까. 아 아주 모던 걸이래서, 이런 분이 여기서 견디어낼까 허구 첨엔 좀 실망을 했 었지요. 그랬드니, 웬걸, 이만저만한 분이 아녜요…… 하여간 내 저런 여선 생님을 여기 와서 벌써 6년입니다만 첨 봤습니다. 첨 봤어요. 오신 이튿날 버텀 아이들 위해서 발 벗구 나스시는데…… 참 장하십디다. 장해. 그게 하 루 이틀이 아니거든요. 요새는 애들하구 같이 논에를 다 들어가십니다. 밤 에나 웬 쉬시나요. 틈 있는 대루 학교에 못 댕기는 애들 불러다 놓구 글 가 르치시구, 또 그런가 하면 급할 땐 산파 노릇두 하시구…… 인젠 아마 가신 대두 이 부락 사람이 붙잡구 안 놀 겝니다…….” 그는 마치 제 자랑이나 하는 듯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이다. 가만히 듣 고 있던 철수는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고 “그 선생님 그전 이름이 뭡니까?”


    “아이구, 정씨래든가……자세힌 모르겠습니다. 이리 오시랠까요? 학교 사 정두 들으시구 하게…….”


    “아니, 천만에 …… 내일 학교루 가서 뵙지요.” 금방 일어서려는 연합회 서기를 철수는 당황해서 막으며, 얼른 밥공기를 집어서 주인에게 내밀고,


    “내일은 참 꼭 부락민들을 좀 모아 주세야겠습니다.” 억지로 화제를 돌려버리려 애썼다. 그렇지 않고는 자꾸 그 여선생의 일을 캐어묻고 말 자기인 것을 철수는 잘 알기 때문이다.


    “네에, 아무 걱정 마시구 그저 오늘은 쉬십쇼. 다아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한층 더 쾌활해진 연합회 서기는 또 한번 방안이 쩡쩡 울리게 너털 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5


    마쓰바라 ── 정씨 ── 모두 혜옥의 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제 철수는 억지로다도 그 여선생을 혜옥이라고 믿고 싶었다. 혜옥이 그렇게 훌륭한 여 자로 갱생해주었다면 그것은 실로 다른 누구보다도 철수를 위하여 얼마나 반갑고 기꺼운 소식이냐 말이다.


    아무래도 반드시 혜옥이라야만 했다. 또한 혜옥이 아니고는 그렇게 훌륭하 게 갱생할 수가 없다고도 생각된다. 철수는 지금 무조건으로라도 그렇게 믿 으리라고 억지로 맘을 도사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여간 내일 학교에 가서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그때까 지 참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모든 피로를 잊게 할 수 있는 즐거운 기 대였다.


    ……불과 3년 전 일이다.


    그때 혜옥과 철수는 사랑하는 사이였다. 혜옥은 음악 학교를 가제(갓) 나 온 신진‘소프라노’로서, 철수는 그해의 가장 문제작이던 〈형제〉를 쓴 중견 작가로서 사회의 촉망과 총애를 한 몸에 모아가지고 행복의 절정에서 축복받은 장래만을 설계하면 되었다. 양쪽이 다아 홀어머니 한분씩이라는 단촐한 가정이라, 그들의 전도에, 아무도 부러워는 할지언정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 그들의 사랑은 반 년이 채 못가서 틈이 나고 말았다. 문제는 혜옥이 쪽의‘홀어머니 한 분’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혜옥의 재질과 교양과 인품엔 터럭만치도 티라곤 없었으나 그의 어머니는 그런 혜옥을 낳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으리 만치 무식하고 상스 럽고 욕심 많은 노파였다.


    딸 혜옥의 지위와 명성이 날로 높아감을 따라, 노파는 바야흐로 재물에 탐 을 내기 시작해서, 각 방면으로 혜옥을 이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돈을 받으러 다니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출연 계약까지 함부로 노파의 생 각 하나에 달리게 되었고, 혜옥은 다만 인형 모양으로 지정받은 날, 지정받 은 무대에 나서서 악만 쓰면 되게 되었다.


    혜옥의 출현과 성공이 너무나 찬란했던 만큼 그를 이런 사도(邪道)로 끌어 들이기도 또한 쉬웠다. 노파는 다만 돈 하나를 위하여 그것을 알면서도 혜 옥은 다만‘한 분의 어머니’를 위하여, 생각지도 않던 구렁텅이로 빠른 속 도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가지가지 추문이 혜옥을 싸고 돌며 세상에 전해졌다. 남의 첩 노릇을 한다는 소문, 늙은‘파트론’이 뒤에 있다는 소문, 하다못해 결혼 사기까지 한다는 소문…… 혜옥 자신보다도 오히려 철수가 더 귀를 가리고 싶은 말들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까진 소문만으로 혜옥과 철수의 사이가 멀어질 까닭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도저히 그것을 유쾌히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철수는 거의 매일 같이 혜옥에게 타일렀다. 아무리 어머니를 위한 일이라지만 좀 더 자 중하라고 ── 자기 몸을 아끼라고…….


    그러면 그때마다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혜옥이었으나, 그 이튿날 은 또 외롭고 불쌍한 어머니에게 이끌리어 무정견(無定見)한 출현을 계약하 고 마는 것이다.


    다른 데 있어서는 오히려 남자같이 굳세기까지 한 혜옥이면서도 이 어머니 앞에서만은 맘 약한, 온순하기 만한 한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속에서 불행의 씨가 싹을 트기 시작한 것이다.


    혜옥의 어머니가 혜옥과 철수의 결혼을 반길 까닭은 없었다. 철수가 가장 수완 있는 작가요 그의 작품이 아무리 판을 거듭한다 한들 여전히 셋집으로 떠다니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는 철수인 이상 그런 것은 혜옥의 어머니의 관심할 바 아니었고, 따라 맘에 탐탁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처음엔 그 정도에 그쳤으나, 차차로 철수의 존재는 혜옥의 어머니의 눈에 커다란 방해물로 비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혜옥이가 철수의 편을 들 제 노파는 드디어 그와 대립해 마주 서게 된 것이다.


    노파는 그 다음날로 어떤 시골 부호의 아들과 혜옥의 약혼을 세상에 공표 하고 말았다. 그날부터 기이하게 혜옥의 존재도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 다.


    아직도 철수는 혜옥을 사랑하고 있다, 어머니만 없다면 도저히 길을 잘못 들 여자가 아닌 것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혜옥은 한번 철수 앞에서 자취를 감춘 후 행방이 묘연하였다. 아무리 철수 가 각 방면으로 수소문했어도 귀에 들리는 것이라곤 모두 믿을 수 없는 허 황한 스캔들뿐이었다. 그 부호의 아들과 혼인해가지고 내지에 가서 사느니, 결혼해보니까 둘째 첩이었느니, 이혼하고 술집으로 떠돌아 다니느니, 기생 이 됐느니…… 그러나 철수는 열 번 죽더라도 정말 타락하고 말 혜옥이 아 니라고 그런 소문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철수은 무슨 신앙과도 같이 언 제든지 다시 한번 혜옥이가 전과 똑같은 청정한 몸으로 자기 앞에 나타날 날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혜옥을 싸고 도는 그 여러 가지 소문 중에서 꼭 한 가지 진실성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혜옥이가 어머니조차 뿌리치고 홀몸으로 만주인지 북지인지 로 달아났다는 소문이었다. 거기서 다시는 무대에 나서지 않고 후진을 기르 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철수는 이번 만주 여행을 떠날 때, 은근히 그것을 생각 안 한 것도 아니 다. 요행 혜옥의 종적을 찾을 수 있다면 ── 철수에게 그보다 더 큰 수확 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주는 넓다. 정말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창문 밖에서 벌레소리가 들린다.


    불빛이 그리워, 철수가 가만히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끝없는 하늘엔 조선서 보던 것과 똑같은 별들이 주옥같이 반짝이고 있다.


    그 별빛을 받아 희끗희끗 빛나는 것은 누런 흙탕물을 그뜩그뜩 담은 논판들 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용수로 물소리도 여전히 콸콸콸 변함이 없다.


    어느 사이에 술도 깨었다. 피로도 잊은 듯이 눈이 붙지를 않았다. 철수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다가는 담요를 쓰고 자리에 누웠다.


    마쓰바라 선생이 정말 혜옥이라면 ── 이 북만 개척촌 한구석에서 마당을 격하고 한 지붕 아래에 자기와 같이 누워 잔다는 사실은 실로 소설 이상의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기적은 능히 있을 수 있는 기적이다.


    철수는 또 반신을 일으켜 문틈으로 맞은편 방을 건너다보았다. 역시 이 방 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캄캄할 뿐이다.


    ── 내일 학교 가서 만나면 다아 알걸, 하여간에…….


    그것은 잘못하면 철수의 이번 여행을 망칠 뿐 아니라, 실로 철수의 전 생 애를 결정할 수조차 있는 순간인 것이다.


    철수는 훤하게 동이 틀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교장을 앞세우고 철수와 김군과 연합회 서기는 우급 2년(憂級 2年 ; 6학 년) 우급 1년, 4학년 ── 차례로 교실을 참관하였다.


    “요담이 1학년, 여선생님이 맡으셌습니다. 뭐 설비가 아직 불충분해서 …….”


    교장의 말에 대답을 해야 하긴 했으나 입에 침이 말라 철수는 어색한 웃음 을 입가에 띠고 고개를 잠깐 숙인 다음,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유리창 너머 로 교단 쪽을 바라보았다.


    마쓰바라 선생은 흑판을 향하여 무엇인지 쓰고 있었다. 천천히 ── 한 자 씩 한 자씩 꼭꼭 박아서 차근차근 써나갔다.


    오랫동안 ── 철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오랫동안, 철수는 선뜻 그 교실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그렇게 창 너머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러나 기어코 마쓰바라 선생은 흑판 앞을 떠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그는 그렇게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성 싶었다.


    “들어가 보시지요 ?”


    재촉하는 교장에게 철수는 한참만에, “뭘요, 여기서 봐두…… 시간두 없구 하니까…… 농업 실습지나 보여 주셌 으면…….”


    말끝을 못 맺고 일부러 저벅저벅 앞을 서서 뒤뜰로 내려갔다. 순간 잠깐 동안 눈물이 글썽해서, 철수가 다시 한번 교실 쪽을 돌아보았을 땐, 흑판 도, 그 앞에 선 여선생도, 호기심에 빛나는 아이들의 눈동자도 모두 뽀오얗 게 안개 속에 숨은 듯이 흐려 보일 뿐이었다.


    ── 그가 혜옥이래면…… 역시 혜옥이가 나버덤 총명했군……….


    철수는 논두렁을 걸어가며 혼자 생각하는 것이다.


    ── 혜옥이라 하드래도 아직 안 만나는 게 마땅하구…….


    ── 혜옥이라면 아직두 맘속에 고통이 남아 있을 게니까 ── 좀더 시일 을 줘야 그것을 벗어버리구 딴 사람이 되겠구…….


    ── 혜옥이 아니더라두…… 문득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철수는 무슨 천계


    (天啓)나 받은 듯이 일시에 맘속이 탁 트이는 것 같은 광명을 발견할 수 있 었다. 옆에 사람이 없었으면 어깨라도 탁 칠 지경이었다.


    혜옥이라면 더욱 반갑다, 그러나 혜옥이 아니더라도 이 얼마나 훌륭한 여 자의 생활인가, 갱생이면 더욱 좋고 갱생 아니라도 또한 즐거운 노릇이다.


    근대의 젊은 여성들이 이런 데서 이렇게 꾸준히 살 길을 찾아 나섰다는 것 은 이것은 첫째로 누구를 위하여 만세 부를 일이냐. 그들 여자들 자신을 위 하여서이다. 그렇다 ── 철수는 비로소 그 여자가 혜옥이 아니라도 맘이 뿌듯하게 만족할 수 있었다.


    “……지금 대개 집집이 소 한마리씩은 있구요. 돼지가 또…….” 그때 비로소 철수의 귀에는 연합회 서기의 설명이 또렷또렷하게 들리기 시 작하였다. 옳다 내게는 이런 책임이 있었다고 철수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 어 끝없는 지평선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지막한 지붕들이 옹기종기 한데 모여 멀리 논 가운데로 건너다 보였다.


    보고 있는 사이에 철수는 어젯밤의 자기가 무슨 죄인같이만 여겨져서 견딜 수 없었다.


    철수는 얼른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어 연합회 서기의 얘기를 받아 적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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