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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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사감과 러브 레터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7. 17:49
C 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 노하는 것처럼 아모말 없이 눈살로 쏘기만 하다가 한참 만에야 그 편지를 끄집어내어 학생의 코앞에 동댕이를 치며, “이건 누구한테 오는 거냐?” 하고 문초를 시작한다. 앞장에 제 이름이 쓰였는지라, “저한테 온 것이야요.” 하고 대답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발신인이 누구인 것을 채쳐 묻는다. 그런 편지의 항용으로 발신인의 성명이 똑똑치 않기 때문에 주저주저하다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내대일 양이면, “너한테 오는 것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 고 불호령을 나린 뒤에 또 사연을 읽어 보라 하여 무심한 학생이 나직나직 하나마 꿀 같은 구절을 입술에 올리면 B 여사의 역정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놈의 소위인 것을 기어이 알려 한다. 기실 보도 듣도 못한 남성의 한 노릇이요 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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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56
궐(厥)은 가정의 단란(團欒)에 흠씬 심신(心身)을 잠그게 되었다. 보기만 하여도 지긋지긋한 형식상의 안해가, 궐이 일본 xxx대학을 졸업하 자마자 불의에 죽고 말았다. 궐은 중등교육을 마친 어여쁜 처녀와 신식 결혼을 하였다. 새 안해는 비스듬히 가른 머리와 가벼이 옮기는 구두 신은 발만으로도 궐에게 만족을 주고 남았다. 게다가 그 날씬날씬한 허리와 언제든지 생글생글 웃는 듯한 눈매를 바라볼 때에 궐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었다. 살아서 산 보람이 있었다. 부모의 덕택으로 궐은 날 때부터 수만 원 재산의 소유자였다. 수 년 전 부 친이 별세하시매, 무서운 친권(親權)의 압박과 구속을 벗어난 궐은 인제 맏형으로부터 제 모가치를 타기도 되었다. 새 안해의 따뜻한 사랑을 알뜰살 뜰히 향락하기 위함에 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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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날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15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 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 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 시는 앞집 마마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학교(東光 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십전 , 둘째 번에 오십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치 않은 일이 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십 전짜리 백동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 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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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청산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13
연애의 청산[淸算] (1회) 1 김형식의 출옥할 날은 가까워 온다. 고려 공산당 청년회 사건으로 평양 복 심 판결에서 삼년 징역을 받을 때엔 아모리 각오한 노릇이로되 눈앞이 캄캄 하였다. 스물 한 살이면 한창 좋은 인생의 봄철이 아닌가. 빛나는 이 청춘 의 한 토막을 이 세상 지옥에서 썩고 배겨낼까. 삼 년이면 일천 구십 오일! 이 숱한 날짜가 과연 지나갈 것인가? 이 아득한 시간의 바닷속에 떠올라보 지 못하고 아주 잠으러 버리지나 않을까. 그러나! 쇠창살 너머로도 해는 뜨고 졌다. 까마득하던 삼 년도 지나는 갔 다. 인제 이레만 더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하면 갈데없이 만기의 날이 닥쳐 오고야 만다. 그까짓 삼 년쯤이야! 그는 코웃음을 치게 되었다. 출옥을 하 면! 그의 몸과 맘은 벌써 자유로운 세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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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웃음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6
1 여름 밤 새벽, 삶고 찌는 듯하던 더위도 인제야 잠깐 물러갔다. 질식한 듯 싶던 바람이 갑자기 생기를 얻은 것이 슬슬 들자, 그 축축하고 눅눅한 입김 에 흔들리어 새하얀 달빛이 흩어졌다. 그 흰 가루는 마치 눈보라 모양으로 입때껏 부글부글 괴어 오르던 땀을 싸늘하게 식히는 듯하였다. 더위에 헐떡이는 것같이, 훨씬 열린 경화의 방 미닫이는 아직도 닫히지 않 았다. 병일이와 단둘이 자는 꼴을, 어둠으로 가리우노라고 전등불은 꺼두었 건만 그 대신 속 없는 달빛이 기어들어 올 줄은 몰랐다. 연옥색 망사모기장 으로 걸어 놓으매 밝고 흰 광선은 푸르게 변하여, 햇발에 비친 바닷속도 이 러할 듯. 그렇다면 젊은 사내와 계집의 손길, 발길에 채이고 밀리어, 여기 불룩불룩, 저기 꾸김꾸김한 모시 겹이불은 굼실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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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처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2
1 "그것이 어째 없을까?" 아내가 장문을 열고 무엇을 찾더니 입안말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없어?" 나는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책장만 뒤적뒤적하다가 물어 보았다.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았는데……." "……" 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 하려는 것을 앎이라. 오늘 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 다. 이 2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는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할 줄 알아 기구(器具)와 의복을 전당국 창고(典當局倉庫) 에 들이밀거나 고물상 한구석에 세워 두고 돈을 얻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가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 는 것도 아침거리를 장만하려 함이라.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 폈던 책을 덮으며 후― 한숨을 내쉬었다. 봄은 벌써 반이나 지났건마는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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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 현진건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2:00
시집 온 지 한 달 남짓한, 금년에 열 다섯 살밖에 안 된 순이는 잠이 어릿어릿한 가운데도 숨길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큰 바위로 내리누르는 듯이 가슴이 답답하다. 바위나 같으면 싸늘한 맛이나 있으련마는, 순이의 비둘기 같은 연약한 가슴에 얹힌 것은 마치 장마지는 여름날과 같이 눅눅하고 축축하고 무더운데다가 천 근의 무게를 더한 것 같다. 그는 복날 개와 같이 헐떡이었다. 그러자 허리와 엉치가 뻐개 내는 듯, 쪼개 내는 듯, 갈기갈기 찢는 것같이, 산산히 바수는 것같이 욱신거리고 쓰라리고 쑤시고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쇠막대 같은 것이 오장육부를 한편으로 치우치며 가슴까 지 치받쳐올라 콱콱 뻗지를 때엔 순이는 입을 딱딱 벌리며 몸을 위로 추스른다. 이렇듯 아프니 적이나 하면 잠이 깨련만 온종일 물 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