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
허허 망신했군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1. 00:04
때아닌 비가 와서 길바닥이 몹시 진 바로 며칠 전 석양이다. 나는 평소에 하는 대로 인쇄 잉크와 기름이 새까맣게 묻은 작업복을 입은 채 벤또 꾸러미를 옆에 끼고 교동 어귀로 들어섰다. 길바닥은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이 보면 한바탕 데굴데굴 굴러보고 싶게 동지 팥죽 이상으로 흐뭇하게 이겨놓았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비켜서 마치 걸음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처럼 뜸적뜸적 거북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동편쪽 상점 앞으로 다가서서 마른 곳을 밟아 가느라니까 바로 앞에서 17%쯤 되는 모던 걸 하나가 역시 댄서 흉내를 내는 것처럼 걸음마를 하고 온다. 단발은 않고 레이티스트 스타일의 낙타색 오버를 쿨럭쿨럭하게 입고 역시 오버빛과 같은 실크 양말과 굽 높은 구두를 신고(덧구두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
정거장 근처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43
停車場近處 1 밤 열한점 막차가 달려들려면 아직도 멀었나보다. 정거장은 안팎으로 불만 환히 켜졌지 쓸쓸하다. 정거장이라야 하기는 이름뿐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밤이니까 아니보이지만 낮에 보면 논 있는 들판에서 기차길이 두 가랑이로 찢어졌다가 다시 오므려 진 그 샅을 도독이 돋우어 그 위에 생철을 인 허술한 판장집을 달랑 한 채 갸름하게 앉혀놓은 것 그것뿐이다. 그밖에 전등을 켜는 기둥이 몇 개 섰고, 절 뒷간처럼 쫓겨간 뒷간이 있고 쇠줄로 도롱태를 달아놓은 우물이 있고, 그리고 넌지시 떨어져 술집, 사탕 집, 매갈잇간, 주재소 그런 것들이 초가집, 생철집 섞어 저자를 이룬 장터 가 있고. 그러나 그러는 해도 이 정거장이 올 가을로 접어들면서 굉장하게 번화해졌 다. 금점판(砂金鑛[사금광])이 터져서 그렇다...
-
미스터 방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41
주인과 나그네가 한가지로 술이 거나하니 취하였다. 주인은 미스터 방(方), 나그네는 주인의 고 향 사람 백(白)주사. 주인 미스터 방은 술이 거나하여 감을 따라, 그러지 않아도 이즈음 의기 자못 양양한 참인데 거 기다 술까지 들어간 판이고 보니, 가뜩이나 기운이 불끈불끈 솟고 하늘이 바로 돈짝만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내 참, 뭐, 흰말이 아니라 참, 거칠 것 없어, 거칠 것. 흥, 어느 눔이 아, 어느 눔이 날 뭐라구 허 며, 날 괄시헐 눔이 어딨어, 지끔 이 천지에. 흥 참, 어림없지, 어림없어.” 누가 옆에서 저를 무어라고를 하며 괄시를 한단 말인지, 공연히 연방 그 툭 나온 눈방울을 부리 부리, 왼편으로 삼십도는 넉넉 삐뚤어진 코를 벌씸벌씸 해가면서 그래 쌓는 것이었었다. “내 참, 이래봬두, ..
-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31
1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지." K사장은 안락의자에 폭신 파묻힌 몸을 뒤로 벌떡 젖히며 하품을 하듯이 시원찮게 대답을 한다. 두팔을 쭉 내뻗고 기지개라도 한번 쓰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눈치다. 이 K사장과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공손히 마주앉아 얼굴에는 '나는 선배인 선생님을 극히 존 경하고 앙모합니다' 하는 비굴한 미소를 띠고 있는 구변 없는 구변을 다하여 직업 동냥의 구걸( 求 乞) 문구를 기다랗게 늘어놓던 P……P는 그러나 취직운동에 백전백패(百戰百敗)의 노졸(老 卒)인지 라 K씨의 힘 아니 드는 한마디의 거절에도 새삼스럽게 실망도 아니한다. 대답이 그렇게 나왔으니 인제 더 졸라도 별수가 없는 것이지만 헛일삼아 한마디 더 해보는 것이다. "글쎄올시다.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어떻게 해주십사고 ..
-
냉동어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16
冷 凍 魚[냉동어] ── 딸의 이름 ── ……바다를 鄕愁[향수]하고, 딸의 이름 澄祥[징상]을 얻다. 1 ××빌딩 맨 위층 한편 구석으로 네 평 남짓한 장방형짜리 한 방을 조붓 이 자리잡고 들어앉은 잡지 춘추사(春秋社)의 마침 신년호 교정에 골몰한 오후다. 사각, 사각……. 사그락, 삭삭……. 단속적으로 갱지(更紙)에 긁히는 펜 소리 사이사이, 장을 넘길 때마다 종 이만 유난히 바스락거릴 뿐, 식구라야 사원 셋에 사동 하나 해서 단출하기 도 하거니와, 잠착하여 아무도 깜박 말을 잊는다. 종로 한복판에 가 섰는 빌딩이라, 저 아래 바깥 거리를 사납게 우짖으며 끊이지 않고 달리는 무쇠의 포효와 확성기의 아우성과 사이렌과 기타 도시 의 온갖 시끄런 소음이, 그러나 이 방안에선 그리하여 잠깐 딴 세상의 음향 인..
-
그 뒤로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1:03
이 1편은 「어느 일요일날의 삽화(揷話)」의 속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인바 그 「어느 일요일날의 삽화」는 어떠한 사정으로 발표를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하여 둔다. (작자) 오월달 어느 날. ─ 아침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P는 같이 모여 점심을 먹던 동지들을 작별하고 M과 같이 종로 네거리로 나섰다. 벌써 세 번째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P에게는 처음 때와 달라 별로 이 ‘출옥한 때의 특이한 감상’같은 것은 첨예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이번 이 사 년─칠 년이었으나 삼 년은 감형이 되었다 ─사 년이라는 비교적 긴 동안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변천된 경성의 면모가 현저하게 그의 눈에 띄었다. 타일 입힌 여러 층 벽돌집, 디파트먼트, 빌딩, 일류미네이션, 쇼윈도, 그리고 여객 수송 비행기, 버스, 허리가 늘씬..
-
얼어죽은 모나리자 | 채만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0:15
농투성이(農民)의 딸자식이 별수가 있나! 얼굴이 반반한 게 불행이지. 올해는 윤달이 들어 철이 이르다면서 동지가 내일 모렌데, 대설 추위를 하느라고 며칠 드윽 춥더니, 날은 도로 풀려 푸근한 게 해동하는 봄 삼월 같다. 일기가 맑지가 못하고 연일 끄무레하니 흐린 채 이따금 비를 뿌리곤 하는 것까지 봄날하듯 한다. 오늘은 해는 떴는지 말았는지 어설프게 찌푸렸던 날이 낮때(午正)가 겨운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대로 더럭 저물어버린다. 언덕배기 발 가운데 외따로 토담집을 반 길만 되게 햇짚으로 울타리한 마당에서는 오목이네가 떡방아를 빻기에 정신이 없이 바쁘다. 콩 콩 콩 콩 단조롭기는 하되 졸리지 아니하고 같이서 마음이 급해지게 야무진 절구 소리가 또 어떻게 들으면 훨씬 한가롭기도 하다. 오목이네 이마에서는 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