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
향수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1. 00:02
찔레순이 퍼지고 화초포기가 살아났다고 해도 원체가 고양이 상판만큼 밖에 안 되는 뜰 안이라 자복이 깔아놓은 조약돌을 가리면 푸른 것 돋아나는 흙이라고는 대체 몇 줌이나 될 것인가. 늦여름에 해바라기가 솟아나고 국화나 우거지면 돌밭까지 가리워 버려 좁은 뜰 안은 오종종하게 더욱 협착해 보인다. 우러러보이는 하늘은 지붕과 판장에 가리워 쪽보만큼 작고 언덕아래 대동강을 굽어보려면 복도에서 제기를 디디고 서야만 된다. 이 소꿉질 장난감 같은 베이비 하우스에서 집을 다스리고 아이를 돌보고 몸을 건사해야 하는 아내의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별수없이 새장 안의 신세밖에는 안되어 보이면서 반날을 그래도 밖에서 지울 수 있는 남편의 자리에서 보면 측은히도 여겨진다. 제 스스로 즐겨서 장안에 갇히워진 ‘죄수’라면 이 역 ..
-
해바라기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1. 00:00
언제인가 싸우고 그날 밤 조용한 좌석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을 때, 즉시 싸움을 뉘우치고 녀석을 도리어 측은히 여긴 적이 있었다. 나날의 생활의 불행은 센티멘탈리즘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사회의 공기라는 것이 깔깔하고 사박스러워서 교만한 마음에 계책만을 감추고들 있다. 직원실의 풍습으로만 하더라도 그런 상스러울 데는 없는 것이 모두가 꼬불꼬불한 옹생원이어서 두터운 껍질 속에 움츠러들어서는 부질없이 방패만은 추켜든다. 각각 한줌의 센티멘탈리즘을 잃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거칠고 야만스런 기풍은 얼마간 조화되지 않을까. ─아닌 곳에서 나는 센티멘탈리즘의 필요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처럼의 일요일도 답답한 것이 되기 시작했다. 확실히 마음 한 귀퉁이로는 지난날의 녀석과의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싸움같이 ..
-
푸른탑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54
물위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봐, 철교야.” 강폭이 넓어져 오는 수면에 간지러운 모터의 음향이 새겨지고, 뱃머리가 뾰족하 고 하얀 배가 물의 요정처럼 재빠르다.수맥을 뒤로 길게 끌면서 달리는 뱃전에 상쾌한 감각이 전해져 온다.물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강변의 백양나무 가로수 를 바라보며 모두들 상쾌한 기분이었다.보트의 세 남자, 여기에 홍일점을 가하여 4인의 즐거운 하루의 행락은 수마일 의 상류를 우회하고 돌아오는 해질 무렵이였 다. “이렇게 우리 원족은 끝났다.이건가.” “여름도 끝났다.그렇다.” 들떠 떠드는 하나이(花井[화정])와는 반대로 안영민(安英民)은 좀 말수가 적었 다. 그 성격적인 차이를 얽어서 이상한 분위기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 마키(牧[목])와 그의 여동생 요..
-
오리온과 능금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20. 23:24
1 ‘나오미’가 입회한지는 두 주일밖에 안되었고, 따라서 그가 연구회에 출 석하기는 단 두 번임에 불구하고 어느덧 그의 태도가 전연 예측치 아니하였 던 방향으로 흐름을 알았을 때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감정 의 움직임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짧은 시간에 그가 나에게 대하여 그러한 정서를 품게 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뜻밖의 일이었음을 나는 놀라는 한편 현혹한 느낌을 마지않았던 것이다. 하기는 ‘나오미’가 S의 소개로 입회하게 된 첫날부터 벌써 나는 그에게 서 ‘동지’라는 느낌보다도 ‘여자’라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그것은 ‘나오미’가 현재 어떤 백화점의 여점원이요, 따라서 몸치장이 다소 사치 한 까닭이라는 것보다도 대체로 그의 육체와 용모의 인상이 너무도 연하고 사치한 까닭이었다. ..
-
계절 | 이효석한국문학/한국소설 2019. 2. 7. 20:49
1 “천당에 못갈 바에야 공동변소에라도 버릴까.” 겹겹으로 싼 그것을 나중에 보에다 수습하고 나서 건은 보배를 보았다. “아무렇기로 변소에야 버릴 수 있소.” 자리에 누운 보배는 무더운 듯이 덮었던 홑이불을 밀치고 가슴을 헤쳤다. 멀쑥한 얼굴에 땀이 이슬같이 맺혔다. “그럼 쓰레기통에라도.” “왜 하필 쓰레기통예요.” “쓰레기통은 쓰레기만 버리는 덴 줄 아우 ─ 그럼 거지가 쓰레기통을 들 쳐 낼 필요가 없어지게.” 건은 농담을 한 셈이었으나 보배는 그것을 받을 기력조차 없는 듯 하였다. “개천에나 던질 수밖에.” “이왕이면 맑은 물 위에 띄워 주세요.” 보배는 얼마간 항의하는 듯한 어조로 말 뒤를 재쳤다. “─ 땅속에 못 파묻을 바에야 맑은 강 위에나 띄워 주세요.” “고기의 밥 안되면 썩어서 흙 되기야..